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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미술

전주향교

이동희(예원예술대 교수)

[사진] (전주향교 전경, 캡션 없음)

지금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향교(鄕校)가 우리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중기 인종 5년(1127) 무렵부터이다. 그러나 향교가 전국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건국후의 일이다. 성리학을 국가 주도이념으로 표방한 조선은 백성들을 유교정신으로 새롭게 무장시키기 위하여, 건국직후 '1읍 1향교'의 대원칙을 세우고, 모든 군현에 향교를 설립하였다. 숭유억불의 기치아래 고려시대 도시 한복판에 자리했던 불교 사찰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유학을 가르치는 향교가 들어섰던 것이다. 그 결과 현재 남한만 해도 230개의 향교가 있다.

건국직후 한꺼번에 대규모 토목공사가 이루어지고, 지금처럼 물자가 풍부했던 것도 아니었으며, 또 고려색깔을 완전히 지워버려야 했기 때문에, 사찰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그 부재로 향교를 건립하는 일들이 야기되었다. 오늘날 향교에 사찰에서 쓰였을 법한 목재나 석재들이 보이는 것은 그런 이유들 때문이다.

향교 건축은 불교 절집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사찰이 화려하다면 향교는 그런 화려함이 없다. 예컨대 부처님이 모셔진 법당은 팔작지붕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지만, 향교는 맞배지붕으로 수수함 그 자체다. 불교건축이 화려하다면 유교건축은 단순하다. 유교건축은 절제된 단순미로 화려함도 없고 지나친 꾸밈도 없다. 이는 곧 불교가 종교로서 신비적 요소를 소지하고 있는 반면, 유교는 신비적 요소가 배제되어 있는 데에서 비롯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곧 불교와 유교, 고려와 조선의 차이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불교를 대중종교요 유교를 엘리트종교라고 한다. 정신적 수준이 높지 않고서는 유교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아주 쉽게 말해 부처님에게 빌면 아들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지만, 공자님에게 빈다고 해서 그런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런 차이 때문에 조선왕조 500년간 불교가 탄압을 받았으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보통사람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종교적 힘은 여전히 불교에 있었다.

향교의 구조를 놓고 볼 때, 오늘날의 교육기관과 차이는 학교안에 공자의 사당인 문묘(文廟)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즉 대성전(大成殿)을 중심으로 양쪽의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로 구성된 배향공간 문묘와, 명륜당(明倫堂)을 중심으로 그 양편이 동재(東齋)와 서재(書齋)로 구성된 강학공간 학교로 구성되어 있다. 대성전에는 한 중앙에 공자의 위패가 모셔지고 그 앞 좌우에 안자(顔子), 자사(子思), 증자(曾子), 맹자(孟子) 등 4성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대성전 벽과 동무 서무에는 중국성현과 우리나라 사람 동방 18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명륜당은 강의실이며 동재와 서재는 일종의 기숙사다.

강학(講學) 공간과 배향(配享) 공간의 배치방식은 일반적으로 평지에서는 배향공간이 앞으로 오고 강학공간이 뒤에 위치하며(前廟後學), 경사진 언덕에서는 이와 반대로 학교가 앞에 오고 문묘가 뒤에 배치된다(前學後廟). 남한의 230여 향교 중 평지에 자리한 향교는 20여곳 정도이고 나머지는 모두 경사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경사진 곳에 위치한 향교가 전체의 80%정도 된다. 전라도의 경우, 전주 정읍 나주 함평 영광 돌산 낙안 금구향교 등이 평지형이다.

이런 향교의 건물 배치법, 즉 평지에서는 문묘가 앞에 오고, 경사진 곳에서는 문묘가 뒤에 오는 것은 배향공간이 강학공간보다 더 격이 높았음을 말해준다. 조선은 공부를 하여 출세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열심히 덕을 쌓아 공자와 같은 성인이 되는 것이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임을 분명히 하였던 것이다. 강의실 명륜당(明倫堂)도 그 뜻을 풀어보면 곧 '인륜을 밝히는 건물' 이라는 말이다.

