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회화회→회화지 아카이브→20호→전주의 전시공간
회화이론(석사학위논문)

전주의 전시공간

김 원(전북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 재학, 민족미술인협회)

글 김 원 (전북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 재학, 민족미술인협회)

전주 시가지 전경
전주 시가지 전경

본문

일제강점기를 지나 현대로 넘어오면서 그림에 대한 수요가 점차 증가하고 관람문화가 확산되면서 전시공간도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소비가 많아지면서 향유의 층도 확대되고 다양해진다. 전주는 전라북도의 도청소재지로 행정과 상업의 구심점역할을 하고 있어 전북화단 화가들의 대표적인 활동 근거지중 하나이다. 기록물 상으로는 일제강점기 전주 '공회당(公會堂)' 이 1923년 《동아일보》에 기재된 규수서화전람(閨秀書畵展覽)가 최초로 확인되고 있다. 1925년 이곳에서 황가4형제 중 황용하 의 개인전이 열렸으며 일반인에게 무료관람하게 하였다. 이후 1927년 아동도화전람회(兒童圖畵展覽會)가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현재 전주 공회당의 정확한 공간의 규모는 알 수 없지만 1927년 《동아일보》의 보도를 보면 전주일보도화전람회(全州一圖畵展覽會)가 열렸는데 이 기사를 통해 전주 공회당 공간의 규모와 관람열기를 알 수 있는데 2일 동안 천여명을 수용할 공간임을 알 수 있으며 미술작품 수 또한 많았음을 짐작하게 하며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람인원을 통해 두터운 수요층을 확인할 수 대목이라 하겠다.

전주일보도화전람회(全州一圖畵展覽會) 전북 전주 제일보통학교(全北全州第一公立普通學校)에서는 지난 이십이일(二十二日)부터 이십삼일(二十三日)까지 전주 공회당(全州公會堂)에서 도화전람회(圖畵展覽會)를 개최(開催)한바 관람자(觀覽者)가 천여명(千餘名)에 달(達)하여 성황(盛況)을 이루었다더라. 《동아일보》, 〈湖南地方(호남지방)〉, 1927.03.26

1931년 양화백전람회(兩畵伯展覽會)를 개최하는데 발기(發起)에 참여한 화가는 이강원, 김희순, 박정근 등 50여명과 초대작가로 소정 변관식과 이경배가 있다. 이응로가 전주 중앙동 4가 24번지에 '개척사(開拓社)' 라는 상점을 열고 건물도색과 간판제작 하였으며 1933년 전주 공회당에서 개인전을 하는 등 일제강점기 전주 공회당을 중심으로 화가와 수요층의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졌다. 1951년 유병희는 종군 시 보고들은 기록화 50여점을 모아 전북 최초의 종군미술전을 전주 공회당에서 개최하여 많은 관심을 모았으며 작품의 내용으로는 전쟁의 비극과 극한 상황 속의 인간갈등을 묘사하여 큰 충격과 함께 깊은 감명을 주었다고 한다. 유병희 종군시록화전 이후 기록물에서 공회당에 관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 전주를 소상하게 기록해 놓은 전주부사(全州府史)에도 소개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특정 건물의 회의장과 같은 곳이 사용되어 졌을 것이라 추정된다. 당시 전주 공회당에서 이루어 졌던 전시를 신문기사를 통해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표-1) 전주공회당 전시 기사 연보

신문명년도기사 제목
동아일보1923.09.12閨秀書畵展覽(규수서화전람)
동아일보1925.05.14全州(전주)에 書畵展覽(서화전람)無料入場(무료입장)을 許(허)한다고
동아일보1927.03.22湖南地方(호남지방)-兒童圖畵展覽會(아동도화전람회)
동아일보1927.03.26湖南地方(호남지방)-全州一圖畵展覽會(전주일보도화전람회)
동아일보1931.02.18兩畵伯展覽會(양화백전람회)
동아일보1933.10.11全州個人展(전주개인전) 李應魯氏開催(이응노씨개최)

