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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프리미티브(원시예술) - 박방영(朴芳永)

야기하시 요시오-(八木橋善雄) (갤러리-BIKARA(일본) 아트 디렉터, 코리안 아트연구가)

갤러리-BIKARA(일본) 아트 디렉터, 코리안 아트연구가 야기하시 요시오-(八木橋善雄)

● 프롤로그 - 시작의 미술

약1만8천년전의 라스코(동굴)나 알타미라의 동굴벽화는 그것이 가령 사진이었을지라도 관람하는 사람의 마음에 신선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이 벽화는 그것을 그린 후기 구석기시대의 크로마뇽인들이 높은 지성과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증명하고 있다.그뿐만이 아니다.예술이라고 하는 것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현대인에게 (거칠게)들이대어 온다.동굴의 벽에 생생하게 그려진 동물들은 원초의 에너지에 차고 넘치고 있다.그것은 우리들보다도 더욱더 1만년전후의 미래의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떨리게하는 것에 틀림없다.

현대의 인류는 과학기술technology 를급격하게 발달시켰다.다만 그 테크놀로지 technology 의 발달에 영성의 성장이 동반하고 있다고는 한정 지을 수 없다.역사상 끊이지 않는 전쟁이나 현대사회의 암부에 눈을 향해보면 그러한 의문이 끓어올라온다. 혹시 멀리 높은 테크놀로지를 가지는 미래적 존재가 현대인의 테크놀로지를 바라봤을 때, 그것은 현대인으로부터 바라봤던 석기시대에 버금갈 것이다. 한편 [예술]은 어떤 동굴벽화처럼 시공을 넘어서 빛을 바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술은 순수한 영성의 산물이기때문이다. 예술은 번쩍이는 영성의 빛인 것이다. 우리들이 미술작품으로부터 받는 감동은 그것을관람하는 인간의 영성과 작품에 내재해 있는 영성과의 공명(울림)에 의해 가져와진다. 결코 지적인 작업이 앞장서는 것은 아니다. 영성이라는 것은 하나로 의식의 깊은 곳에서 진동하는 파동-에너지-와 같은 것이다.

라스코(동굴)이나 알타미라의 벽화는 그것을 그림에 있어서 예술적인 기쁨을 추구하는 것과 동시에 수렵의 성공을 기원하는 제사적인 동기가 있었다고 상상되어진다. 순수한 마음의 발로로서 생겨난 회화(그림)는 원초적(primitive)또한 무속(무술;샤머니즘)(shamanism)적인 에너지에 충만해있다. 그러한 미술이야말로 우리들의 심정의 깊은 곳에 잠자고 있는 것을 자극하여 순화에로 인도하여 커다란 기쁨을 가져다준다. 그런데 여기서는 예술작품에 내재되어있는 에너지라고 하는 내적인 시점으로부터 박방영 예술을 응시하여 그 진수(참뜻)를 탐구해 보고자 한다.

● 코리안프리미티브(원시예술)

한국의 조선시대(1392년~1910년)에 특이한 미술이 있었다. [조선민화]이다. 민화는 꽃.새.산수.호랑이 등의 다양한 재료를 각각 양식화하여 그것을 장식하는 사람들의 리퀘스트(요구)에 응하여 [피사초복(사악한 것을 쫓고 행운을 불러들이는)]의 의미를 심어서 그렸다. 왕후나 귀족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넓게 친숙해졌었던 이 민화는 궁정화가나 프로화가가 제작한 것도 있지만 오히려 방랑화가인 초보화가들에 의해서도 양산되었다. 화법에 붙잡혀 있지 않고 자유롭게 그린 초보화가의 민화는 치졸(서두름)하지만 프리미티브(원시예술)한 맛이 있다. 그리고 관람하는 사람의 내면에 감춰져있는 원초의 피를 끓어오르게하는 무속(무술;샤머니즘)(shamanism)적인 힘이 있다. 조형적으로는 역(반대)원근이나 여러 시점으로부터 그린 것도 있어 실제로 유니크하고 재미있다. 그것은 사고로부터 가져다주는 조형이 아니고 인간의 의식을 초월하여 갑자기 이 세상에 출현되었나라는 참신함(new)인 것이다. 당시 민화는 인테리어로서의 용도뿐만 아니라 그림에 숨겨진 길상(행복.기쁨)을 구하는 소박한 기원이 있었다. 민화에 무속(무술;샤머니즘)(shamanism)적인 에너지가 내재하게 되면 그것이 요인이 아닌가라고생각되어진다.

