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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환경'의 상황과 전망

심상용(동덕여대 교수, 미술사학 박사)

현대미술문화에 있어 창작환경이라 함은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접근할 수 있다. 미시적인 의미에서의 창작환경은 미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수행하고 실천할 수 있는 물리적인 공간과 같은 구체적인 작업환경을 의미한다. 오늘날 창작환경을 지원한다 할 때, 그것은 주로 이 같은 미시적 환경을 의미한다. 이와 달리 거시적인 의미의 창작환경을 언급할 수 있는데, 그것은 미술품의 생산과 소비, 유통과 시장, 사회적인 분위기 등 그야말로 총체적인 환경을 의미한다. 따라서 거시적 의미에서 한 사회의 창작환경이 어떠한가, 현재 어떤 결과들을 창출하는가, 혹 어떤 결과를 창출해야 하는가 등의 문제는 생산과 수요, 시장의 각 주체들과 상황들에 관한 전반적인 질문들을 통해서만 측정되고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창작환경의 상황을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

작가들은 창작할 맛이 나는가?(작가들의 생존여건은 어떤가) 적절한 작가교육프로그램이 존재하는가? 창작활동이 어느 정도 사회와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가? 시장은 잘 작동하는가? 사회적 수요는 있는가?(컬렉션은 어느 정도 보편적인 문화인가) 국가의 관심과 지원은 어느 정도인가? 유지와 지원을 위한 적절한 사회적 제도는 형성되어 있는가? 창작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인 동의가 형성되어 있는가?

이런 거시적인 측면에서 우리 사회의 창작환경을 점검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예컨대 우리의 미술창작환경은 주로 어떤 장애에 봉착해 있는가? 작가들의 충원방식은 유효 한가? ('미술대학은 여전히 유효 한가'의 문제로 나아갈 수 있다.) 사회적으로 미술창작에 대한 어느 수준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가? 가격결정구조, 공급수요조절 같은 거시적 의미에서의 미술시장은 작동, 혹 존재하는가?

이 모든 요인들은 자동차의 각 부속처럼 유기적으로 작동하므로, 총체적인 분석, 진단 없이는 어떤 판단도 지엽적이고 편협할 수밖에 없다. 이 거시적 창작환경을 모두 언급할 수는 없지만, 그 현재의 상황과 전망에 관해 두 세 가지의 원론적인 확인이 가능할 것이다. 이 확인은 우리가 미시적 창작환경을 언급할 때에도, 그 배후에 연계된 총체적인 문제를 환기시킴으로써 논의를 보다 실질적인 것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발제에서는 이런 사실들을 확인하고, 특히 창작환경의 급진적인 변화의 요소를 점검해 보도록 하겠다.

첫째, 창작환경은 매우 열린 구조라는 점이다. 창작환경은 그것이 생산해낸 결과를 소비하는 환경과 연계되어 있으며, 그 자체로도, 생산주체(작가)의 충원환경, 제도 환경, 정보환경과 맞물려 있다. 이런 맥락에서 창작환경은 거의 사회의 일반 환경과 맞물려있으며, 그것의 특정한 반영양식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점은 '창작환경'이란 주제를 매우 다루기 매우 어려운 것으로 만들고, 그에 관한 논의들을 지엽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으로, 곧 실효성이 결여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둘째, 창작환경은 이와 같은 복합적인 요인들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셋째. 창작환경이 매우 급진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 급속히 변화하면서 예술의 환경은 본질적으로 테크놀로지적으로 되었다.

테크놀로지적 기술뿐 아니라, 그 사유도 기술의 축적이 되어가고 있다. 이전에 작품은 정신과 윤리와 손기술의 오랜 숙성과정을 거치는 것이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를 완성하는데는 4년이 필요했다. 그러나 오늘날 4개월이 걸리는 작업조차 흔하지 않다. 있다 해도, 그 같은 작업들은 대부분 산업적 과정에 맡겨진다. 이 같은 사실은 피카소의 파피에 꼴레와 듀샹의 레디메이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갑작스런 '도약적 둔갑'에 의해 예술이 되는 것이다. 1960년대 이미 앤디 워홀에게 "5분 이상 걸리는 그림은 나쁜 그림"이었다. 1995년에 데미안 허스트는 약 90초, 그러니까 담배 몇 모금 빠는 시간에 예술작품을 창조했다.

대중문화에서도 매력적이고 각광받는 것들은 거의 이 도약이라는 코드를 공유하고 있다. 세일러문, 마스크, 로또복권……

이반 일리치의 말을 따르면, 속도는 하나의 추세, 더 전문가적이고 순발력에 의존하며 끊임없이 대체되는 추세로 귀결한다. 예술의 환경 역시 그렇게 되었다. "당신이 얼마나 빨리 이동하는지 말씀해주시면,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맞히겠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이 말은 "당신이 어떤 카메라와 장비를 쓰는 지 말씀하시면……"으로 대체될 수 있다.

슈비터스나 아르망이 쓰레기 작업을 할 때까지만 해도 미술은 그 '낙후성', '야만성'으로 인해 그나마 좌파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비올라 같은 작가들이 사용하는 기술은 산업현장에서 쓰이는 기술과 매우 '유착적'인 관계에 있다.

