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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북

양정숙(조선대학교 E-tonic 사업단 전담 교사)

글 양정숙 (조선대학교 E-tonic 사업단 전담 교사)

옛 생활도구
옛 생활도구

본문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북, 솥, 인두, 숯다리미, 불손, 다듬이 방망이, 홍두깨, 등등. 북을 집어 들고 헤어졌던 어린 시절 친구가 맞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요모조모 살피며 눈을 맞추었다. 주인은 이를 귀목나무 북이라 알려주었다.

바게트빵처럼 생긴 기다란 통나무 중앙에 고구마 하나가 누울 정도 깊이의 직사각형으로 파낸 그릇 속으로, 실오라기 한 가닥이 겨우 빠져 나올 수 있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정교하고 매끄럽게 손질된 것으로 보아 무척 정성을 들여 만들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 보자 윤오영의 수필 '방망이 깎던 노인'이 떠올랐다. 수필에 나오는 주인공 노인은 장인이었다. 명예를 걸고 방망이를 깎는, 어떤 이윤의 유혹에도 타협하지 않고 오직 최고품의 방망이만을 추구하는, 자손심이 강한 그런 장인이었다. '이를 만든 사람도 그 노인처럼 장인 정신으로 심혈을 기울여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보물처럼 소중하게 느껴진다. 유선형으로 양 날개가 날렵하게 생긴 몸을, 손을 펴서 이리저리 쓰다듬어 본다. 매끄러운 나무의 감촉이 온기로 살아난다. 한 쪽 꼬리를 쥐니 손 안에 쏙 들어온다. 이쪽저쪽 손을 바꿔 가며 샅샅이 훑어본다. 가슴이 싸해온다. 동지섣달 긴긴 밤, 자다가 눈을 떠보면 어머니는 베틀에 앉아서 찰카닥 찰카닥 베를 짜고 있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매운 시집살이도, 올망졸망 딸린 시동생들을 기르는 일도 손익계산에 넣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자신의 업보로 여기며 그래도 자존심만은 잃지 않고 지켜온 올곧은 가정을 후손에게 넘겨주었다.

[발췌 상자 · 25쪽] 주말이면 열리는 '문화 장터'로 나갔다. 우리 선조들이 썼던 물건을 놓고 글을 쓰다가, 거기에 가면 옛 물건을 더 만날 수 있겠다 싶어서였다. 도로 가에는 시간을 되돌려 놓은 듯 어린 시절에 같이 끼고 살았던 물건들이 진열되어 마치 키 재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옛 생활도구
옛 생활도구

다시 북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마치 베니스에서 봤던 보트를 축소해 놓은 것 같은 형상이다. 역사를 뒤적여 보면 우리 조상이 서양 보다 훨씬 앞섰던 시대가 있었다. 고려 고종 때는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냈고, 세종대왕은 세계 최초 지시 우량 관측기구인 측우기를 발명해 냈다. 그렇다면 베니스 주택가에 실핏줄처럼 연결된 물 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보트는 우리 조상들이 쓰던 이 북을 본떠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이는 14-5세기 경 세계 여러 나라와 교역을 했던 베니스 상인이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우리네 안방을 몰래 엿보고 간 결과물일 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다듬이 방망이는 무게가 있고 트지 않는 박달나무를 사용했는데 북은 귀목나무를 쓴 것을 보니 우리 선조들의 지혜로 보아 이 나무는 습기에 강한 모양이다. 베를 짜려면 북에 꾸리로 감은 실을 담아 놓고 엉키지 않게 촉촉이 물을 적셔 술술 빠져 나오도록 하는 기구이기 때문이다.

발갛게 절은 나뭇결이 오래된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이는 손때가 묻었든 다른 도구를 사용했든 반질반질 길이 나야 제 구실을 할 수 있다. 만약에 몸이 거칠고 날렵하지 않으면 실을 할퀴기 때문에 베를 짜는데 순조롭지 못하다.

장독대와 돌다리
장독대와 돌다리

육이오가 막 지나서였다고 기억된다. 내 할머니와 어머니는 사이 좋은 동업자였다. 큰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려면 혼자서는 힘에 겨웠을 것이다. 손을 꼽아 보니 그 때 어머니는 이십대 후반의 나이였다.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눈물을 달고 살았다. 밥을 먹으면서도 걸어 다닐 때도 서러움을 그렇게도 이기지 못했다. 어머니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슬펐던 것보다도 큰 살림을 혼자 어떻게 꾸려 갈 것인가 겁이 나서였던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할머니가 비워둔 자리에는 어린 딸, 여덟 살 짜리 내가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하던 일을 대신할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밤에 실 잣기 품앗이를 가면서 나에게는 과제가 주어졌다. 물레로 뽑아 놓은 실로 북에 담겨질 꾸리를 감는 일이었다. 자정쯤 되어 품앗이에서 어머니가 돌아오실 때까지 꾸리 감기를 계속했다. 품앗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어린 나의 손을 어루만지며 많이 안쓰러워했다. 어린 네가 무슨 죄냐. 할머니가 계시면 잠을 자고 있을 네가, 하시면서.

그 때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일을 하고 있었을까. 어머니 말을 잘 듣는 딸이었다기보다는 그렇게 함으로써 어머니와 만나는 시간을 채우고 나면 나에게 돌아오는 칭찬이라는 선물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랬다. 네가 감아 놓은 꾸리로 베를 짜면 얽히지 않고 잘도 풀려 나온다고.

글을 쓰다가 풀리지 않아 행여나 하고 소재를 찾아 나선 것이 마치 횡재라도 한 것처럼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또한 품속의 북이 금방이라고 실을 풀어내며 나에게 말을 걸어올 것만 같다.

'정숙아, 실을 감고 있는 어린 너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구나. 세상은 참 많이도 변했지? 이는 우리가 살아온 역사야. 오늘날의 커다란 산업도 이렇게 시작해서 발전해 오지 않았겠니?' 라고. ▣

옹기와 맷돌
옹기와 맷돌
인두
인두
남비
남비
절구
절구

필자 약력

양 정 숙

  • 등단년도 : 1995년1월 월간 수필과 비평 신인상
  • 現) 한국문인협회, 광주 문인협회, 전라수필문학회 회원
  • 수 상 : 대한문학상(수필부문) 여수 해양문학상(소설부문) 광주 전남 아동문학인회(동시)
  • 수필집 : 「엄마 이 세상 살기가 왜 이렇게 재밌당가」
  • 現) 조선대학교 E-tonic 사업단 전담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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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게재: 수필 / 회화지 20호(2013) 24–27쪽 · 원본 PDF 24쪽 ↗

이 지면의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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