아프리카 조각은 피카소의 큐비즘이나 브르통이 주창한 쉬르레알리슴(초현실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마찬가지로 민화도 현대의 한국의 화가들에게 조형적인 영향을 부여했다. 다만 박방영의 경우 민화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민화에 내포되어있는 원초적 무속(무술;샤머니즘)(shamanism)적인 파동이 절로 그의 작품에도 살아 숨쉬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낫다. 박방영의 작품은 서양 회화(그림)와 동양의 [글씨]이라는 아카데믹한 미술의 토대이면서도 민화에서 통하는 프리미티브(원시예술)한맛이 있다.

그것은 주로 민족적인 피로부터 용솟음치는 충동에 유래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바꿔 말하자면

박방영 자신이 사먼적(주술적)인 소양이 있어서 스스로 없는 것으로 하고 작품을 창출해낼 때 자신도모르게 그러한 에너지를 자신의 피 속에서 용솟음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 동양화의 기본 [글씨]

박방영은 대학에서는 추상의 유채화를 그렸고 대학원에서는 [난지도;nanjido]라고 하는 현대 아트의 그룹을 결성하여 인스타레이션 작품에 도전했다.그러나 박방영 예술의 원점은 그가 어릴 때부터 천재성을 발휘했던 [글씨]에 있다.

중국으로부터 한국 그리고 일본 에까지 전해졌던 수묵화를 시작으로 하는 전통 그림은 [선;line]의 예술이라고 말해진다. 동양의 그림은 부드러운 모필과 묵을 사용하여 종이 위에 자물적 그림의 선을 그려왔다. 모필에서 그려진 선은 그것을 조절하는 작가의 기술이나 정신성을 여실히 반영한다. 수묵화에 매료된 피카소는 동양의 모필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이런 모필의 운필법의 기본은 [글씨]에 있고 그것은 모든 동양전통 그림의 기본이기도 한다. 그 선은 그냥 평면적인 띠(줄)가 아니고 구체(원형체)로부터원통으로 이어지는 입체적인 요소를 가진다. 따라서 동양화의 선묘(디자인)에는 부드러운 면서도 힘이 있는 존재감이 있고 뒤에 이야기 하는 [기운생동]을 할 수 있다. 박방영은 그러한 글씨의 운필법을 완벽하게 마스터하여 숙련한 데다가 그 기법에 잡히지 않고 해방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가 그림을 그릴 때는 대담한 선으로부터 섬세한 선까지 자유롭게 콘트롤하여 그릴 수 있지만 미로(현대 예스파니아의 화가) 등의 쉬르레알리스트(초현실주의자)들이 꾀하는 무의식에 인도되어진 오토마티스무적(자동기술)인 선묘(디자인)도 작품의 속에서 나타난다. 오토마티스무적(자동기술)인 선묘(디자인)는 치졸(조잡)한 기술로 그려진 민화에도 보여졌으나 민화의 대극(서로 다른 끝)에 있는 정통화의 수묵화나 문인화가 요구한 높은 정신성과 무위의 경지로부터도 생겨난다. [순진함]과 [숭고함]과는 통하는 데가 있을 것이다.