또 한 가지를 언급할 수 있다. 기술과 예술의 경계는 거의 무효화되었다. 그것은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전에는 예술이 가장 뛰어난 기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에서 기술은 거의 낙후된 기술을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이 낙후성은 이전의 반성적인 낙후성과는 다르다. 그것은 그야말로 기술적인 낙후성이다. 즉 낙후된 기술의 미학이 생산되기 이전에, 낙후된 기술에서 그칠 위험이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다. 그것은 기술과 그것을 차용한 예술의 기술 사이가 현격하게 좁혀짐으로써 야기된 문제인데, 이 경우 더 이상 그 둘을 별도의 기준으로 평가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2. 현대미술의 창작환경은 작품이 아니라 비평을 생산하는 장으로 되었다.

이 같은 변화는 미술의 어떤 흐름을 더욱 가속화 시켰는데, 그것은 미술의 생산이 작품에서 비평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창작환경에서 정보적 요인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소비환경에도 급진적인 지각변동이 초래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현대미술의 비평은 여러모로 모호하다. 많은 경우 미술이 수행하는 비평은 자기환원적이다. 많은 미술이 단지 "이러한 것도 미술이다" 식의 자기 정체적 차원에서 비평적이다. 사회적 동인이 결여된 비평이다. 그렇다면, 비평이 사회로 향할 경우는? 그 존재론과 성패는 비평적 첨예함에 달려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 점 역시 의심스럽다. 그 첨예함이란 저널의 수준과 동등해 보인다. 그럼에도, 비평은 여전히 미술의 천부인권인 것처럼 간주되고 있다.(미술계 내부에서만) 이미 19세기에 에르네스트 르낭이 말한 바 있듯, 비평이 창작보다 우월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더더욱 오늘날엔 비평이 창작을 이끌고 인도하고 있다. 이전엔 창작이 비평적 관점들을 창출했다. 분명한 것은 미술이 생산과 그것의 기술에 관한 차원에서, 지적 개입의 차원으로 이전되어 왔다는 점이다. 따라서 미술의 장 전반에 있어서, '물리적 생산'은 부수적인 의미가 되어 왔다. 물리적 생산은 특히 1960년대 이후 급진적인 비판에 직면해 왔다. 그러나 역설은 더욱 확대되었다. 비평을 생산하면서, 물질적인 buyer에게 호소하게 된 것이다.

3. 무엇보다 창작환경의 지형도를 급진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작가가 되는 새로운 패턴이다.

오늘날 예술가들은 어떻게 조달되는가? 어떻게 예술계로 유입되는가? 전통적으로 화가나 조각가가 되는 과정은 길고 가난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오랜 배움과 수학과 숙달의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현대의 작가들은 점점 더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듯 돌연히 준비되고 현현한다. 실비 플뢰리나 마리코 모리 같은 작가가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그들은 모두 패션 모델출신이다. 실비는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예술가가 되었다. 마리꼬 모리는 도쿄의 문화복장학원을 졸업한 뒤 잠시 패션모델로 활동했다.

4. 세계의(우리의) 창작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비친 변수로서 'Global standard'의 문제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차단되었던 지구촌의 각 지역에 고속도로를 깔아놓은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고속도로는 파시스트 양식이란 아들을 잉태할 확률이 높다. 독일의 아우토반을 계획한 것은 히틀러였다. '이 구조는 모든 독일인을 하나의 고리로 연결시켜줄 것이다."(H. 비톰스키) 그렇듯, 세계화는 세계적인 통제가 될 것이고, 세계를 하나의 고리로 엮을 것이다. 거기서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문제가 핵심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자국의 고도로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환경적 요인들을 정확하게 점검하고, 보호하며, 유지 육성하는 일을 소홀하게 취급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창작환경은 거대한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는 앞으로 가고 있고, 동시에 열려지고 있다. 우리는 정체적 혼돈과 그것에 대한 미적 정당성 속에서, 그리고 이질의 것들에 대한 미흡한 소화력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세계문화, 문화적 세계는 불행하게도 위계화되어 가고 있고, 하나의 거대한 이윤망으로 재편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윤은 더 한 속도를 부추길 것이다. 이미 1999년에 국제 외환시장에서는 1분 동안에 4천억 원 이상이 거래되고, 컴퓨터는 초당 370기가를 수행한다. 생산보다는 마케팅과 광고, 포장 이미지가 중요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내적 소속감, 정체성 따위는 하등 중요한 것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조절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우리의 창작환경'이라고 말할 수 있는 영역에 관한 논의를 지속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겐 더 이상 페르세포네의 상자를 여는 프시케의 호기심 같은 것은 남아있지 않다. 우리는 지금 어떤 상자가 열리고 있으며, 그 안에서 무엇이 튀어나올 것인가에 대해 더 이상 이전처럼 무지하지 않다. 우리는 계속해서 변화의 환상들에 대한 우리의 분별력을 시험받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기제와 방식들, 그리고 그것에 정당성과 도덕성을 실어줄 수 있는 강력한 동인을 찾아 나서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특별한 상황에서 창작과 학습이, 창조와 모방이 기묘하게 맞물려 있는 상황에서 그 해법을 찾아내는 일은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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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1지면 2

원 게재: 특별기고 / 회화지 11호(2003) 40–41쪽 · 원본 PDF 4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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