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새로운 '비평적 지역주의'를 향해
글 _ 이정우(임근준), 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특정 지역에 결부된 성취의 선례들
한국현대미술의 역사에서 '비평적 지역주의(cirtical regionalism)'는 그리 활발하게 논의된 주제가 아니다. 사실 유럽이나 북미의 현대미술계에서도 대안적 지역주의는 대주제로 부상한 적이 없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오베르-쉬르-와즈(Auvers-sur-Oise)에서 생을 마감한 빈센트 반 고흐나,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마르키즈 제도 아투오나(Atuona)에서 눈을 감은 폴 고갱의 경우를 봐도, 위대한 성취는 거의 언제나 특수한 지역과 결부됐다.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폴 세잔도,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에서 조용히 작업하며 파리의 미술계에서 사실상 죽은 사람 취급을 받음으로써 더 위대한 성취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폴 세잔은 굶어죽을 걱정이 없는, 부유한 집안의 상속자였다.) 이후 수많은 미술가들이 그 모델을 변주했다. 대표적 인물이, 세잔의 족적을 그대로 역추적한 조르주 브라크였다.
1930년 6월 노르망디의 샤토드부아젤루프(Château de Boisgeloup)을 구입한 피카소도, 1931년부터 개조한 부아젤루프 저택의 스튜디오에서 조각 작업에 매진하며 적잖은 성취를 거둔 바 있었다. 1958년엔 세잔의 엑상프로방스와 생트빅투아르산과 가까운 보브나르그(Vauvenargues)에 성을 매입하고, 잠시 연인 프랑수아즈 질로와 함께 행복한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남불의 빛을 사랑했던 마티스도, 1917년의 첫 니스(Nice) 방문 이래, 여러 시기에 걸쳐 니스에 장기 체류했지만, 역시 가장 특기할만한 시기는, 나치를 피해 베니스의 '르 레브(Le Reve)'에 거주하던 1943-1948년 시기였다(종종 니스를 오갔다). 1939년 부인과 갈라선 마티스는, 조수 리디아 델렉토르스카야(Lydia Delectorskaya)에게 의지한 채, 1941년부터 아픈 몸으로 색종이 자르기 작업(papiers découpés, cut-outs)을 전개해 큰 성취를 거뒀는데, '르 레브'에서 만든 색종이 작업들과 니스의 저택, '오텔 레기나(Hôtel Régina)'에서 만든 작업들이 서로 꽤 달랐다. (대표작들은, 주로 니스에서 1950년부터 제작되기 시작했다.)
가난했던 잭슨 폴락은, 부인 리 크래즈너와 함께, 1945년 여름 이스트햄튼(East Hampton)의 스프링스로 이사해 거주하고 작업하며 큰 성취를 거뒀다. 잭슨 폴락과 리 크래즈너를 따라서, 여러 미술인과 화상이 그곳에 별장을 마련했는데, 뉴욕 사람들에겐 그곳이 미국 버전의 엑상프로방스나 다름이 없었다.

부유층이었던 헬렌 프랑켄텔러와 로버트 마더웰 부부도, 1945년 이스트햄튼에 땅을 샀고, 마더웰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 피에르 사로에게 디자인을 의뢰해 1947년의 설계안으로 1948년 군대 막사처럼 생긴 효율적 작업실을 완성했다. (반면, 햄튼에 여름 작업실만을 뒀던 헬렌 프랑켄텔러는, 메사추세츠 프로빈스타운의 작업실에서 주로 작업했다.)
불법 이민자 화가였던 윌렘 드쿠닝은, 부인 일레인 드쿠닝과 함께 1953년 여름 처음 햄튼의 리오카스텔리 별장에 초대받은 뒤로, 미국 특유의 청교도 문화가 남아 있던 햄튼에 매력을 느꼈다. 1961년 이스트햄튼의 스프링스에 땅을 구매해 크게 집과 작업실을 짓고, 1963년 이주했는데, 그곳에서 수많은 걸작이 탄생했다.
한데, 미국의 경우, 현대미술의 패권이 동부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LA 지역이나 샌프란시스코 베이에어리어 지역이나 시애틀과 워싱턴 지역의 미술가들은, 역사에서 홀대를 받는 시절이 있었고, 그건 이제야 차차 시정이 되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왕년에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였음에도 사후에 이렇다할 조명을 받지 못했던 시애틀과 워싱턴 지역의 게이 작가 마크 토비가 되겠다. 그는 1960년대 초반 연인 페르 할스텐과 함께, 스위스 바젤로 이주해 그곳에서 말년을 보냈다.)
게티재단(Getty Foundation)은, LA 지역주의 미술의 역사를 바로세우고자 2011-2012년 <퍼시픽 스탠다드 타임: LA의 미술 1945-1980(Pacific Standard Time: Art in L.A. 1945-1980)>이라는 대대적인 미술관들의 페스티벌을 실현하기도 했지만, 캘리포니아 지역의 '빛과 공간 운동(Light and Space Movement)' 등이 재조명을 받게 된 것은, 2010년대 중후반의 일이었다.
독일의 경우, 통일 이후 구 동독의 라이프치히에서 사회주의리얼리즘을 교육받은 화가들이 구식 화풍을 바탕으로 새로운 실험을 전개하거나, 서독의 청년들이 라이프치히로 유학을 가거나 장기 거주하면서, 소위 신라이프치히화파(Neue Leipziger Schule)가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사실 맥락적 시발점은, 1977년의 제6회 카셀 도쿠멘타(documenta 6)에서 마련됐다. 사회주의리얼리즘의 기법을 활용하는 작가들을 구식라이프치리화파(Alte Leipziger Schule)로 호명하며 재조명했던 것이, 라이프치히의 화가들을 별도의 계보로 사고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난 네오 라우흐(Neo Rauch)나, 서독에서 태어나 미국 칼아츠(CalArts: LA 지역주의 미술의 남상점)에서 공부한 크리스토프 루크해베를레(Christoph Ruckhäberle) 등은, 신라이프치히화파를 구 동독 지역 부흥의 상징으로 삼아 정책적 차원에서 지원한 독일 정부의 덕을 크게 보기도 했으니, 어떤 면으론 영국의 yBA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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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게재: 특별기고 / 회화지 29호(2022) 52–53쪽 · 원본 PDF 54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