일제강점기를 지나 6.25전쟁을 전후로 부족했던 문화시설의 역할을 '미군공보관' 이 충족하게 되는데 '한미공보관' , '미군공보관' , '미국공보원' 이라고도 불렸다. 1952년 5월 합동수채화전에 참가했던 하반영의 증언에 따르면 현재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3가 80에 위치했으며 녹색 돔 형태의 건물이 2동 자리 잡고 있었으며 주요 활동으로는 미군에 관한 선전활동 이외 공연, 전시, 작품슬라이드감상, 미술 강의 등이 이루어졌고 전시는 미군의 주최로 이루어 졌으며 그림의 거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전쟁의 영향으로 많은 자료는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으나 1964년 《경향신문》의 기록을 보면 전국 8개 시(市)에 미국공보원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공보관들은 영화기재, 잡지, 책, 전시물, 슬라이드, 녹음기, 발전기 등이 구비되어 있으며 기능으로서 도서관, 전시장뿐 아니라 잡지와 신문을 정기적으로 배포했다.

(중략) 대전(大戰)후 미국공보원(美國公報院)이 전국 여러 도시에서 갖가지 문화 활동을 전개했던 일을 우리는 기억한다. 부산(釜山), 대구(大邱), 인천(仁川), 청주(淸州), 대전(大田), 원주(原州), 광주(光州), 전주(全州)등지에서였다. 도서관 시설이 있었고 영화며 각종전시 및 간행물(신문, 잡지 등)을 만들어 배포했었다. 그러다가 6.25동란을 전후하여 그들의 지방 활동은 깨끗이 축소되었고 대개의 경우 그들의 시설은 철수 되었다. 대전(大田)을 비롯한 몇몇 도시에서 전부 혹은 일부시설을 우리의 지방관청이라든지 민간대표에게 넘겨준 일이 있지만, 한국 관청 혹은 민간은 그것을 인수하여 문화관(文化館), 공보원(公報院), 문화원(文化院)등의 이름으로 바꾸었고 오늘과 같은 문화원(文化院)의 남상(濫觴)이 되었다. 때를 같이하여 주로 군청(郡廳)소재지에 잇달아 나타난 문화원(文化院)들도 거기서 영향되고 자극된 것 이었다. (중략) 《경향신문》, 〈文化院(문화원)의 나아 갈길〉, 1964.02.12

1952년 피난중이였던 홍익대학이 홍대미술전람회를 개최하였고 이후 5월에 합동수채화전이 개최되었으며 11월에는 전북초등고생 종합미술전람회가 열렸다.

1954년 5월에는 중국계미국인 국제화가 통킹만의 수채화전이 열려 신상미술회회원들이 환영 찬조(贊助)작품과 더불어 전시회를 가졌으며 다과회, 작품슬라이드 감상과 함께 미술 강의가 이루어졌다. 그런가하면 한께 '한벽루' 에서 스케치를 하고 예술을 토론하였다. 이후 6월 동경국제미술학교를 졸업한 이경훈이 주축이 되어 '신상미술회' 창립전을 개최하였다. 이 전시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전북지부, 미국문화원, 전북일보, 삼남일보의 후원으로 미국문화원에서 이루어 졌다.

이 시기에는 문화예술의 활동 여건이 좋지 못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협회의 탄생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경향신문 기사를 통해 보면 1947년부터 1954년까지 7년간 운영했던 전주 '미국공보관' 은 '전라북도공보관' 으로 인수되어 운영되게 된다.

