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들
빈 들
고 재 종
초겨울 볕 여린 들에 선다 이제 그 가슴에 비울 것 다 비우고 저 홀로 은은한 들판에 선다 이 논 저 논의 짚벼눌만은 저리 단정한데 저기 용수배미 갈다 어제 낮참 뒷산 양지뜸에 묻힌 남평 영감 생각난다 흙에서 왔다 흙에서 살다 올 거둔 햅쌀밥 먹고 흙으로 돌아간 그 영감 성성하던 백발이 저기 돈들막의 갈꽃으로 일렁인다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에 마른 풀잎이 날고 지풀이 날고 논두렁의 늦은 들국 몇 송이가 눈물겹다 우리네 힘든 일엔 때가 있고 우리네 독새풀 같은 삶도 때 되면 필경 허허로운 평야로 순명 다하는 것 곧 이어 저 들에 보리씨 싹터 올지니 내일은 저 산밑 찬샘논 가는 만근이 그간 서른도록 장가 못 가 안달이더니 남원 처녀 데려와 새살림 차린단다 그리움 안고 지고 초겨울 빈 들에 서니 흙으로 가고 오는 사람들의 역사가 정정한 눈물로 그리워 보이고 저다지 넉넉 평평한 들 아니면 결코 우리네 삶 뜻도 없을 진실이 보인다 그 진실이 오래오래 빈 들에 서게 한다.
고재종
실천문학 신작시집 '시여 무기여'로 등단했다. 첫 시집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를 실천문학사에서 발간했다. 1993년 시집 '사람의 등불'로 제11회 '신동엽창작상'을, 1997년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으로 '시와시학상'을, 2001년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로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와 사람', '문학들' 편집주간과 (사)한국작가회의 광주전남지회장을 역임했다.
원 게재: — / 회화지 22호(2015) 2쪽 · 원본 PDF 2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