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신 300주년 기념 '표암 강세황, 시대를 앞서 간 예술혼' 특별전을 보고…
글 이승훈 (회원, 군산대성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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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25일~8월 25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특별전시실에서 초상화와 화첩, 문집 '표암 유고' 등 시 · 서 · 화 대표작은 물론 그가 비평의 글을 남긴 당대 이름난 화가들의 작품까지 선보인다. 모두 81건 103점이 전시되었다. 탄생 300주년 기념전이 된다. 특히 부안의 '우금암도' 와 '송도기행첩', 중국기행에서 본 풍속 등은 새로운 면모를 보게 해주었다. 1부의 주제는 문인화가의 표상, 2부는 가문과 시대, 3부는 문인과 이상의 꿈, 4부는 여행과 사생, 5부는 다양한 화목 청신한 감각, 6부는 당대 최고의 감식안 등으로 구분하여 화가의 진면목을 다 보게 하였다.
강세황을 생각하면 대표적 그림으로 영통동구도이다. 이 그림은 송도기행첩에 전하는 그림으로 크지 않은 작품인데 그 그림 양식이 서양화법이 가미 되었다는 것이다. 바위산이 명암법으로 그려져 입체감이 나타난다. 바위 사이로 길이 나 있는 데 선비는 나귀타고 산골짜기를 넘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1757년 개성과 북쪽 지역을 여행하면서 그린 그림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마련한 강세황전은 탄생 300주기에 맞추어 열린 전시이다. 이원복님의 한국미술7천년 미의 산책(이가서)에 의하면 탄생 300주년 10년 앞서 2003년에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예술세계를 다각적으로 '18세기 예술의 큰 스승, 표암 강세황의 시 서 화 평' 이 전시 되었다고 전한다. 이 때 그는 다음과 같이 시평을 전했다. "후회 없이 열심히 산 이들도 쓸쓸하고 가슴 시린 때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케 하는 자화상을 비롯한 당당하고 의연한 초상, 조촐하고 담박한 산수, 깔끔하고 조촐한 화훼초충, 조선 선비 그림의 백미인 사군자, 유려한 글씨, 따사로운 시문 등 표암 유묵과의 만남"이라고 전했다. 이 번 전시에서도 그의 삶과 작품이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산수화 이외에도 그는 초상화는 물론 초충도, 화가의 평을 잘 쓰는 문화가의 중심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서울 남산 자락에서 나고 여섯 살에 시를 지을 정도였다. 안산에 이주 하여 안산 15학사로 불리는 사람들과 교유를 하였고, 젊어서는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늦게 벼슬에 올랐었다. 오히려 젊어서 지식인들과 폭 넓은 교유(交遊)로 서양 문물을 포함한 새로운 지식과 경험에 눈떴고 개성이 가득한 저술 활동과 예술 작품을 제작하였기에 더욱 탁월한 지식을 함양했을 것이다. 문예 전반에서도 해박한 지식과 안목으로 비평가로서 업적이 남았지 않았나 싶고, 그의 활발한 활동과 탁월한 안목은 궁궐에서부터 궁중의 화원, 재야의 선비에 이르기까지 문예와 비평으로 신분과 지위를 넘나드는 문화 코드가 된 것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30년간 안산의 처가의 근처에 살다가 61세에 관직을 얻어 한성부판윤(지금 서울시장)을 거친 것은 지금 생각해도 그 때는 대단한 사회였고 존경할 만한 분이다.
강세황 집안은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라고 불렸다. 조부 강백년과 부친 강현의 뒤를 이어 삼대가 연속으로 기로소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렸다. 기로소라는 것은 나이가 70이면 기(耆)라 하고 80을 넘으면 노(老)라 하여 태조가 덕망이 있는 70세 이상 노인에게 경로의 의미로 춘추로 연회를 열어 준 것이 시초이다. 이 모임에 임금이 연로하면 참석하기도 했다. 이 기로소 모임이 작품으로 남아 있는 것도 있다. 이를 칭송하는 김정희의 현판용 글씨가 남아 전한다. 바둑을 두고 풍류를 즐기는 모습을 그린 '현정승집도' 는 오늘날 사진 같은 역할을 했다. 가운데 책을 보는 사람은 강세황이라고 한다. 평생지기들인 11명과 안산에서 복날 개를 잡아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한편, 큰 형(강세윤)의 과거시험 부정 사건에 연루되어 강세황은 출세를 포기하고 안산에서 시문을 즐기면서 생활하였던 것이다. 후에 영조가 양로연에서 강세황의 아들인 강인(1729~1791)을 통해서 아버지의 근황을 듣고 관직을 내리게 되었다. 처음 관직에 오른 것이 61세에 영릉참봉이다. 그리고 중국에 부사로 파견되기도 하여 건륭제를 알현하기도 했다. 화첩형식으로 그린 '무이구곡도' 가 전시 되었는데 중국 복건성의 무이산의 아홉 골짜기를 중심으로 그려진 것으로 성호 이익과 처남인 유경종의 발문이 남겨져 있다.
