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北美術의 어제와 오늘
[사진] 나상목 화백과 대담하는 모습
1. 머리말
우리나라 近來 東洋畫, 書藝分野의 地域的 發展은 서울을 中心으로 湖南에서 發達하였다고는하나 湖南의 境遇 全羅南道를 指針하는 것으로 全北美術은 美術史的으로 볼때 特記할만한 事項이 그리 많치않다.
그러나 正組朝 蒼巖 李三晩이 獨特한 書體로 有名하였고 怪奇한 性品을 지닌 肅宗朝 毫出館 崔北이 茂朱人으로 傳하고는 있으나 정확한 考證은 없다. 그리고 石亭 李定稷과 劈下 趙周昇, 肖像畫에 石芝 蔡龍臣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全北은 全羅南道에 비교하여 書畫家의 活動은 低調하였다.
2. 日政時代
1940년전후의 全北美術을 槪觀하면 不毛之地에 가까운 環境이라할까? 당시 韓國人의 生活相은 日帝의 植民下 1次産業의 경우 韓國人의 대부분이 日本人의 小作人으로써 생활의 수준이 下位圈을 차지하였고 敎育部도 中等敎育에 있어 人文. 實業系列 공히 數를 셀정도였으니 따라서 文化藝術部門에 종사하는 數도 적었으려니와 活躍相이 低調하였으며 美術分野역시 作家의 數도 稀少하였지만 活動狀況도 微微하였다. 다만 鮮展(朝鮮美術展覽會)이 1944年23回로 終止符를지였는데 出品部門은 東洋畫, 西洋畫, 彫刻, 工藝의 4個分科였고 東洋畫에 沈銀澤 林愼, 李鍾元氏, 朴峽賢女史가 入特選하였고 西洋畫에 金永昌氏가 入選, 몇분의 日本人이 入特選하였으며 近來와 같은 個人展이나, 團體展等이 흔치 않았다. 당시 日本 東京의 美術學校에 留學한 全北人은 西洋畫의 柳秉熙, 權寧述, 李景薰, 文允模氏가 있었으며 國民所得이 낮아 美術의 亨受活動은 不振하였으니 감히 그 당시의 미술개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書藝에 曉山 李光烈, 文人畫의 酉堂 金熙舜, 書藝의 雪松 崔圭祥氏等이 이 地方에서 活動하고 있었다.
3. 光復後
1945年 8.15解放과 더불어 政治·經濟·産業等 秩序維持에 상당한 時日이 所要되었고 中等敎育이 점차 擴大되고 大學도 新設하여 美術分野도 作家의 數가 增加하여 質的으로도 向上이 뚜렸하여졌다. 中, 高等敎育에 있어 美術科目이 必須科目으로써 發展하는데 拍車가 加하여졌다. 光復後 서울大學校와 弘益大學校에 美術大學의 新設로 一部卒業生이 本道 中高校美術 敎師로 在職하였으며 1950年代後半경부터는 全州敎育大學에서 美術敎育을 實施하고있었으며 한편 西洋畫家가 新象會展을 開催하여 西洋畫發展에 寄與하였다.
그러나 初創期는 展示場과 所要經費의 不足으로 隘路도 컸으나 道當局과 美術人의 協力으로 고비를 넘기었다.
本道民은 數많은 作家를 輩出시켜 本道美術界의 큰틀을 마련하여 他市道展에 比하여 遜色이 없을 程度로 成長하였다.
4. 國展進出
1949年 1回開催한 國展(大韓民國 美術展覽會)은 6.25事變으로 中斷되었다가 1952年 2回를 開催하여 1981年까지 30回로 幕을 내리었는데 出品部門은 東洋畫, 西洋畫, 彫刻, 工藝, 書藝, 寫眞, 建築의 7개部로써 東洋畫에 羅相沐, 宋桂一, 鄭承燮, 西洋畫에 李義柱, 千七峰, 姜大運, 張完, 彫刻에 裵亨植, 金水鉉, 書藝에 宋成鏞, 崔正均, 權甲石, 洪信杓, 李圭鎭, 宋河英氏等이 特選또는 受賞하여 推薦作家, 招待作家, 審査委員, 運營委員等을 歷任하여 本道美術發展에 至大한 貢獻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後進養成에도 힘을 기울려 國展進出에 큰 도움을 주었다.