도 공보관 개관식(道公報館開館) 전라북도 공보과에서는 지난 팔(八)월 십칠(十七)일 당지에 도공보관을 설치하고 성대한 개관식을 거행하였는데 이는 칠(七)년 간에 걸친 다대한 업적을 남긴 전주미국공보관의 폐지에 따라 이를 인수하고 개관한 것 이라 한다. 《경향신문》, 〈道公報館開館式(도공보관개관식)〉, 1954.09.03

'전라북도공보관' 은 1954년 11월 신상미술회전시를 시작으로 1956년 박근영 개인전등이 열렸다. 미국공보관에서 전라북도공보관으로 이름만 바꾸어 같은 건물에서 운영되었던 공보관은 1960년도 다시 신축되었는데 연면적 1,365.19㎡,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건축되어 현재까지 그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1960년 3월 성심유치원 미술전시회, 1961년 현역군인화가 황태운의 전국순회 전시가 열렸으며 1962년 공보관에서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북지부를 시인 김해강을 초대 지부장으로 선출하여 출범하게 된다. 전북 도내(道內)에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의 보호와 육성 그리고 창의적인 예술문화의 창달(暢達)을 위함이며 전라예술제를 중심으로 건축, 국악, 무용, 문인, 미술, 사진, 연극, 연예, 영화, 음악 총 10개 협회가 가입되었으며 '전라예술제(全羅藝術祭)' 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62년 제1회 '전라예술제' 미술응모전의 아동, 중등부로 구성된 전시회가 열렸으며, 1963년 제2회 전라예술제 미술전시회와 사생대회가 전북 공보관과 다가산(多佳山)에서 이루어졌다. 9월에는 최양자 개인 시화전이 여렸으며 작품은 〈귀뚜라미〉 외 16점이었다. 그해 10월에 영생고등학교 제1회 미전이 열렸다. 제44회 전국체육대회(全國體育大會)를 참가한 재일교포(在日僑胞)팀 총감독 배옥현(裵玉鉉)이 당시 3학년에 재학한 안혜숙(安惠淑)의 그림을 감동 받아 일본으로 돌아가 생활이 어려운 안혜숙을 위해 장학회를 구성하고 나대환, 허태성, 안주중과 뜻을 같이하여 2만원어치의 화구와 현금 6만원을 후원하고 영생고 졸업 후 일본유학을 약속하였다. 1964년 1월 당시 5세의 김지은의 그림 67점의 전시로 화재가 되기도 했다. 7월에는 장윤우 순회 시화전이 열렸고 11월 제3회 전라예술제의 미술, 시화전이 15일부터 19일 까지 개최되었다. 1968년 '한국청년작가연합회(韓國靑年作家聯合會)' 의 지방순회 국제 미술 강좌가 전주에서 열렸으며 세계 일주 여행, 동연합회 창립전 작품(同聯合會創立展作品)이 슬라이드로 소개되었다. 같은 해 서라벌예대 미술작품이 순회전시를 하였다. 1969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북지부 미술협회는 전라북도로부터 '전라북도미술대전(全羅北道美術大展)' 에 대한 조례를 7월 30일자 내무부 승인을 받아 제1회 전라북도미술대전을 개최하고 공보관에서 전시를 하였다. 당시 공보관에서 있었던 전시회에 대한 내용을 신문기사를 통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2) 전라북도공보관 전시 기사연보

신문명년도기사 제목
경향신문1954.09.03道公報館開館式(도공보관개관식)
경향신문1961.03.19現代詩畵展(현대시화전)을計劃(계획)
경향신문1961.05.20第一回薔薇展示會(제일회장미전시회) 全州(전주)장미會主催(주최)로
경향신문1961.05.22薔薇(장미)꽃을 우리家庭(가정)에
경향신문1962.03.04地方公報實態(지방공보실태)등 把握(파악)
동아일보1963.05.17展示(전시)
경향신문1963.05.21第(제)2回(회)「장미展(전)」
동아일보1963.09.06소식
동아일보1963.12.02가난한女高生(여고생)에 畵道精進(화도정진)길마련
동아일보1964.01.045세 어린이 미술전
동아일보1964.07.23張潤宇巡廻詩畵展(장윤우순회시화전)
동아일보1968.02.06地大(지대)순회美術講座(미술강좌)
동아일보1968.09.10文化行事(문화행사)
매일경제1980.06.18東洋畵家(동양화가) 一坡(일파) 朴永根(박영근)씨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972년을 전후로 하여 전라북도공보관을 전북예총이 운영하게 되어 '예총화랑' 으로 이름을 바꾸고 운영하였으며 1974년 풍남백화점 입점 이전까지 운영하였다.

