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수 개인展 동해물이 마르고 백두산이 닳도록

일정: 2024. 09. 05 - 09. 15 장소: 전북도립미술관 서울분관
작가가 말하는 이번 전시의 타이틀 '동해물이 마르고 백두산이 닳도록'이 지닌 두 가지 함의 가운데 하나는 역사적이고 진화론적인, 유구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흐르고 있는 장대한 시간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직선적이고 측정 가능한 시간, 시각화되고 정량화된 시간에 대비되는 체험된 시간이다. 후자의 시간은 베르그손(Henri Bergson)이 말하는 질적 변화이자 매 순간 속에서 직접 파악하는 내적인 시간, 즉 지속(durée)에 가깝다.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 사상(事象)의 단면은 절대로 측정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신체를 통해 '마르고 닳도록' 만지고 느끼고 체험해야만 하는 것이다.
#2
박성수는 종종 이런 질문을 던지곤 했다. "인간이라는 종(種), 현생인류는 어쩌면 현재와 다른 생김새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질문은 진화생물학 이론, 그 가운데서도 다윈(Charles Darwin)이 주장한, '중간 단계가 없는 유전자의 급진적 변이'를 떠올리게 한다. 이른바 진화의 충분조건으로서의 돌연변이다. 결국 위와 같은 일종의 가설을 통해 박성수는 인간의 생물학적, 사회적 정체성이 다분히 임의적이며 우연의 산물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인간의 모습이 다분히 우연의 결과라면 인간의 또 다른 모습을 그려낼 수 있을까. 작가의 이러한 사유가 실험적으로 드러난 작업이 바로 이전에 시도했던 '전생연구' 연작일 것이다. 결국 박성수가 연구했던 '전생'은 前生이자 轉生(다시 태어남, 혹은 바뀌어 태어남), 즉 인간의 또 다른 가능태였던 셈이다.
#3
이번 전시는 물론 박성수의 작업을 통틀어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촉각성이다. 지난 개인전 《촉각공간》에서 드러낸 바 있는 촉각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기 드보르(Guy Debord)가 『스펙타클의 사회』를 통해 주장한 바와 훌륭하게 공명한다. 일종의 정치적 시론이자 선언문의 형태로 써내려 간 이 책에서 기 드보르는 현대 사회의 지배적 감각인 시각을 "추상적이고 가장 신비화되기 쉬운 감각"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분리 이전의 삶, 삶의 총체성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매개 없이" 직접 경험하는(vécu) 삶을 제시한다. 기만적인 스펙타클의 대척점에는 결국 촉각이 있다. 그리고 시각만이 편재하는 사변적인 세계에서 모든 사람의 구체적인 삶은 퇴행한다. 박성수가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선보인 닥종이 입체 작업들은 먹으로 그려냈던 드로잉(전생연구)에 촉각성을 덧입힌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닥종이 입체작업들은 뼈대나 프레임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피부이고 살(flesh)이다. 이처럼 박성수는 몸이라는 스펙타클을 해체하고 촉각이라는 가능성을 통해 재구축한다. 그것은 생생한 삶으로의 회귀다. 이 가운데서도 그 로댕(Auguste Rodin)의 <칼레의 시민들>에서 그 제목과 포즈를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K의 시민>은 상황주의자들이 말하는 전용(轉用, détournement)의 좋은 예다. 군상(群像)이 아닌 단독상으로, 칼레(Calais)에서 K(Korea)로의 전환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개인 그리고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를 성공적으로 환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4
이번엔 박성수의 수묵작업들을 살펴보자. 박성수는 문인화에서 쓰일 법한 필법을 사용해 붓을 운용하지만(運筆) 거기서 나오는 선의 느낌은 일반적인 수묵화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 박성수의 수묵은 선적(linear)이면서도 회화적(painterly) 이다. 이에 대해 박성수는 "신체의 움직임 그리고 수행성에 집중한 결과"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수행성이란 agency, 즉 행위 그 자체이자 행위능력, 행위주체성이 모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여기에 "그렇게 그려낸 선의 운동은 시간(성)을 머금고 있다"고 덧붙인다. 그의 수묵작업은 그래서 지표(index)이면서 상징(symbol)이다.
결국 박성수가 그 어느 때보다 몸-촉각-움직임에 집중해 작업한 이번 결과물들은 그것이 평면이든 입체든 모두 무기력한 관조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한다. 관객은 그 선과 형태, 그리고 그 움직임에 조응해 시선을 움직이고, 몸을 움직여야 하며 직접 만지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시각의 대체재 혹은 보완재의 탐구'는 이제 그의 작업을 아우르는 라이트모티프(leitmotif)다. ( 조재휘)
원 게재: 2024 전시 리뷰 / 회화지 31호(2024) 36쪽 · 원본 PDF 38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