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를 다녀와서...
잃어버린 땅 대마도를 찾아 갈 계기가 있어서 주말을 이용하여 1박2일간 돌아보고 왔다. 부산국제여객터미널에서 쾌속정 '코비' 라는 배를 타고 1시간10분정도 걸려 히타카쓰(比田勝)항에 도착하였다. 부산에서 49.5km이다. 날씨는 맑았고 바람은 적당히 불어와 더위와 함께 섞이었다. 함께한 일행이 있는데 향토사를 연구하는 분들이었다.

미우다 해수욕장
미우다 해수욕장 배에서 내리어 준비된 버스로 이동하게 되었다. 버스는 도노자키 해변이 보이는 언덕에 올라와 있었다. 이곳이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우리에게 강화 교섭을 하여 을사늑약을 체결한 통한의 언덕이다.
러일전쟁과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는 생각에 은혜의 교라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버스로 이동하여 미우다(三宇田)라는 일본 100선 해수욕장으로 왔다. 그다지 넓지 않다. 부안 의 변산 해수욕장과 비슷 크기로 보인다. 다만 물은 맑고 모래가 고와 보인다. 가까이 아주 작은 섬이 떠있다.
한국전망대
한국전망대가 설치된 쓰시마 최북단 와니우라로 왔다. 와니우라는 악어포구라 하는 데 암초가 많고 그 모습이 악어이빨을 닮아서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와니는 일본에 유학을 전해준 왕인박사의 일본어 발음이기도 하다. 전망대는 파고다 공원의 정자를 모델로 만들었다. 기와며 부속 재료를 한국에서 공수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바로 아래에는 일본 자위대가 있는 진영이 울창한 나무사이로 보인다. 부산에서 49.5km정도 이며 일본 후쿠오카까지는 137km로 한국에서 훨씬 가깝다. 광안대교 불빛도 보이고 우리나라 이동전화가 간혹 잡히기도 한다고 한다. 역사적으로도 가까워서 조선을 더 가까이 하고자 했던 섬이다. 대마도 사람들이 한국 령을 해 달라고 요청했을 정도이다. 역사를 잘 지키면 우리 것인데 라는 생각으로 머리가 아프다.
전망대 옆으로 역관사 순난비가 있다. 전망대 옆으로 조선 숙종 때 조선에서 대마도로 건너다가 폭풍을 맞아 죽음을 당한 108명의 역관사를 기리기 위한 비가 서있다. 그를 위로하는 데이지가원통사 고려종과 이예 공적비가 있음 하얗게 피어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어디서 많이 보아온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한국 정서가 있는 조선독이고 그 옆에는 일본의 항아리였다. 둘이 서로 돈독 하라는 건지 싸우다 보면 다 깨질 수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원통사 고려종과 이예 공적비가 있음
일본식으로 간단하게 점심을 한 후에 길을 나섰다. 먼저 간곳은 원통사라는 절이다. 1408년에 세워진 사찰로 무로마치시대 대마도주 종정무의 집무실로 알려지고 있는 엔슈지(圓通寺)에는 2005년에 건립한 조선통신사이예공적비(朝鮮通信使李藝功績碑)가 서있다. 사찰 정문 오른쪽에 고려종(高麗鐘)이 걸려 있어서 대마도는 우리나라와 많은 교류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충숙공 이예 선생의 공적비가 있는 곳이다.
원통사 정문에 공적비가 세워져 있는데 조선 초 한·일 관계의 근간이 됐던 계해약조(癸亥約條, 1443년) 체결에 공헌하고, 1401년 정식 외교사절이 된 후 40여 차례에 걸쳐 일본을 오가며 667명의 조선인 귀환을 성사시키는 등 근대 이전 우리 외교사에서 대일외교를 주도한 전문 외교관이었다. 원통사는 조동종계통 절로 군산의 동국사와 같은 종이다. 동국사는 지금 조계종 금산사의 말사이나 일본침략기에 조동종이었다.
이즈하라 시내, 수선사 가는 길
만관교(만제키바시)에 다다랐다. 비교적 큰 다리이다. 일본 나가사키현 쓰시마시의 만제키세토라는 운하를 가로 지르는 다리를 말한다. 운하는 아소만과 미우라만을 연결한다.
