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전만 해도 옥구군이었던 군산을 찾아서...
삼월 어느 토요일 오후 연구회 회원 20여명은 군산으로 갔다. 20여 년 전만 해도 옥구군이었던 곳이다. 봄인 것 같은데 아직 차가운 기가 남아 있는 날씨이다. 밤에는 영하로 내려가는 꽃샘바람 심한 편이다.
글·사진 이승훈 (회원, 군산대성중학교)
[사진 캡션] 장항에서 바라본 안개 낀 하구둑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발산초등학교 교정 뒤쪽에 도착했다. 석탑과 석등이 나타났다. 학교에 무슨 탑이랴. 절간도 아니고 선원도 아니 곳에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 석등은 원래 전북 완주군 고산면 봉림사지에 세워져 있던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이 자리는 일본인 시마타니 야소야 라는 농장주가 강탈한 자리로 도곡농장 정원이 있던 곳이다.
먼저 이 석등에 대하여 알아보면 불을 켜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이를 받쳐주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의 가운데 기둥은 둥글고 표면에 구름 속을 유영하는 용의 모습을 새겼는데, 이러한 형태는 우리나라에서는 하나 밖에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화사석은 4각의 네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8각을 이루게 하였으며, 각 면에는 4개의 창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번갈아 두었다. 사천왕은 불교의 법을 지키는 신으로, 화사석에 새겨 놓아 등불을 보호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붕돌은 8각으로 각 모서리선이 뚜렷하며, 곡선을 그리는 처마는 여덟 귀퉁이에서 치켜 올림이 시원하다. 꼭대기에는 연꽃무늬가 조각된 머리장식 받침대를 마련해 놓았으나, 머리장식은 남아있지 않다. 연꽃 조각 수법이 매우 잘 만들어 있어 감탄을 나게 한다.
이 번 답사에서 찾은 것이 하나 있다. 돌의 재질 등으로 보아 각각 다른 부재가 하나의 석등을 이루고 있는데 원형이 아님을 알게 해주었다. 하지만 부재 하나 하나가 다 훌륭한 가치가 있어 보물로 인정하고 있는 듯하였다. 이 석등은 보물 234호이다.
이곳에 3층 콘크리트 건물인 시마타니 금고가 있다. 석등에서 서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이 안에 그동안 수집한 그림, 도자기 같은 골동품을 보관하였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텅 빈 곳이다.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들이 우익 인사를 가둬두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발산리 금고와 각종 석조물, 발산리 석등(보물 제234호), 발산리 5층 석탑(보물 제276호), 발산리 6각 부도(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 185호) 등이 그대로 남아서 아픈 과거사를 보여주고 있다.
다음은 발산 초등학교에서 승용차로 약 5분 거리도 안 되는 곳에 충의사라는 사당을 가게 되었다. 반월산 기슭에 있는 데 활을 쏘는 궁터가 산 너머에 있으며 유물전시관에는 영정과 삼인보검이 전시 되어 있다고 한다. 관리 하시는 분이 없는 것 같아서 직접 보지는 못했다. 충의사는 조선 선조 때 무신 최호 장군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영웅 최호장군이었다. 조선 중종 27년 경주최씨 최치원의 15대손 최한정의 4남중 막내로 태어나 자란 곳이 지금 이곳 전북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이다. 최호장군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북방 요충지를 따라다니며 병법을 익혔다고 한다.
장군은 선조 29년(1596년)에 일어난 이몽학의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청난공신 2등에 올랐으며 정유재란(1597년) 당시 칠천량 해전에서 왜구를 무찌르다가 전사하였다. 칠천량 해전은 원균이 이순신 대신 나아가 사우다가 패전한 곳이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으며 이순신 장군이 억울하게 투옥 되었을 때 9살이 많은 최호장군은 62세의 나이로 칠전량 해전에서 전사 하였다. 구 사당은 후손이 영조 5년에 세웠다. 최호의 아버지 최한정과 최호 아들과 손자인 최몽란, 최효설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부근에 묘가 있다. 묘 앞의 비석은 오석(청석)으로 벼루를 제작할 때 사용하는 돌이다. 쇠끝으로 그으면 파지는 돌이다. 이 비석 옆쪽은 글자 등을 지운 흔적이 있었다.
다음은 채원병 가옥으로 갔다. 5분 거리에 있었다. 채원병 가옥은 만석지기였던 선조의 기와집이다. 현재 'H' 건설에서 퇴직하시고 살고 있는 이분이 채원병이다.
회장은 여기를 몇 번 왔었는데 한 번도 주인을 만난 적이 없는데 이번에 만나게 되어 반갑기 이를 데 없다고 통성명도 하고 명함도 교환하는 것 같았다. 이곳에 주인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보존이 잘 될 것 같아서이다.