1969년 10월 27일 도전(道展)이 개최되었는데 특히 공예와 조각부문은 작가빈곤으로 이름만 내걸고 있는 실정으로 생활미술의 앞날이 암담하였다. 그리고 비구상은 빈곤하였으며 대체로 구상경향만이 풍성한 수확이었다. 협소한 장소의 불리함을 무릅쓰고 관람객은 심심치 않게 밀려드는데, 총 출품작 168점 중 85점이 입상, 그 중 특선작은 24점으로 100호짜리의 대작들이 많았으며 간혹 10호짜리의 작은 것도 한몫 끼었다. 《전북매일신문》, 〈第1回道展(제1회도전)〉 1970.9.13

1960년대 이후에 들어 초반 전주에서는 전시공간에 대한 많은 변화가 생기게 된다. 첫 번째로는 다방전시를 꼽을 수 있다. 전주의 다방역사를 보면 6.25직후 구 전주극장 골목에 자리하고 있었던 '고향' 다방이 전주 다방의 효시(嚆矢)이며 서울에서 피난을 내려온 연예인, 언론인 등의 출입으로 성시(成市)를 이루자 그 옆에 왕궁다방, 무영다방, 중앙동에 아담다방, 경원동에 삼양다방이 생겨났다. 다방의 규모는 대체로 66.115702㎡ 내외이다. 다방전시의 시작은 1952년 4월에 전주 카멜다방에서 시화전을 열어 인기를 끌었으며 군산, 이리, 남원 등 순회전시를 열었던 것을 시작으로 전북문단, 화단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이후 1966년 아담다방에서 전주일요화가회(日曜畵家會)창립 1주년 합동전이 열렸으며, 1972년 1월 27일 옥다방에서 전북초대작가상설전시회를 개최하고 매월 초 정기적으로 그림을 교체하면서 전북화단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1970년대에 들어 경원동을 중심으로 다방전시가 유행하기 시작하는데 이유는 전시장의 부족이 가장 크고 수요층의 왕래가 많았던 점을 들 수 있다. 경원동 일대는 전북에서 가장 규모가 큰 홍지서림과 고전음악 감상실로 애호가의 사랑을 받았던 필하머니에서 그림을 걸어 놓고 판소리 감상회, 시 낭송회 등 이 정기적으로 열렸다. 이상다방은 젊은 시인들의 모임이 잦았다고 한다. 이처럼 다방은 만남, 회합의 장소로 이용되었으며 이용자층은 노동자부터 지식층까지 매우 다양하게 이용하였다. 잦은 문인, 국악인, 화가들의 출입과 문화행사가 진행된 점에서 다방은 복합문화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전주문화현장도
전주문화현장도

박민평의 증언에 따르면 그림전시를 주로 하던 다방은 아담다방, 설다방, 삼양다방, 사립문다방이 대표적이라고 한다. 특히 사립문다방은 화가 유휴열이 운영하기도 했다. 전주화단에 한국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시대에 다방전시가 활성화 되면서 서양화 그림 거래가 이루어지는 시발점이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다방전시 개최방법은 하반영의 증언에 따르면 보통 안면이 있는 다방주인을 통해 보통 무료로 대관을 하였으며 대관료 대신 전시가 끝나면 그림 1점을 주인에게 주었다고 하며 작품 관람을 위해 찾아온 수요자에게 커피판매를 도와 매출을 높였다고 한다. 그림 판매대금은 대게 작가가 모두 가져갔다고 한다. 잦은 다방 전시가 문제가 되기도 했는데 잦은 다방전시와 이에 따른 매입 권유 때문에 전시회공해라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두 번째로는 화랑의 등장을 꼽을 수 있다. 1974년 도내에서 처음으로 상설 전시장인 '百濟畵廊(백제화랑)' 이 개관하게 되는데 서화수집에 평생을 보낸 권영도가 소장품 800점을 보존과 전시를 위해 고사동1가 132번지에 문을 열었다. 규모는 165.289㎡로 부대시설로 '百濟畵廊(백제화랑)' 을 두어 대관전시를 진행하였다. 전북화단에서 화랑의 등장은 대관공간을 이용한 순수 미술품전시의 전문 공간 태동을 의미하며 그것은 많은 수요층들의 욕구충족 해소 뿐 아니라 화가들의 활발한 미술활동의 근간이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문화저널』 2005년 8월호에 기고(寄稿)되어있는 유대수의 글 「화랑 전북미술의 흐름과 미술의 흐름」에 "이는 당시 여타의 지방에서는 보기 힘든 시도들이었으며 전북미술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풍성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라고 표현하였다. 당시 월담미술관과 백제화랑에서 개최된 전시기사를 신문을 통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3) 월담미술관, 백제화랑 전시 기사 연보