1900년도 일본해군이 함대의 통로로써 인공적으로 판 해협에 다리를 세웠다. 대선월(오후나고시)은 조선에서 오보라구시포라고 불렀다고 한다. 1672년 대마도주 종의진이 대운하를 건설하고 동서를 연결하는 수로폭이 50m, 길이 는 240m라고 한다. 깊이가 낮아서 군함이 다닐 수 없어서 다시 판 곳이 만제키바시(만관교)이다. 이곳은 러시아와 전쟁하여 발틱 함대를 무찔러 승리하여서 유명하여졌다. 러일전쟁 당시 1905년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미국 포츠머스에서 중재하였고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래서 을사늑약과 한일합방이 있게 되었다. 우리에게 미국의 책임도 크다고 본다.
최익현 순국비 옆에서
면암 최익현의 추모비가 안치된 수선사라는 작은 절에 왔다. 면암은 "내목은 자를 수 있어도 내 머리는 자를 수 없다"고 도끼를 들고 상소를 올리며 단발령에 반대했었으며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항거하다가 체포되어 대마도에 1906년 유배되었다. 면암은 "남의 땅에서 난 곡물을 먹을 수 없다"라고 하시고 가져간 식량이 떨어지자 굶어서 요절하였다. 그때 면암의 시신이 거둔 곳이 백제의 '법묘' 가 세웠다는 수선사이다. 이 사찰은 백제 귀족출신 법묘 비구니스님이 창건하고 현판 글씨는 조선 말 김학진 판서의 친필로 전해진다. 본당에는 통일 신라 금동불상이 안치 되었다고 하는데 보여주지 않는다.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에 도착하였다. 이즈하라 시청 길 건너에 금석성이 있고 그 안에 봉축비가 서있다. 금석성은 16세기 소(宗)가문이 거주한 성이다. 덕혜옹주가 결혼한 남편이 대마도주인 소가문의 후예 소 다케유키가 있었기에 이곳에 비가 서있는 것이다. 비석에는 '이왕가 종백작가 어결혼봉축기념비'(李王家 宗伯爵家 御結婚奉祝記念碑)가 적혀 있다. 1953년 두 사람의 이혼으로 없어졌다가 2001년 11월에 복원된 것이다.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를 본 사람이면 덕혜옹주가 비운의 삶을 살다간 조선의 마지막 옹주라며 가슴 아파 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덕혜옹주의 삶보다 더욱 처절하게 인생을 마감하였을 것이다. 그때 온 나라가 기구한 삶을 살았으니 더 말할 것이 없다. 금석성은 이국적이어서 여기에 온 사람은 기념사진을 찍는다. 이 성은 1669년 소시자네가 건립한 성으로 옛 대마도 건축기술을 엿볼 수 있다. 입구의 아쿠라문(櫓門)은 대마도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답다.
금석성 아쿠라문
금석성을 돌아 나오면 대마도역사민속자료관에 이른다. 고대의 토기로부터 11세기 고려판 대반야경(초조대장경), 12세기 고려청자, 소오씨가문의 '宗家文庫史料' 는 가마쿠라 시대로부터 에도 시대까지 대마도를 통치해온 소(宗)가문의 500년의 기록이라고 한다. 조선통신사행렬도(朝鮮通信使 行列圖), 초량왜관도(草梁倭館圖) 등 유물과 쓰시마야마네꼬(산고양이), 쓰시마사슴, 물수리 등 천연기념물이 박제된 채 보관되어 있고, 대마도의 포경어업(고래잡이)의 기록이 고스란히 그림으로 제작되어 전시되고 있어 옛 대마도인들의 생활상을 엿 볼 수 있다.
조선국통신사비
박물관 밖에는 조선국통신사비가 서있다. 이 비석은 나무 그늘 밑에 서있으면서 한국에서 찾아온 여행객을 맞이하고 유쾌한 사이가 되길 희망하고 있는 것 같다.
마을 돌담을 걸어서 돌아가면 신사가 나온다. 마리아 위령비가 있는 하치만구(팔번궁)신사에 왔다. 입구에 신사로 들어가는 도리이가 있다. 그 바로 앞에는 '고려 개' 라는 고마이누가 양쪽으로 있다. 좀 더 발길을 옮기면 한국식 기와집이 나온다. 이것이 하치만구신사이다. 이곳에서는 참배하지 말라고 한다. 일본 역사왜곡의 대표적인 임나일본부설에서 나오는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 신공황후를 말하는 것인데 임신한 채로 출병하여 신라를 정벌하고 삼한에 임나일본부를 건설하였다고 하는 가상의 인물이다.