그는 여행과 사생에도 조예가 깊었다. 18세기는 조선의 문예부흥기이다. 실제경치를 그린 진경산수화가 성행했던 시기이다. 강세황은 송도(개성), 전북 부안, 금강산 일대 경치와 건륭제 천수연에 가는 길에 중국 풍경을 그리기도 했다. 강세황은 "진경산수화는 그곳을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속에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그림"이라고 생각했단다. 따라서 기행문이나 시보다는 그림이 낫다고 생각하였다. 겸재 정선(1676~1759)이 금강산을 현자의 구별 없이 관습적 화법으로 그렸음을 비판하는 대목에서는 현장을 현장처럼 사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송도기행첩과 부안 우금암도, 영대기관첩, 사로사기첩 중국기행 중 그린 그림 등은 사생의 묘미와 치밀함을 잘 보여준다. 강세황 일행이 중국 영대를 보고 문서를 작성한 글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다. "12월21일에는 황제가 영대에서 빙희(氷戱)를 구경하였습니다. 그날 당일 새벽녘에 신 등이 서화문밖에 도착하였는데, 섬라(暹羅 타이, Thailand) 사신이 신 등의 다음 자리에 섰습니다. 잠시 후에 황제의 난여(鸞輿) 가 나와서 국왕이 편안한가를 물었으므로 신 등이 편안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신 등이 걸어서 영대 가로 따라가니, 얼마 뒤에 황제가 빙상을 탔는데 모양이 용주(龍舟)와 같습니다. 좌우에서 배를 끌고 얼음을 따라가는데, 얼음 위에 홍살문을 설치하고 거기에 홍심을 달아 놓았습니다. 팔기(八旗)의 병정(兵丁)들로 하여금 각각 방위에 해당하는 색깔의 옷을 입고, 신발 바닥에는 목편(木片)과 철인(鐵刃)을 부착하고, 화살을 잡고 얼음에 꿇어앉아서 홍심을 쏘게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말 타고 달리면서 꼴로 만든 표적을 쏘는 것과 같았습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사로사기첩' 에는 안개가 자욱한 호수에 섬들이 원근의 풍경으로 나타나 있다.
강세황의 아들이 부안 현감으로 재직할 때 전북 부안일대를 유람하고 그렸던 우금암 일대 그림이 전해진다. 이곳을 조선시대 그린 화가로는 유일한 것 같다.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는 우금암 스케치 그림은 지금의 산세 모습과 비슷하다.
'우금암도(지본수묵, 25.4×267.34㎝)는 변산 특유의 암산(巖山) 분위기에 맞게 갈필로 문지르듯 표현했다. 당시 표암은 가늘게 쪼개진 벽의 무늬를 "마치 비단과 같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강세황이 그림과 함께 적은 글은 '표암유고' 의 '유우금암기(遊禹金巖記)' 에 동일하게 수록되어 있다. 아들 완이 부안현감으로 재임한 시기를 고려해 보면, 1770년 2월 혹은 이듬해 2월에 여행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국립중앙박물관측의 설명이다. 그림의 구성은 이동 경로에 따라 우금암(禹金巖)→문현(文懸)→실상사(實相寺)→용추(龍秋)→극락암(極樂庵, 장소 미확인)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새전북신문 기사 2013년 7월 8일자 참조)
우금암은 부안 상서면 감교리에 위치한 우금산(329m)의 정상부를 이루는 바위로 그 아래에는 천년 고찰 개암사가 있는데 최근에 고쳐지었다. 우금산에는 산성(전라북도 기념물 제20호)이 있다. 산성은 백제 의자왕 20년(660년)무렵 백제 부흥을 꾀하기 위하여 복선 장군이 유민을 규합하고 군비를 축적하고 항전하다가 나당연합군의 장군인 김유신과 소정방에게 패한 곳이다. 지금도 석성이 3km 정도 자연석과 다듬은 돌로 개암사 저수지 까지 이른다.
'송도기행첩' 은 송도(개성)와 북쪽의 오관산(五冠山), 천마산(天磨山), 성거산(聖居山)의 풍경을 그린 16점의 그림과 3개의 문장으로 되었다. 화첩의 글에서 스스로 말하길 "이 첩은 세상 사람들이 일찍이 한 번도 보지 못한 것(此帖世人不曾一目擊)"이라 하여 조선 시대 여느 그림들과 다른 면모를 발견해 주었다.
강세황은 당대 최고의 감식가라는 점이 특징이다. 겸재 정선과 윤순(문신 서예가), 조영석(관아재), 심사정(현재) 등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많은 화가들의 그림에 친필로 화평을 남겼다. 그는 화가이면서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 비평을 하여 자신만의 문예적 소양을 다방면으로 선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화평은 감식안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의 주관적인 감상이 아니라 오랜 문예적 소양의 발로로 보여 지며, 오늘날 조선 회화를 연구하는 데 이론적 원천이 되었다고 본다.