고봉산 자락에 있으며 임피와 성산으로 이어지는 도로 가까이에 있다. 발산리 석등 쪽에서 와도 길을 아시는 분은 5분 거리 밖에 안도는 거리이다. 그러나 그 쪽에서 오면 꽤 길이 구불 하여 찾기가 힘들다.
고봉산은 지네 형상을 이루는 곳으로 터를 잡아 건물이 들어섰는데 99칸 집이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 사당만 남아 있다. 부엌, 대청, 큰방, 건너 방으로 구성된 안채의 건립은 철종11년(1860년)이며, 사당은 대한제국 광무 5년(1901)에 지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가 너무 가까워 경계를 짓기 위하여 연산홍 나무를 심어 화단을 조성하였다고 전한다. 지금은 연산홍과 사철나무만 남아 있다. 사랑채 밖으로는 수석과 소나무로 조경하여 운치가 있다. 주택의 소목으로 봐서는 조선 후기 상류층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러나 전북 민속자료 24호로 지정은 되었지만 보수하면서 날림으로 하여 원형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 집은 북향을 하고 있는데 북향집은 기단 위에 기단을 올려 한옥을 짓는다고 한다.
객사는 남향이었다고 한다. 객사를 먼저 짓고 안채를 지었으며 안채 기둥은 둥근 기둥을 썼다. 원래 왕의 연고 없이 기둥을 둥근 것 사용하면 안 되는데 어떤 연유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인조 때 채씨 문중 따님이 어떤 연유가 있었을 거라 생각하고 있단다.
지금 안채가 'ㄷ'자로 된 곳 중 서쪽에 솟을 대문자리라고 한다. 서쪽에 은행나무가 있는데 그곳이 대문 자리라고 한다. 방문 기념사진을 촬영한 곳이다. 남쪽에 장독대와 우물터가 있다.
조부가 막강한 부를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부인도 7분이었고 본부인이 혼례준비를 하여 주었다고 한다. 별장이 따로 있어서 거기서 거주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한량으로 살았으며 전쟁과 혼란이 있을 때 등은 곡식을 나누어 주고 어려운 사람을 돌보았다고 한다. 그러니 집안을 보존 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혼례 때는 사모관대 중 사모에서 날개 빗 하나를 빼고 한쪽에 날개만 있는 사모를 쓰고 혼례를 치루는 것이었으며 조부님이 돌아가실 때는 7일장을 하였다고 한다.
이 집에는 약방과 방앗간이 있어서 약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부잣집은 보약 등을 항시 구비하였으니 옛날 말에 기침하면 '채오덕 한 테 가 봐라'는 말이 성산 쪽에서 있는 말이라고 한다. 이점은 부잣집에는 약이 늘 있었다는 것이리라. 아무튼 작은 기와집이 소나무 와 대나무가 잘 우거져 작은 기쁨을 주기에 좋다. 마침 대문 밖으로 동백이 피고 있었다.
서해와 금강, 채만식 소설 탁류, 일제 수탈 현장이 남은 도시로써 지금 보이는 것은 하나의 관광거리로 인식 되었다. 그 가운데 있는 근대역사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금강 하구에 있다. 째보선창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지금은 개항 100주년 기념물이 있는 진포해양공원이다. 주변에는 옛군산세관 건물과 일본식 제18은행, 옛조선은행, 부잔교 등이 있다. 박물관 주변은 옛날 농기구들이 놓여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등대가 왼쪽으로 서있고 오른쪽은 안내 데스크가 있다.
1층은 해양 물류 역사관으로, 2층으로 올라가면 옥구농민항일항쟁 기념 전시실이 있다. 옥구농민항일항쟁은 일본의 대규모 농장이었던 이엽사 농장에서 소작농으로 일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은 곡식을 일본 사람들이 남김없이 모조리 가져가 이에 항거한 운동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판결도 항일항쟁을 펼친 한국사람 34명이 모두 유죄판결을 받아 옥구 사람들이 울분을 토했다. 또한 한쪽은 부잔교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쌀을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든 다리이다. 간만의 차이가 커서 배를 정박하고 쌀을 운반하기 어렵기 때문에 생긴 다리이다. 3층에는 근대 생활관이 있는데, 옛날 군산의 모습을 세트로 구성하였다.
월명산에 올라갔다. 채만식 소설가 문학비가 세워져있다. 멀리 배들이 떠나가고 장항이 아스라이 보였다.