팔번궁 신사
팔번궁 신사 본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보이는 청색 마상(馬像)이 있다. 이 말을 쓰다듬으며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래 쓰다듬으면서 우리역사나 왜곡하지 말라고 빌어 봄직하다.
입구에서 왼쪽에는 이마미야 신사가 있다. 일명 마리아신사라고 한다. 19대 대마도주의 부인 고니카 마리아와 그 아들 소 요시나리를 모신 곳이다.
마리아의 유키나가 가족은 모두 카톨릭 신자. 정략적 결혼을 한 마리아의 남편(쇼 요시토시)은 마리아의 아버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하여 평양까지 침공하였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권력싸움에 패하여 참수형을 당함. 권력싸움에 희생양으로 결국 마리아는 남편과 이혼하고 독실한 카톨릭 신앙생활을팔번궁 신사 하다 세상을 떠났고 그 후에 이 신사에 모셔 천신신사에 합사되었다고 한다. 이를 위로하여 세운 신사이다.
시간이 촉박하여 풍랑으로 표류한 조선인 어부가 머물던 집단수용소 '표민옥적(瓢民屋跡)' 과 춘향전(春香傳)을 일본어로 최초로 번역한 '나카라이 도스이(半井桃水) 기념관 등은 둘러보지 못하였다.
대선월과 다리
대선월과 소선월은 운하이다. 배를 옮겨 넘기어 주어 반대쪽 바다로 나아가게 하는데 작은 배를 넘겨주는 곳은 소선월이고 큰 배를 넘겨주는 곳은 대선월이라고 한다. 대선월은 운하가 되었고, 그 위에 대선월교(오후나코시다리)가 놓여졌다.
소선월은 동서폭 147m로 대마도 최저최단 협곡이다. 이곳은 이종무 장군의 전승지이다. 1419년 6월 29일 대마도 제8대 도주인 소 사다모리가 이종무 장군에게 항복한 곳이다.
대선월 초기 역사 있는 곳에서 민박을 하였는데 조용하고 깨끗하였다. 사람은 잘 보이지 않고 어선만이 밤에 바닷가에 즐비하였다. 밤에는 그 흔한 텔레비전이 없고 유흥업소도 없었다. 다만 밤이 되자 창밖에 보름달이 떠오르고 검은 산 그림자만 강 같은 바닷물에 떠 있었다. 물은 점점 고요해져서 수면이 비단처럼 보였다.
낮엔 가는 곳마다 까마귀가 따라다니는 것처럼 언제나 공중에 날고 소리를 질러 댔다. 까마귀는 덕혜옹주의 그 아픈 절규가 원혼이 되어 떠다닌 듯하였다. 조선왕조 마지막 핏줄인 고종황제의 막내딸이 일본에 압송 되어 일본인과 강제 결혼 후에 나중에 파혼하여 정신적 신체적으로 쇠약해져서 해방 37년이 지난 후에 조국에 병약한 몸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에보시타게 전망대에서 본 아소만
다음날 일행은 출발하여 에보시타게 전망대로 갔다. 에보시타게는 일종의 일본 모자인데 그 모습을 닮은 것이다. 대마도에서 유일하게 한 바퀴 돌아가며 모두 볼 수 있는 곳이다. 여기에서 보이는 몇몇의 산과 아소만의 바다위에 떠 있는 듯 작은 섬들은 육지의 침강에 의해 생성된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을 이룬다. 그 굴곡이 대마도의 백미이다. 수많은 무인도와 휘어진 해안과 잔잔한 수면에 비친 섬들의 모습은 마치 우리나라의 한려수도를 연상케 한다. 날씨가 좋을 때에는 전망대에서 대한해협을 너머로 우리나라 산들도 볼 수 있다고 한다. 오늘 먼 곳은 그저 뿌옇게 보인다. 이 산 바로 아래에는 와타즈미 신사가 자리 잡고 있다.