신문명년도기사 제목
경향신문1974.08.03月潭(월담) 權寧燾(권영도) 愛藏展(애장전) 韓國近代書畵(한국근대서화)한눈에
경향신문1974.12.24月潭美術會館(월담미술회관) 개관 소장품8百(백)점 전시
동아일보1975.02.07韓國(한국) 전통山水畵(산수화)의 元老大家(원로대가) 小亭(소정) 卞寬(변관식)선생 回顧展(회고전)
동아일보1975.05.22金永基(김영기) 韓國畵展(한국화전) 全州(전주) 百濟(백제)화랑서
경향신문1975.09.02李炳三(이병삼) 초대油畵展(유화전) 全州(전주) 百濟(백제)화랑서 朴種禹(박종우) 河麟斗(하린두) 詩畵展(시화전)
경향신문1976.08.05文化(문화)의 香薰(향훈)따라 千里(천리)길 (30) 全州(전주) 活氣(활기)넘치는 畵壇(화단)

점차 활동하는 작가의 수는 증가 하였지만 실제로 전시공간은 확대되지 못했다. 다방이 그 대안공간으로 자리 잡았지만 한편 부작용도 많았다. 1973년 후반 경 전라북도 도청직원들의 휴식장소로 애용되었던 다방이 작품 전시로 인하여 혼란스럽게 되자 전라북도 당국은 급기야 다방에서의 전시금지령을 내리게 되었다. 당시 도전이 해를 거듭할수록 출품작은 늘어가지만 전시 공간 부족으로 형편상 좋음 그림이 낙선하는 결과가 초래되었고 여기저기 나누어 전시가 진행되는 사태가 계속되어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전북문화예술회관' 의 건립이었다. 당시 '전북예총' 미술협회, 전북문화예술회관 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던 한소희는 준공에 부족한 기금마련을 위해 1975년 12월에 서울국립공보관에서 전북미술회관 건립모금전 '한국원로중진작가미술전(寒國元老重鎭作家美術展)' 을 개최하였으며 200여점이 출품되었다. 예술문화의 중앙편재를 지양하고 균형 있는 문화의 지역분산이 요청되는 우리 문화풍토에서 전북문화예술회관 건립에 뜻을 같이한 전북작가 이외에 김은호, 이마동, 장욱진, 서세옥, 허백련, 박영선 등이 같이하였다. 이외 무용발표회, 미술전 등으로 2,000만원을 마련하여 전라북도에 기증하였다. 1981년 문예진흥원에서 지방문예활동지원을 위해 지방예총의 문예 사업을 지원하고 전북문화예술회관건립비로 1억5천만원을 지원키로 했다. 이후 경원동1가 104-5번지에 지하 1층, 지상 5층, 연면적 4,680㎡ 규모로 6개의 전시실과 780석의 공연장 시설을 갖추고 1982년 2월 9일 개관하여 현재까지 위치해 있다. 당시 전북문화예술회관 건립에 관한 신문기사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4) 전라북도 문예회관건립 기사 연보