김홍도의 스승이었던 강세황은 김홍도를 많이도 사랑했던 것으로 본다. 김홍도가 38세에 그린 나비그림에 대하여 "나비의 가루가 손에 묻을 듯하니 인공-나비 세 마리 그림-이 자연의 조화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 이런 경지에 이르렀단 말인가? 부채를 펼쳐 감상하고는 경탄하여 한 마디 적는다…"고 평을 적었다. 김홍도에 대해서는 신필, 신품, 입신 등으로 극찬했다. "화가는 각각 한 가지에 장점이 있고 여러 가지를 다 잘하지 못하는데, 단원은 못 그리는 그림이 없고, 특히 신선과 화조를 잘 그려 이것만으로도 일세를 울리고 후대에 전해지기에 충분하다"고 평했다. 김홍도의 여행길에서 만난 풍경을 보고 "신품의 경지에 들어갔다.", "웃음을 자아낸다.", "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듯하다.", 풍속화를 보고는 "사람들의 풍속을 그리는 데에 뛰어나 길거리, 나루터, 점포 같은 것도 한 번 붓을 대면 손뼉 치며 신기하다고 부르짖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균와' 에서의 모임이라는 그림은 '균와' 라는 곳에 모인 강세황, 심사정, 허필, 최북, 김홍도, 김덕형 등 18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화가들이 예술적 교류하는 모습을 그린 '균와아집도' 이다. "책상에 기대어 거문고를 타는 사람은 표암(강세황)이다. 곁에 앉은 아이는 김덕형이다. 담뱃대를 물고 곁에 앉은 사람은 현재(심사정)이다. 치건을 쓰고 바둑을 두는 사람은 호생관(최북)이다. … 퉁소를 부는 사람은 홍도(김홍도)이다."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 위쪽 오른 편에 쓰여 진 발문의 일부이다. '균와'는 어디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안산 근처로 추정된다. 발문에 따르면 강세황은 그림의 위치를 배열했고, 최북은 색을 입혔고 김홍도는 인물을, 심사정은 소나무와 돌을 그렸다. 발문은 조선후기 학자이자 화가였던 허필이 썼다.
강세황 초상화는 여러 점 있다. 70세(1782년) 강세황이 스스로 그린 자화상과 71세(1783년) 기로소(耆老所) 입소를 기념하여 정조의 명으로 이명기(李命基, 1757~?)가 그린 초상 등이 대표적이다. 초상화가 크게 유행하던 조선시대에도 화가가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자화상은 흔치 않았다. 그런 이유로 "몸은 조정에 있지만 마음은 산림에 있다", "가슴에는 만 권의 책을 간직하고, 필력은 오악(五嶽)을 흔든다"고 자찬(自讚)까지 곁들인 강세황 자화상(보물 590-1호)은 그의 강한 자의식을 보여준다. 또한 당시 이명기와 더불어 초상화에 있어서는 최고였던 궁중화원 한종유(韓宗裕, 1737~?)가 부채에 그려준 강세황 69세 초상은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일반에 공개되는 작품이다. 전시회 소개에 따르면 '야외에 한가롭게 앉아있는 자유로운 모습으로 그려진 점에서도 조선시대 초상화 가운데 흔치 않은 예이며, 강세황이 손자 강이대(姜彝大) 1761~1834)에게 준 것이라 스스로 적은 글을 통해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의 각별한 사연을 알 수 있다.' 라고 전한다.
그 예술혼은 후대 까지 이어졌다. 손자 강이오(1788~?)와 강이천(?~1801), 증손자 강진(1807~1858)에 이르기 까지 화업이 이어졌다. 강이오의 송하망폭도와 강안주유도, 강완의 묵국도, 강이천의 묵죽도 등이 함께 전시 되었다.
표암 강세황은 18세기 후반을 살면서 시 · 서 · 화에 능한 화가이면서 김홍도와 신위(申緯, 1769~1847, 문신, 시인, 서화가)등을 가르친 교육자이며, 조선을 대표하는 서화가이고, 작품에 수많은 화평을 남긴 평론가였다. 찌는 듯한 여름, 표암을 만나고 돌아가는 발길은 너무도 홀연한 기분이었다. 교통 사정으로 호남에 내려오는 서울 화가들이 많지 않았지만 이 분이 내려올 계기에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간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파장을 보였을 것이다. 우리고장 부안 개암사 뒷산의 아름다움을 만나고 그 예술에 대한 노력과 삶이 여름의 더위가 녹아드는 듯하다. ▣
수록 도판






- 판독 참고: '복선 장군'은 지면 표기 그대로이며 '복신(福信) 장군'의 오식으로 보입니다.
- 판독 참고: '강이대(姜彝大)', '현자의 구별 없이' 등은 지면 표기 그대로이며 활자가 흐려 판독이 불확실합니다.
원 게재: 미술관을 찾아서 / 회화지 20호(2013) 60–65쪽 · 원본 PDF 60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