전근대 우리나라의 접착제, 왕의 초상화와 관의 채색에는 최상품의 아교와 녹각교를 사용했다!
교(膠)는 동물의 가죽, 힘줄, 창자, 뼈 등을 물과 함께 끓여서 추출한 천연 단백질이며,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주로 접착제를 지칭하는 용어의 하나에 해당했다. 교에 관한 이른 시기의 기록물 가운데 하나인 「周禮」考工記에서도 "膠는 붙이기 위한 것이다"라고 했으며, 후한시대 문헌인 「설문해자」「이아」 등에서도 동일 의미로 풀이했다. 주로 짐승의 가죽이나 물고기의 껍질 등을 이용했기 때문에 한글로는 '가죽의 풀'을 뜻하는 '갓블', '갓풀', '갓풀'등으로 명명했다. 일본에서는 삶다(煮)에 해당하는 'に'와 가죽(皮)에 해당하는 'かわ'를 합성하여 '니가와'라는 명칭을, 서양에서는 'glues', 'glue', 'gelatin' 등의 명칭을 사용했다. 대개 원 재료를 끓여 교질을 추출한 후 여과, 농축, 응고, 건조 등의 과정을 거쳐 제조했다.




화학적으로 교는 콜라겐(Collagen, C102H149O38N31)에 해당하며, 여기에 글리신(Glycine), 프롤린(Proline), 하이드록시프롤린(Hydroxylysine) 등 다양한 아미노산을 함유했다. 이들 아미노산은 동물마다 그 구성비가 다르며, 따라서 각각 물성을 달리하는 요인으로 기능했다. 아울러 단백질을 주요 성분으로 하기 때문에 식용 및 약용으로도 사용했다.
이와 같은 동물성 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제조, 사용되었으며, 주로 내륙아시아와 서아시아 등이 주요 기원지로 이해되고 있다. 사해 근처 나할 메마르 동굴 출토 유물과 고대 이집트 유적의 회화 및 공예품 등에 사용된 교의 경우 각각 기원전 6000년, 기원전 2500년 경에 해당한다. 그리스지역의 경우도 우피교와 어교 제조에 관한 기록이 아리스토텔레스(384~322 B.C.)의 「동물사」에 언급되며, 로마 학자 플리니우스(23-79)의 「박물지」에도 어교의 제조 및 사용법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현존 자료에 근거할 경우 중국이 가장 이른 시기에 출현하며, 춘추시대와 전국시대 저작으로 간주되는 「五十二病方」과 「周禮」 등은 가장 오랜 교 관련 기록물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 고분벽화에 사용된 구교가 가장 이른 제조 용례에 해당한다.
동물성 교는 지역별로 다양하게 출현했다. 유럽에서는 그리스시대 우교, 어교의 출현과 더불어 이후 토교, 녹교, 철갑상어 부레교, 고래꼬리교 등의 제조로 확대되었으며, 흑해 지역에서는 철갑상어교, 북극 인디언 거주 지역에서는 연어, 송어 등의 알을 이용한 어란교, 연해주 지역에서는 해삼교 등을 생산했다. 중국의 경우 전국시대 마교, 우교, 녹각교, 서교(犀膠), 어교 등의 제조를 시작으로 이후 저교(猪膠), 구교(狗膠), 서교(鼠膠), 타교(駝膠), 여교(驢膠), 나교(騾膠), 미록교(麋鹿膠) 등 다양한 종류의 교를 생산했다.
중국의 경우 대개 동물 이름을 앞에 붙이는 명명법을 선호했는데 어교(魚膠)와 같이 물고기 전체를 강조하여 범칭으로 명명한 경우, 표교(鰾膠) 및 녹각교(鹿角膠) 등과 같이 사용 부위인 부레(鰾) 및 녹각을 강조하여 명명한 경우, 황명교(黃明膠), 청교(淸膠), 백교(白膠) 등과 같이 교의 색과 투명도 등에 초점을 두고 명명한 경우, 개교(蓋膠)와 같이 아교를 끓여서 추출할 때 위 부분의 맑은 것을 지칭하여 명명한 경우, 조교(條膠)와 같이 나뭇가지 모양의 긴 막대형 교를 지칭하여 명명한 경우, 수교(水膠)와 같이 물소로 제조된 교를 지칭하여 명명한 경우, 아교(阿膠), 광교(廣膠) 등과 같이 산동성 동아현과 광동 및 광서 지역에서 산출되는 교를 강조하여 명명한 경우 등 다양한 방식의 명칭 및 명명법을 출현시켰다.