신문명년도기사 제목
동아일보1975.12.11元老(원로) · 重鎭(중진) 美術展(미술전)
동아일보1975.12.11東亞(동아)포우스트
경향신문1975.12.11元老(원로) · 重鎭(중진)작가전 公報館(공보관)
경향신문1975.12.15藝術(예술)의 꿈싣고 2000여點(점) 출품 全北(전북) 미술회관 建立基金(건립기금)마련 전국 元老重鎭(원로중진)작가 전람회
동아일보1975.12.17全北美術館建立(전북미술관건립)위한 美術展(미술전) 성황
동아일보1981.03.14文藝振興院(문예진흥원) 靑少年(청소년) · 地方文藝(지방문예) 중점支援(지원)
전북일보1982.02.09藝材(예목)길러낼 産室(산실)로 活用(활용)

위에서 언급했던 이외의 전시장을 기록물에서 보자면 전북문화예술회관 건립이전 전북예총이 전주시 경원동 1가 126-44의 4층, 연건평 1266.1157㎡으로 전(前) 전주시립도서관을 매입하여 전북문화예술회관 개관 이전까지 임시예술회관으로 사용하였으며 제6회 전북도전을 개최하였다. 현재는 '성모간호교육원' 으로 이용되고 있다. 1945년 10월 동광미술연구소의 제1회 동광미술전람회가 '성심여자중학교' 에서 개최되었고 1969년 《동아일보》에 이태훈 산악사진전이 '전주여성회관' 에서 열렸으며 1971년 《동아일보》의 성신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지방순회미술전이 열렸던 전주 '예술화랑' 등이 있었다. ▣

수록 도판

통킹만 환영행사
통킹만 환영행사
전주공고 졸업앨범
전주공고 졸업앨범
전주문화현장도
전주문화현장도
월담미술관 백제화랑
월담미술관 백제화랑
전북예술회관건립 모금전
전북예술회관건립 모금전
전북예술회관 건립
전북예술회관 건립
전주 시가지 전경(우면)
전주 시가지 전경(우면)

  • 판독 참고: 본문의 '여렸으며', '화재가 되기도', '한께 한벽루', '좋음 그림', '藝村(예목)', '寒國元老重鎭作家美術展' 등은 지면 표기 그대로이며 각각 '열렸으며', '화제가 되기도', '함께 한벽루', '좋은 그림', '藝林(예림)', '韓國元老重鎭作家美術展'의 오식으로 보입니다.
지면 보기 · 원본 8쪽PDF에서 열기 ↗
지면 1지면 2지면 3지면 4지면 5지면 6지면 7지면 8

원 게재: 회화이론(석사학위논문) / 회화지 20호(2013) 40–47쪽 · 원본 PDF 40쪽 ↗

이 지면의 도판

전주 시가지 전경(좌면)-전주 시가지 전경(좌면)
전주 시가지 전경(우면)-전주 시가지 전경(우면)
그림-1) 1954년 5월 5일, 통킹만 환영행사, 전북미술약사-그림-1) 1954년 5월 5일, 통킹만 환영행사, 전북미술약사
그림-2) 1962년 전주공고 졸업앨범, 전주역사박물관 소장-그림-2) 1962년 전주공고 졸업앨범, 전주역사박물관 소장
그림-3) 1967년 6월 27일, 전주문화현장도, 경향신문-그림-3) 1967년 6월 27일, 전주문화현장도, 경향신문
그림-4) 1974년 12월 23일, 월담미술관 백제화랑, 경향신문-그림-4) 1974년 12월 23일, 월담미술관 백제화랑, 경향신문
그림-5) 1975년 12월 15일, 전북예술회관건립 모금전, 경향신문-그림-5) 1975년 12월 15일, 전북예술회관건립 모금전, 경향신문
그림-5) 1975년 12월 15일, 전북예술회관건립 모금전, 경향신문-그림-5) 1975년 12월 15일, 전북예술회관건립 모금전,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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