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페어의 허와 실
글 이철량(회원, 전북대학교 예술대학 교수)
(리드문) 정말 명품은 고객을 의식하지 않는다. 사실 고객이 명품을 의식한다. 정말 좋은 것은 시장에 나가지 않는다. 고객이 스스로 찾아온다. 이번에는 어떤 명품이 나타날까를 고대하는 고객을 의식하는 작가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명품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오늘날 미술활동은 작가, 감상자 그리고 화상(갤러리)이 삼발이처럼 구성되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20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형태는 미술이 상품화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급속히 형성되었다고 본다. 물론 미술이 상품으로서 기능을 하기 시작한 것은 실상 오래전의 일이다. 그러나 지난 100여년의 역사를 통해 보면 미술의 여정은 상품화의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그만큼 미술작품이 상품으로 인정되고 있다는 말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술작품이 일상의 상업적 활동으로서 상품이어야 하는가는 실상 지금도 논란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논의는 어쩌면 끝나지 않을 명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미술의 본래의 기능과 가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미술작품이 상품으로서 거래가 이루어지는 상당한 위치에 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사실 이 점은 작가들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 미술시장이다. 미술작품이 각종 일상용품을 펼쳐놓고 파는 시장과 같은 형식의 미술시장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실상 그리 많지 않다. 미술을 제법 접하고 있다는 사람들도 미술시장이라는 말은 낯설은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아직도 미술작품이 떳떳하게 내놓고 시장에서처럼 흥정하고 거래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데 인색하다는 것이다. 작품은 어디까지나 매우 고상하고 거룩한 것이라는 믿음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예술은 그만큼 접근하기 어려운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더라도 지금은 미술시장이라는 말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 미술시장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아마도 갓 20여년의 매우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도 미술시장을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메카니즘으로 자리 잡았다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사실 작가들 스스로 이 도가니에 어느새 빠져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스스로도 깜짝 놀라울 만큼 어느새 그 자리에 자신이 앉아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시장이란 이처럼 무서운 것이다. 하기야 작가라고 한들 별 수가 없다. 예술을 한답시고 이슬을 먹고 살 수는 없으니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시장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다. 사실 이러한 초라한 모습은 스스로 작가인척 하는 사람들이 더 그렇다. 그들의 변명은 한결같다. 〈작가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래서 시장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미술시장은 그래서 생겨났다. 아트페어는 그런 곳이다. 아트페어는 절대로 고상한 곳이 아니다. 작품이 흥정되고 예쁘게 포장되어 거실로 배달되는 그런 곳이다. 그래서 아트페어는 절대로 예술이 있는 곳이 아니다. 예술이 상품화되어 포장되는 곳이 아트페어다. 그래서 아트페어는 앞으로 지금보다 더욱 확대되어질 것이다.
지금도 아트페어는 곳곳에서 넘쳐난다. 아마 세계적으로 수 만개는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아트페어를 하지 않은 지역은 드물다고 봐야한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나라에도 아트페어를 구성할 화상이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아트페어의 주인공은 화상이다. 아트페어의 주인공은 작가가 아니다. 그래서 작품도 주인공이 아니다. 아트페어는 화상들의 장터이다. 말하자면 화상들이 돈을 내고 장터를 만드는 곳이 아트페어다. 그러니 그들의 잔치마당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아트페어는 화상들이 돈을 내고 장사를 하는 곳이다. 작가들이 고상하게 작품을 전시하는 그런 낭만적인 공간이 아니다. 그래서 거래가 이루어져야 한다. 거래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아트페어는 존재의미가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아트페어에는 열기가 있다. 그래서 재미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모든 아트페어는 화상들이 참가비를 지불하고 부스(전시공간)를 산다. 그래서 부스의 위치에 많은 신경을 쓰게 된다. 어떻든 화상들은 돈을 들여 가게를 열었으니 어떻게 하든 거래를 성사시켜야 한다. 말하자면 화상들도 이슬을 먹고 사는 족속들이 아니니까. 그래서 화상들도 장사가 잘된다는 아트페어를 골라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장사가 잘 되는 아트페어는 가게비가 많이 비싸다. 점포하나 빌리는 값이 천차만별이어서 화상들도 아트페어에 참가하는데 많은 노력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실상 아트페어에서 돈을 벌었다는 화상은 별로 없다는 것은 정설이다. 그렇더라도 화상들은 아트페어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고객들의 입맛이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즉 조그마한 화랑 전시에서 그림을 사는 것보다 엄청나게 많은 작품들을 골라보는 재미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림을 사려는 고객들이 아트페어로 몰리는 이유이다. 그래서 어쩌면 화상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아트페어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제 아트페어는 화상들의 위상을 결정짓는 구조로 발전하고 말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느 아트페어에 참가했는가는 화상의 높낮이를 결정한다. 그래서 화상들도 힘들다. 그런데 사실 화상들이 힘든 것이 아니다. 정작 죽어나는 것은 작가들이라는 것이다. 화상들이 아트페어에 참가하는 비용을 대부분 작가들이 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참가 부스비를 작가들이 부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화상들의 여비까지 그 속에 포함된다는 사실은 참 슬픈 일이다. 물론 100%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시장속이라 해도 명분을 갖고 있는 사람은 한 둘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 글이 그분들에게는 누가되지 않기를 빈다. 대개 그러한 명분을 지키고 있는 아트페어는 실상 참가비가 정말 비싸다. 참으로 역설이 아닐 수 없지만 참가비가 적어도 수 만불 되는 외국의 저명 아트페어는 명분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역시 돈이 있는 화상들이 노는 장터는 다르다. 자본의 위력은 그래서 참 치사하기도 하다.
그런데 더러 자본이 넉넉한 작가들이 있다. 그들은 통 크게 화상을 사기도 한다. 말하자면 부스비를 작가 자신이 전부 지불하는 것이다. 거꾸로 화상이 팔려가는 꼴이지만 화상은 밑지는 장사가 아니다. 화상은 장사하는 사람이지 예술을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은 어디나 그야말로 쩐의 전쟁이다. 거기서 예술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은 허망한 것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그래도 더러 작가들은(본인이 작가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아트페어에 참가하는 것을 명예로 삼으려 한다. 마치 초대받은 손님인 척 한다.
가끔 대학생들마저도 아트페어에 참가하는 것을 선망의 눈으로 쳐다보는 경우가 있다. 어쩌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다수의 젊은이들의 모습일 수도 있다. 사실 당연한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만 좀 슬픈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 소는 누가 키우나?"라고 묻고 싶은 심정이 들 때가 있다. 그러다가도 "그럼 밥은 누가 먹여주나?"하고 질문하면 할 말은 없을 것이 분명한데도 서글픈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렇더라도 아트페어는 절대로 고상한 장터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세상에 고상한 시장은 없다고 믿는다. 아무리 명품을 파는 곳이라도 시장은 고객의 눈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그림을 팔겠다고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그림만을 그리겠다고 하는 작가는 틀림없이 멍텅구리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살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려 할 수 있는가. 그것이 시장의 메카니즘이다. 그러나 시장에도 역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정말 명품은 고객을 의식하지 않는다. 사실 고객이 명품을 의식한다. 정말 좋은 것은 시장에 나가지 않는다. 고객이 스스로 찾아온다. 이번에는 어떤 명품이 나타날까를 고대하는 고객을 의식하는 작가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명품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원 게재: 회화이론 / 회화지 21호(2014) 40–43쪽 · 원본 PDF 40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