5. 全北道展
때마침 全北道展創設의 所望이 高潮되어 1969年 當時 李恒儀知事의 決斷으로 道展이 新設되였는데 出品種目은 東洋畫, 西洋畫, 彫刻, 工藝, 書藝, 寫眞, 建築의 7部門으로 24回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初創期는 展示場과 所要經費의 不足으로 隘路도 컸으나 道當局과 美術人의 協力으로 고비를 넘기였다.
本道展은 數많은 作家를 輩出시켜 本道美術界의 큰틀을 마련하여 他市道展에 比하여 遜色이 없을 程度로 成長하였다.
6. 美術專門敎育機構擴大
本道에서는 1968年 圓光大學校師大美術敎育科가 認可되어 많은 卒業生이 道內外 美術敎育을 專擔하여 美術發展에 至大한 影響을 주었고 그後 圓光大學校에 美術大學이 認可되었고, 全北大, 全州大, 群山大, 又石大學等에 美術科가 新設되여 1992年 現在 美術系在學生數가 2,600余名으로 推算되고 있다.
7. 展示空間으로서의 全北藝術會館建立
展示空間의 必要性은 美術發展과 密接한 聯關性이 있다. 當時 黃寅性知事의 配慮로 美術會館建立基金을 爲한 道內作家招待美展이 1974年 11月 全北藝總畫廊에서 開催하여 基金을 造成하였고 國樂大公演, 舞踊大公演, 새마을寫眞展을 가졌으며 特히 1975年 韓國元老 重鎭作家招待美術展이 서울 國立公報館에서 東洋畫 55点, 西洋畫 98点, 書藝 34点, 計 187点을 展示 基金化하여 當年12月 文藝振興基金과 市·郡 地方費 補助金으로 1977年 臨時藝術會館建物을 買入하였고 1980年에는 垈地355坪 延建坪 1,418坪(地下1層, 地上5層)을 1982竣工하여 本道 美術展示의 空間으로써 美術發展의 核心의 役割을 하고있다. 이 會館建立을 爲하여 道內 美術人과 藝術人의 勞苦는 至大하였다.
8. 湖南韓國畫三百年展 全北展
1984年 全北道와 韓國文藝振興院의 後援을 얻어 湖南韓國畫三百年展 全北展覽會(推進委員長 羅相沐)은 石芝 蔡龍臣, 墨鷺 李用雨, 碧下 趙周昇, 石亭 李定稷, 裕齋 宋基冕, 毫生館 崔北, 晋齋 裵錫麟, 柳下 柳永完, 子然 林愼氏等 文人畫, 山水, 花鳥, 器皿畫 等 全北出身韓國畫 98点을 收藏人의 協力을 얻어 當年 12月에 全北藝術會館에서 盛大히 開催하였고 圖錄도 發刊하여 三百年 本道韓國畫의 全貌를 밝히고 後輩들에게 좋은 산敎育을 하였다.
9. 公募展 其他(大韓民國美術大展 圓美術大展 春香美術大展 全國書畫百日大賞展等)
1982年부터 開催한 大韓民國美術大展은 우리 젊은 作家에게 登用의 機會를 주었고 우리 道內에서도 全國規模의 여러 公募展이 있어 美術發展에 貢獻하고 있으며 여러 그룹展, 個人展等이 年中展示되여 美術의 生活化, 美術의 價値創造에 이바지하고 앞으로 文藝中興의 기틀을 가지게 하고 있으며 많은 力量있는 作家의 出現을 期待하면서 끝을 맺는다. ■전북회화
원 게재: 이 땅의 젊은 화가들에게 / 회화지 1호(1993) 10–11쪽 · 원본 PDF 10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