와타즈미 신사는 아소만 입구에 있다. 신사 건물 옆으로 소나무가 뿌리를 용처럼 길게 드러내고 있었다. 어떤 이가 그 위에 설려고 하니 관리인이 그 뿌리 위를 못 올라가게 제지한다. 신성하게 모신다고 한다. 바다의 대모신(大母神)에 해당되는 신사로서, 본전 앞 갯벌에는 이쿠와라(磐座 ; 신이 거처하는 장소 또는 바위)가 있고, 신사 뒤편에는 도요타마의 문묘가 자리하고 있다. 이와쿠라가 바다와 육지의 경계인 갯벌에 위치하고 있는 이유는 도요타마가 출산 후 아들을 갯벌에 놓아두고 해저 용궁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라 한다. 다섯 개 도리이(鳥井) 중 바다 위에 두개가 있는데, 만조에 따라 그 모습이 바뀌어 보인다고 한다. 저 도리이를 일직선으로 해서 연결하면 우리나라 김수로 왕릉을 향해 있기에 우리나라 신라의 정신을 갖고자 하였다는 설도 있다.
대마도(對馬島, 쓰시마)는 제주도 면적의 절반이 안되고 89%가 산악이다. 깨끗한 환경으로 한국에서 가까운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다. 주요산업은 삼나무와 편백나무, 밤나무 등 임업과 오징어 등 어업이다. 농사를 지을 수 없다. 길은 좁고 굴곡이 많아 차의 속도는 40~50km 이내로 다닌다. 인구는 약 3만3000명정도로 거의 이즈하라 부근에 모여 산다. 한국관광객이 주로 다녀가고 일본 본토사람의 여행객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일본으로 보면 여기는 오지 중 오지에 속한다.
대마도의 어원(語原)은 원래 예부터 한국에 소속된 땅으로 조선시대 중기까지 경상도에 포함되어 있었고 대마도의 영주는 조선의 벼슬을 받았다. 그 증거가 있는데도 일본은 숨기려고만 한다.
대마도라 부르는 설에 대해 여러 가지 유래설이 있지만 주된 세 가지 유래로, 중국의 역사서인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 진도(津島: 일어로 쯔시마)라는 명칭을 사용한 유래와 삼한인(옛 한민족)들이 두 개의 섬이라 하여 '두시마' 라고 불렀다는 설, 이 섬이 마치 두 마리 말이 마주보고 있는 형상이라 해서 대마(對馬) 즉 쓰시마라고 불렀다는 것이 어원이라는 세 가지 설이 있다.
대마도는 한일관계에서 인적, 물적, 문화적 교류의 창구로서 정거장 역할을 한 곳 이였다. 대마도 땅은 1419년 이종무 장군이 정벌하여 대마도주에게 항복을 받은 곳, 왜구의 조선침략 근거지, 조선의 민간외교관 안용복이 감금당했던 곳, 순창출신이며 을사조약을 반대한 유학자이며 의병장인 면암 최익현 선생이 끌려가서 단식분사한 곳, 박제상 비석과 조선역관사 비석, 학봉 김성일 시비가 있는 곳, 임진왜란 전까지 친조선 이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집권 후 완전히 친막부로 기울어진 곳이다. 매년 8월 첫째 토요일과 일요일 아리랑축제와 조선통신사 행렬이 이즈하라 시내에서 열렸었다. 2013년 대마도에서 불상 도난사건이 일어난 후에 2년간 중단하다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이름이 아리랑 마쓰리가 아닌 미나토 마쓰리로 바뀌어 진행 된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성명에서 대마도(쓰시마)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으며 일본의 항의를 받고 이승만은 1948년 9월 대마도 속령(屬領)을 발표했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초안 작성 과정에서 4월 27일 미국 국무부에 보낸 문서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요구를 했었다. 1950년 6.25 전쟁 중이라서 더 이상 힘을 쓸 없게 되어가고 미국은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였다. 2013년 의정부시의회 등 우리 측에서 대마도 반환을 촉구하는 한편 대한민국정부차원의 반환 촉구를 요청하는 움직임이 있자 일본의 한 언론에서 쓰시마 섬을 넘보려는 기사를 썼고 일본 우익신문 산케이 신문에서는 "쓰시마가 위험하다"라는 쓰시마 위기론을 기사로 써 넣었다.
앞으로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한 역사를 간직하고 튼튼한 조국을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만 같다. 조국을 져버린 사람도 있지만 조국을 지키려는 사람도 많은 것도 사실이다. 국토 환경을 보존하고 주민들과 협력하여 미래 주인공 청소년 교육에 역량을 다해야 할 것으로 본다. 이러한 실정을 교과서에 기록하여 알리고 바른 사관을 정립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가야 될 것으로 본다.
도판 캡션:















원 게재: 기행문 / 회화지 23호(2016) 38–49쪽 · 원본 PDF 38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