사실 조선후기에 오면 그나마 남아 있던 강학기능이 사라지고 만다. 이제 더 이상 향교에서는 공부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것은 서원 등 사학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향교에 원래는 군현의 크기에 따라 교수(종 6품)와 훈도(종9품)을 파견하였으나, 점차 유명무실해져 나중에는 아예 교관들이 파견되지 않았다. 향교에서는 오직 공자등에게 제사지내는 일만을 행하였다. 그래서 조선말기에 상실된 강학기능을 살리기 위해 양사재(養士齋). 흥학재(興學齋), 육영재(育英齋) 등을 향교 부속으로 건립하기도 하였으나 효과가 크지는 않았다. 한편 향교 학생으로 양반만이 아니라 양인도 입학할 수 있었는데, 양반과 양인을 구분하여 각각 동재와 서재로 나누어 기숙시켰으며, 액내와 액외로 신분을 구분짓기도 하였다. 동재는 양반기숙사며 서재는 양인기숙사다. 정원은 읍격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전주부와 같이 부, 대도호부, 목 등 가장 큰 읍은 90명, 도호부 70명, 군은 50명, 가장 작은 읍인 현은 30명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원 외에도 많은 학생들이 있었다. 이는 일단 신분상승을 꾀하려는 측면도 있겠지만, 향교에 적을 두면 군역을 면제받기 때문인데, 당시의 많은 양인들이 향교의 잡역에 시달리더라도 군역을 면제받는 길을 택하였다. 이런 사실은 당시 군역의 부담이 얼마나 컸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전주향교(全州鄕校, 사적 379호)는 오목대 밑자락 기린로변에 있다. 설립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고려 공민왕 3년(1354)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의 위치는 풍남동(경기전 북편)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거정의 『부학기』에 의하면, 원래 향교가 치소 내에 있었는데, 경기전이 들어선 뒤 향교와 진전이 너무 가까워서, 유생들의 글읽는 소리 때문에 태조 영령이 편히 쉴 수 없다하여 향교를 성의 서쪽 6,7리 되는 곳으로 옮겼다 한다. 이 때 향교가 옮겨 간 곳이 지금의 화산 신흥학교 부근이다. 부지가 너무 넓고, 부중에서 너무 떨어져 있어서 도둑이나 호랑이로부터 화를 입을까 염려하여 담장을 높이 둘렀다고 하니, 당시의 전주 모습이 짐작이 간다.

1603년(선조 36) 좌묘우사(左廟右社), 즉 객사에서 남면하여 좌측에 문묘(공자의 사당), 우측에 사직단(社稷壇)을 배치하는 옛 법도에 어긋난다하여 부성밖 동편인 지금의 자리로 다시 이전하였다. 아마도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옮겨 중건한 것으로 짐작된다.

사직단이란 성황사(城隍祠), 여단(厲壇)과 함께 3사라하여 고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곳으로, '사직'이란 땅과 곡식을 의미한다. 즉 '사(社)'는 국토를 수호하는 신이며, '직(稷)'은 곡식의 풍요를 관장하는 신이다.『동국여지승람』에 부의 서쪽 3리에 사직단이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기전여고 건물 동편의 작은 산봉우리를 말한다. 여단은 부성의 북쪽 5리 반대산(盤坮山)에 있었으며, 반대산은 지금 민가가 들어서 있지만 표고가 75.3m로서 기린봉에서 북서로 뻗어내린 작은 구릉이다. 성황사는 부성의 동쪽 5리 승암사 뒤쪽 견훤의 왕궁터가 있던 동고산성 안에 자리하였다.

전주향교의 구조는 전묘후학으로 배향공간이 앞에 있는데, 대성전 중앙에 공자와 4성,그 좌우로 공자문인 10철과 송조(宋朝) 6현을 배향하였고, 동무와 서무에 중국 7현과 동방 18현이 배향되어 있다. 동방 18현의 신위 배치도를 보면, 동무에 설총, 안향, 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김집, 송준길, 서무에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이언적, 김인후, 성혼, 조헌, 송시열, 박세채 등이 배향되어 있다. 1949년 전국유림대회 이후, 사대사상을 마감한다는 의미로 우리나라 동방 18현의 신위를 대성전으로 옮기고, 중국 성현도 공자와 4성만 모시게 되었는데, 전주는 언제부터인가 이를 다시 바꾸어 위와같이 조선시대방식으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대성전 뒤가 강학공간으로, 명륜당이 중앙에 있고 그 좌우에 동무와 서무가 있다.

대성전과 명륜당 앞뜰에 400여년이 되었다는 은행나무가 각각 2그루씩 있다. 은행나무는 향교의 상징적 나무로, 은행나무가 벌레를 안타듯이, 유생들도 건전하게 자라 바른 사람이 되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한다. 또 공자와 그 제자 4성의 부친 위패를 모신 계성사(啓聖祠)의 존재도 전주성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현재의 전주향교는 1987년 대대적인 보수를 거친 것으로, 이 때 대성전과 동서무를 완전해체 복원하였고, 명륜당, 동서재, 계성사 등을 중보수하고, 지경문을 철거한 자리에 없어졌던 만화루(萬化樓)를 다시 건립하였다. 장판각도 이때 새로 건립하였다. 1992년 전주향교는 사적 제 379호로 지정되었다. 조선말 신교육이 실시되었을 때, 전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전주초등학교가 1897년 이 곳 전주향교의 양사재를 빌려 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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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게재: 역사와 미술 / 회화지 11호(2003) 42–43쪽 · 원본 PDF 4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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