우리나라의 경우 교 문화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교에 관한 명칭이 어떠한 역사적 전개 과정을 거쳐 정착, 분화되었는지 분명치 않다. 다만, 삼국시대에 이미 狗膠, 麋鹿膠 등 몇몇 종류의 교를 출현시킴으로써 교 문화의 일정한 토대를 형성했다. 일본 정창원에 소장된 '신라양가상묵(新羅楊家上墨)', '신라무가상묵(新羅武家上墨)' 등도 신라에서의 교 제조를 상정케 한다. 아울러 아교, 미록교(麋鹿膠) 등의 명칭 출현으로부터 중국식 명명법 수용의 일면도 읽게 한다. 이러한 양상은 고려시대도 지속되어 아교, 녹각교, 黃明膠, 白膠, 鹿膠 등 보다 다양한 교 명칭을 출현시켰으며, 아울러 우피(牛皮), 나피(騾皮) 등 제조원에 관한 기록 역시 보다 다양화, 구체화했다.
조선시대의 경우 고려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다종, 다양의 토대 위에서 교 문화를 전개했으며, 우피교, 녹각교, 마피교(馬皮膠), 여피교(驢皮膠), 민어교, 석수어교(石首魚膠), 연어피교, 오교(鰲膠), 황교(黃膠), 봉취교(鳳嘴膠), 어타(魚鮀) 등 10여 종이 넘는 교를 제조했다. 여피교는 당나귀 가죽으로, 민어교와 석수어교는 각각 민어와 조기의 부레로, 오교와 황교는 커다란 게의 딱지와 집게발로, 어타는 바다고기나 모래무지의 뼈로 제조했다. 특히 어타의 경우 재료를 뽕나무 잿물과 섞은 후 뽕나무를 태워서 가열, 제조함으로써 다소 특이한 제조법도 출현시켰다. 게다가 그릇 모양의 틀에 교의 액을 넣어 굳힌 후 그릇을 만들거나 혹은 편으로 만들어 물건을 만드는 데 사용됨으로써 소용처 역시 특이한 면모를 내보였다. 뿐만 아니라 난교(鸞膠)와 같이 거문고 등의 줄을 잇는 특수한 접착제도 출현시켰다.



조선시대에는 교의 생산 지역도 상당히 광범위했다. 우피를 위주로 한 아교의 생산은 전국 각지에서 전개했으며, 특히 중앙의 군기시와 선공감 등에는 아교장을 두어 생산을 전문화했다. 해산물을 위주로 한 어교 역시 충청, 전라, 경상, 경기, 황해, 평안, 함경 등 각도의 바다 및 강 인접 상당수 지역에서 생산되었으며, 녹각교 역시 충청, 경상, 전라, 강원, 평안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생산되었다.
조선시대 교는 약재로서 상당량이 소비되었지만 채색과 포수 등을 비롯하여 병기 및 목기 등의 제작 과정에서 필요로 하는 접착제로 보다 많은 소비가 이루어졌다. 일례로 1901년 의정부찬정 택지부대신서리 이용익이 의정부의정 윤용선에게 진연 준비 과정에서 각종 기물의 채색에 필요한 아교를 청구한 바 있는데, 수량이 935근에 달했다. 이들이 모두 채색을 위해 사용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함께 청구한 안료의 양 역시 천여 근에 이르고, 안료와 동일한 항목에 포함시켜 청구서를 작성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량이 채색에 사용된 경우였다. 1902년도 고종의 60세 생일 진연을 위해 의정부찬정 탁지부대신 김성근이 의정부참정 김규홍에게 청구한 아교량 역시 469근에 이르렀으며, 함께 청구한 안료량 역시 수백 근에 달했다. 특히 왕실 초상화의 어용에는 내의원에 있는 최상품 아교를 주로 사용했으며, 대부분 약재로 소비된 녹각교 역시 왕의 명정과 재궁 등에 금분으로 글씨를 쓰거나 대렴 과정에서 관 표면에 분체 장식을 할 경우 내의원에 있는 최상품 녹각교를 가져다 사용했다.
조선시대에는 교 종류의 확대뿐 아니라 교 관련 기록도 수천 건에 이를 정도로 크게 증가했다. 고려시대 몇 건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기록 문헌 종류도 고려시대 2~3종에서 수십 종으로 확대되었으며, 특히 관찬서인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비변사등록」「의궤」「각사등록」각종 지리지 및 법령자료 등을 통해 공납지역, 유통량, 소용처 등과 관련된 내용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했다. 아울러 어교는 각 군현의 궐공 항목에, 아교와 녹각교는 각 군현의 약재 항목에 분류, 분정함으로써 수취 체계 역시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되었다. 이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교가 국가적 관심을 받는 물품의 하나로 등장했음을 나타내주는 동시에 교 문화 발전의 상당 부분이 국가에 의해 주도되었음을 시사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교 문화 발전이 다종, 다양의 토대 위에서 실질적 발전 단계로 진입했음을 말해준다.
원 게재: 특별기고 / 회화지 30호(2023) 50–51쪽 · 원본 PDF 52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