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샤갈전 — "샤갈 이해하기"
가을도 깊어 가는 9월의 마지막 주말, 모처럼 만에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이번 서울상경은 한창 열리고 있는 거장들의 전시회관람을 위한 시간이었다. 첫번째론 덕수궁에 도착하여 램브란트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했고(오늘 내가 말하고자하는 중심 된 내용은 여기가 아니니 그냥 이대로 지나가련다) 다음 목적지인 인사동으로 향했다. 그 많은 세월동안 서울을 오가면서도 인사동은 이번이 초행길이다. 그동안 얼마나 미술분야에 무관심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단면인 것 같아 조금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거리가 온통 볼거리요 구석구석 전시회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미술인들이 활동하고 있다니 부러움과 나도 머지않아 이 반열에 들어야 겠다는 의지가 솟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리되려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할런지...)
계속해서 여러 곳을 기웃거리면서 다리가 저려올 즈음에야 샤갈전이 열리는 화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름이야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거장이다. 게다가 학창시절 간간이 미술교과서에서 접했던 세월이 있었으니 어쨌든 초면의 어색함은 없으리라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에 준비된 그의 연보를 대하면서 막연하게 여느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몇 세기전에 살다가 이름을 남기고 사라져간 고전적인 인물이려니 생각했던 무식함이 순식간에 들통이 났다. 그의 나이 98세로 죽은 해가 1985년 이었다니 나의 지금까지의 반생도 그와 동시대에 살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괜스레 반가움이 다가선다. 어느 누구도 시대와 동떨어져서 살 수 없듯이 샤갈 역시 많은 사조의 영향을 받은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샤갈은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만들어냈다. 야수파의 영향으로 색채를 다시 보자는 원칙에는 동조했으되 직접 색채 자체로 구성하여 표현하기는 거부했다. 또 표현주의적 화풍에서 영감을 받기도 하고 큐비즘의 특징인 분할적인 대상의 표현을 시도하곤 했지만 샤갈은 결코 자기만의 색깔을 저버리지 않았다. 또한 샤갈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폭넓은 재료와 기법의 사용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작품활동을 했는데 이는 도자기나 판화, 무대장치,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요즘에 자주 듣고 참 맞는 말이라고 생각되는 게 있는데 '아는만큼 보인다' 는 말이 그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인다면 관심 있는 곳에 깨달음도 있다는거다. 처음 샤갈의 그림을 대했을 땐 뭐 이렇게 초등학생도 그릴만한 그림이 거장의 그림인가고 솔직히 반문하기도 했다. 그런데 미술의 역사와 흐름들을 배우면서 다시 바라본 느낌은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초등학생 같은 그림이기에 어딘가 낯설지 않은 포근함이 배어있다. 그의 그림은 한없이 자유롭다. 어떤 틀에도 구애되지 않고 형식도 없고 애써 내용을 전달하려 고민하지도 않은 듯하다. 그의 그림에는 연인들, 악사, 천사, 곡예사, 동물, 꽃, 고향마을 등이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고 때로는 성서적 이야기로 그가 유태인임을 상기시킨다. 샤갈은 그런 것들을 통하여서 그의 사랑과 가족과 고향, 그리고 또 다른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하더라도 거기에 굳이 속박 당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감상은 우리의 몫이니까 말이다.
그의 작품 중 많은 그림들이 파란색 바탕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에선 암울하거나 칙칙함이 연상되진 않는다. 가만히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덩달아서 둥실둥실 떠오르는 느낌을 받는다. 화려하지만 야하지 않고 동심과 향수와 순수와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그만의 작품세계는 어쩌면 이론과 논제로 홍수를 이루고 있는 이 세기에 얽매임 없이 누구나가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고 보면 어떨는지... 샤갈전을 보면서 잘 그린 그림만이 사람에게 감흥을 주는 건 아니라는 걸 새삼 생각하게 만든다.
샤갈을 만난다는 건 또 하나의 색다른 경험이다. 우리가 정석으로 알고 있고 감탄하는 그림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전에서 만나게 되는 그런 그림들이다. 손을 뻗으면 잡힐 듯한 유리잔이며 옷의 주름과 질감들이 살아있는 양 만져보고 싶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니 말이다. 그에 비하면 샤갈전은 마치 초등학생의 학예회장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그러나 여기에는 때묻지 않은 순박함과 따스함이 묻어난다. 그림에 문외한이어도 좋고 필요없이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아도 좋다. 그의 그림은 시공을 초월하고 상식과 대상을 초월한다. 그냥 보이는 대로 느낌 가는 대로 보아주면 그뿐이다. 어느 누구도 넥타이 매길 강요하지 않는다.
전시회장을 나오면서 아쉬웠던 건 램브란트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전이 열리고 있는 덕수궁의 전시회장에 비해 샤갈전이 열리는 화랑의 환경은 너무 성의없이 준비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전자는 철저하게 조명과 온도를 맞추고 눈높이에 작품들을 배열하고 작품들이 돋보이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삼엄한(?)경비하에 작품을 보호하고 있었는데(물론 몇 세기전의 작품이니 손상을 우려한 배려라고 감안한다 하더라도) 샤갈전은 그냥 바닥에 죽 나열되어 있어서 작품 설명을 보기 위해 계속해서 눈을 아래로 향한 채 이동해야 했다. 그리고 소란스럽던 분위기까지도(그날에만 유독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건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게했다. 게다가 그림 같지도 않은 그림이라고 비아냥거리던 관객들의 소리...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해서 혹은 내 취향이 아니라고해서 비난하는 일은 진정 성숙한 관람태도가 아닌 줄 안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바라봐준다면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기도하고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느낌을 만나기도 하는데 말이다. 우리네 인생살이도 이와 같다. 상대방의 좋은 점을 찾아내는 건 서로에게 기분 좋은 경험이다. 샤갈전은 바로 이런 느낌, 가까이 있었으나 미처 보려하지 않았던 좋은 벗과의 새로운 만남을 갖게된 시간이었다.
[도판] Les amoureux dans le grand bouquet blanc (The lovers in the grand white bouquet) 커다란 흰 꽃다발 속의 연인들 / 65×75cm / Oil on canvas, c. 1980
(도판 옆 손글씨 메모)
누구든 꽃을 접하게 되면 괜스레 벅차 오르고 행복해지지 않을까? 환상적인 푸른 바탕에 온 마을을 뒤덮을 정도의 커다란 꽃다발로 두 연인의 사랑과 환희를 나타내고 있다. 그 때의 기분이란 이처럼 둥실둥실 떠다니는 느낌이겠지...
(도판 옆 손글씨 메모)
샤갈의 큐비즘적 요소를 보여주는 그림. 그림이 있고 음악이 있고 그리고 사랑. 달빛에 의지하여 떠오른 고향. 이 모든 건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든 찾아낼 수 있는 마음의 보석이다.
[도판] Le bouquet dans le ciel de Paris (The bouquet in the sky of Paris) 파리 하늘의 꽃다발 / 73×60cm / Oil on canvas, c. 1978
원 게재: 미술관을 찾아서 / 회화지 11호(2003) 49–50쪽 · 원본 PDF 49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