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검.에게 영원한 생명을! — 데미안 허스트(1965~)에 대하여
글 김영숙(예원예술대학교 교양학부)

만약 우리가 영원히 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영원히 산다는 얘기는 바로 죽음이 없다는 얘기다. 만약에 죽음이 없다면?
만약에 그렇다면 산다는 것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우선 매일 매일, 하루 하루의 삶은 그다지 의미가 없게 된다. 하루 또 하루가 무한정 대기하고 있기 때문에 매일 매일 열심히 살아야 할 하등의 의미가 영원히 증발된다.
뿐만 아니다. 끝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부나 권력 역시 영원히 지속되어야 하리라.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우리의 삶을 진창 속에 집어넣는 인간의 탐욕은 결코 그 끝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죽음이 없으므로 어떤 형태의 범죄도 거의 다 가능하다. 감옥소에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되는 일이므로. 어차피 죽음이라는 죄과를 씌울 수 없어, 사형을 시킬 수 없게 될 테니까. 감옥소에 들어가 봤자, 끝도 없는 바다에서 퍼낸 한 숟가락의 바닷물보다 못할 것이니까.
요약하자면 죽음이 없다면 삶도 존재할 수 없다. 윤리와 덕도 그 의미를 상실한다. 결국 죽음은 부정할 수 없이 명확한 삶의 뒷면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삶만을 바라볼 뿐, 생명만을 찬양할 뿐, 죽음을 직시하지 않는다. 아니 죽음을 혐오하고 죽음에서 도망치려한다.
영원한 저 세상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이 지배하는 현 시대에 데미안 허스트는 바로 죽음의 문제를 핵심 테마로 잡은 생존해 있는 예술가이다. 역사상 어떤 미술도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죽음을 분석하고, 탐구하지 않았다. 이집트의 미라는 저 세상에서 살아갈, 삶의 연장으로서 시체를 다루었을 뿐, 죽음을 죽음 그 자체로 다루지 않았다. 자동차 정비사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생명과 죽음에 관심이 많아 병리학, 법의학 서적을 보며 해부도를 즐겨 그린 데미안 허스트는 적극적으로 죽음을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우리의 의식 속에 삶을 끌어 들이고 죽음과 삶을 함께 소구한다. 그는 예를 들어 '살아있는 누군가의 마음속의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1991)에서처럼 죽었거나 해부된 생명체(상어, 소, 양 등)를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담가 보관하여 작품으로 표현한다. 또는 '마켓으로 간 돼지, 집에 있는 돼지'(2008)나, '죽음'(1996)에서처럼 정지된, 혹은 토막난, 혹은 갈라진 시체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마음대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유기적으로 연결된, 좌.우 붙어있는 통합된 생명체가 누리는 생명의 환희 내지 살아있는 즐거움을 반어적인 방법을 통해 상상력 속에서 감각적으로 소환한다.
눈에 보이는 세계만을 인정하는, 즉 내세를 믿지 않는 데미안 허스트에게 있어서 삶은 다른 생명체들의 죽음과의 긴밀한, 영속적인 순환 과정의 한 고리로 존재한다. 다시 말해 400마리 가량의 나비가 음식을 먹고 날다가 알을 낳고, 부화하고, 죽어가는 순환과정을 보여주는 '사랑의 안과 밖'(1991)에서처럼 삶은 죽음과의 영원한 교체, 및 순환의 한 양상으로 존재한다.
움직이지 못하는 정지된 죽음과 가장 대비되는 삶의 환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나비의 날개짓이리라. 기독교적 부활을 믿지 않는 데미안 허스트의 '천국으로 가는 문'(2007)은 더 이상 성부, 성자, 성인들의 모습으로 이루어진 중세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아닌, 화려한 문양의 날개를 펼쳐 보이는, 셀 수 없이 많은 죽은 나비들의 문양으로 채색된다.
주검에게 생명의 이면으로서의 정당한 대우를 부여하고자 한 데미안 허스트. 그는 해골에 다이아몬드 8500개를 박아 넣은 '신의 사랑을 위하여'(2007)라는 작품을 통해 더욱 더 명성을 쌓고, 더불어 현존하는 최고 자산을 가진 예술가(자산이 약 1조 600억 원으로 추정됨)로 등극했다. 그의 이와 같은 불세출의 성공은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죽음을 통해 삶의 본질을 더욱 더 통렬히 깨닫고 강렬하게 느낀 예술가다운, 현실적인, 너무나 현실적인 이력이 아닌가 싶다.



원 게재: 수필 / 회화지 21호(2014) 30–31쪽 · 원본 PDF 30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