동국사로 향했다. 동국사 가는 길목엔 군산 출신 고은 시인의 시들이 걸려 있었다. 문화예술을 작가와 시민을 이어주는 곳이 있다. 여인숙이다. 이름이 잠자는 곳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작가들이 완래하면서 토론과 전시들이 있는 곳이다. 이곳을 지나서 가면 동국사가 나온다. 동국사는 일제 때 세워진 절로 국내 유일한 일본 식 절이다. 동국사 사찰 안내에 따르면, '본래 이름은 금강선사이다. 금강선사는 1909년 일본인 승려 내전불관이 군산에 포교소를 개설하면서 창건한 조동종 절이다. 대한제국(1897-1910)과 일제 식민지시대(1910년 8월 29일 ~ 1945년 8월 15일)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라고 했다. 이 절 안에서는 일본군이 조선인을 폭행 하던 총, 칼, 무기 등과 신사 사진, 위안부와 관련한 자료와 참혹상을 보여주는 유물이 전시 되어 있다. 이 절의 복장 유물은 373점이 된다. 보물로 지정 되었으며 군산 근대 역사박물관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과 히로쓰 가옥에 들렸다. 고우당 게스트하우스에 나와 이성당 쪽으로 향했다. 이성당 빵 집이 유명한데 줄을 서서 기다리는 줄이 길다.
다시 채만식 문학관으로 향했다. 백릉 채만식은 1937년에 조선일보에 소설 탁류를 연재하여 큰 반향을 불러 모았다고 한다. 서천으로 가는 길목에 금강하구둑이 있다. 이 금강 남쪽에 문학관이 있다. 조용하다 못해 쓸쓸하다. 아담한 배 모양으로 들어서 있다. 그의 웃는 모습이 소설마냥 해학적이다.
장편 소설로 사회의 어두운 세태를 그렸다. 중간에 백제의 흥망을 더듬는다고 한 것은 나라가 망한 사정을 되새기게 한다. 긍정적 인물들의 수난을 그리는 이 소설에서 당대의 어두운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친일과 반일의 기로에 서있는 작가이기도 하지만 탁류는 한 많은 역동의 시대에 중심에 있는 작품으로 우리가 알아야할 작품이다. 그의 부친은 상당한 부농이었으나 1905년을 전후해 일제의 조선토지수탈 계략에 의해 경제적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그의 집 가까이에 이엽사 농장이라는 대일본지주가 살았다. 이엽사 농장은 전주. 익산. 옥구에 논 1,000정보, 밭 200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농민 1,700명을 거느린 대 농장이었고 본거지가 군산시 서수였다. 탁류를 쓴 채만식의 고향집은 서수와 임피의 경계 지역으로 한 마을이나 같았다. 이엽사 농장 주인은 니이가다현 사람들이었고 주임은 사이토오 이었는데, 일본이 밝힌 전국 평균 소작료가 46.7~42.4%였는데 75%의 소작료를 요구하는 악질 농장이었다. 동아일보를 보면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전반까지 전북에서는 16여건의 소작쟁의가 있었고 군산에서는 이엽사 소작쟁의 이외에도 2건 이상의 큰 소작쟁의가 있었다고 한다.
서수에서 농민들을 옥구농민조합 아래 서수농민조합을 1927년 8월 4일 만들었다. 이어 8월 5일 서수청년회가 만들어지고 두 단체는 8월 19일 '농민문제'강연회를 하다가 경찰이 가로막자 '서수농민조합 만세', '서수청년회 만세', '세계 무산자 만세'를 외쳤다니 서수 이엽사 소작쟁의는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소설 탁류는 탄생했다. 이 작품에서 정주사, 고태수, 박제호, 장형보는 모두 속물화하고 타락한 1930년대 한국사회의 인간상들이다. 이들은 초봉을 이용하고 탐하며 짓밟는다. 그리고 효용가치가 없다 싶으면 여지없이 그녀를 버린다. 채만식은 소설에서 이 속물들을 그만의 장기인 풍자로써 꼬집는다. 순결한 여인 초봉을 농락하는 이 사회가 채만식이 말하고자하는 탁류이다.
그리고 임피역으로 왔다. 임피역은 지금은 모든 기차가 스쳐가는 곳으로 간이역도 아니다. 조금은 꾸며 놓아서 쉬었다가 갈 곳은 된다. 동상 군들을 제법 만들어 놓기도 했다. 쌀 수탈을 위하 만들어진 역이 지금은 역사의 뒤안으로 들어서있다.
[사진 캡션] 1) 발산리 석등 2) 시마타니 금고 3) 충의사 4) 채원병 가옥 입구 5) 채원병 가옥 안뜰 6) 고우당 7) 히로쓰 일본식 가옥 8) 근대 역사 박물관 9) 채만식 문학관 10) 동국사 전경 11) 동국사 전시품 12) 백릉 문학관 13) 백릉 채만식 문학비 14) 임피역과 어린이 15) 임피역
원 게재: 여행기(군산을 찾아서) / 회화지 21호(2014) 56–61쪽 · 원본 PDF 56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