박방영 작품 (문자·동식물 이미지 화면, 지면 캡션 없음)
박방영 작품 (문자·동식물 이미지 화면, 지면 캡션 없음)

● [기운생동]을 창출하는 박방영의 선(line)

자고이래 동양의 정통화인 수묵화나 글씨를 중요시 한 것은 중국에서 5세기에 謝赫(사혁)이 설명한 [그림의 육법]에 나오는 [기운생동]이다. 극단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기운생동이 없는 수묵화나 글씨는 그냥 아름다운 그림이나 기호에 불과하다. [기운생동]의 의미는 작품 속에 천지 즉 자연.만물 우주의 에너지가 약동하는 모양으로 강하게 말할 수밖에 없을까? 기운생동을 작품에 표현하는 것에 대하여는 유마(분파)에 의한 사고방식에 차이가 있으나 작가의 정신성과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어진다. 고도한 기술로 표현되는 [기운생동]은 천지에 충만한 에너지인데 대하여 정반대의 치졸(미숙)하여 [프리미티브]한 미술에 있는 것은 인간의 피에 용솟음치는 원시적 에너지라고 하는 다름이 있지만, 영적 감동을 불러온다는 의미에서는 이 두 가지 에너지는 완전히 같은 것이 아닌 것이라고 하여도 동질성이 있는 것처럼 나에게는 생각되어진다.

조선시대 말기의 한국에 추사.김정희라고 하는 작가가 있었는데 그는 예서에 가까운 추사체라고 하는 독특한 서체를 완성시켜 후세에 영향을 끼쳤다. 추사의 글씨는 모필을 마치 조각도로 바꿔서 쓰고 있는 것처럼 선묘(디자인)의 힘의 강함과 예리함이 있어 보는 사람에게 강한 임펙트를 부여한다. 그것은 확실히 기운생동하는 글씨이다. 한편 현대의 작가들로부터 높게 평가받는 박방영의 글씨도 힘이 강하자만 예리한 추사의 글씨에 비교하면 선도 서체도 부드럽다. 그리고 부드러움 속에 한정되지 않는 포용력이 있다. 그가 그리는 그림의 매력은 그의 선에 섞어져 빚어낸 것에 지나지 않고 그것은 보는 사람의 영성에 공명(울림)하여 기쁨을 가져다준다. 다시 한번 이야기 하자면 박방영은 기운생동의 원천인 천지(우주)의 에너지를 끌어내어 자신의 내면에 울리게 하여 작품 속에 풀어 버린다. 그때 그는 내면에서 진동하고 있는 것은 민족성에 기인한 피에 잠재한 원시적 무속(무술;샤머니즘)(shamanism)적 에너지이기도 하고 그것들이 혼연일체로 되어 작품에 나타내어져 그것에 보는 사람이 공명(울림)한 순간에 혼에끓어오르는 진동을 기억하는 것이다.

● 퍼포먼스

박방영은 머포먼스의 화가이기도 하다. 이명박대통령 주최 G20 리셉션(서울), 인천 아트플랫폼, 일본, 이탤리, 독일 등 수많은 그림 머포먼스를 행하고 있다. 거기서 전개된 작가의 일거수일투족에 관람객의 눈을 꼼짝 못하게 하여 서서히 작가의 리듬과 파동에 공감하여 간다. 그 결과로서 최후에는 한 장의 그림이 거기에 남아지게 된다. 그러나 퍼포먼스는 다만 쇼-는 아니다. 예술작품을 하나의 에너지체로서 본다면 퍼포먼스에 의해 그려진 그림에는 우선 작가의 심정을 축으로 하여 그 땅에 충만한 에너지를 끌어 들인다. 게다가 그 장소에 참가한 사람들의 심정적 에너지가 공명(울림)하여 (그들에게는 자각은 없지만) 그것이 작품에 끌어당겨 포함되어 있다. 즉 박방영의 머포먼스에 의해 그려진 그림은 그 장소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공동제작물인 것이다. 이처럼 참가자의 공감이 다이렉트하게 작품에 반영하는 시점은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펼쳐나가게 될 것이다. 박방영은 그 선두에 서서 미술의 미래를 끊고 열어줄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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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게재: 특별기고 / 회화지 29호(2022) 54–55쪽 · 원본 PDF 56쪽 ↗

이 지면의 도판

박방영 작품 (문자·동식물 이미지 화면, 지면 캡션 없음)특별기고(야기하시 요시오)박방영 작품 (문자·동식물 이미지 화면, 지면 캡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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