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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쳐보는 즐거움 — 한국미술사에 나타난 에로티시즘

구혜경(서신갤러리 큐레이터)

한국의 역사에서 성풍속과 성문화의 변모를 찾기는 어렵지만 성문화의 원류는 암각화나 청동기에 묘사된 나신(裸身)의 인물상으로부터 성행위와 나체 인물상의 신라토우, 안압지출토목제남근, 성행위가 묘사된 고려 동경(銅鏡), 조선후기 풍속화와 춘화에 이르기까지 역사발전과 함께 발자취가 읽혀진다.

선사시대 암각화는 1970년 이후부터 발견되어 연구되어지고 있다. 울산의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고령의 암각화 등 경남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반구대 암각화는 제작 시기가 신석기부터 초기 철기시대까지 걸쳐 있고 구상형태로 되어있어 다양한 암각화를 볼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암각화의 중심부분에 해당하는 그림그룹에서 보여지는 인물상이다. 남근을 드러낸 인물상은 고래 등 바다동물들이 모여있는 맨 윗 부분에 위치하여 손을 들고 뭔가 주술적인 행위를 하는 모습이다. 이 인물상은 한국미술사에서 남근을 드러낸 첫 사례로서 성기숭배 신앙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 남근을 드러낸 표현은 풍어제나 산신제를 지내는 민속으로 흔히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서도 우두머리가 세운 남근은 그의 힘이 뻗쳐 큰 고래와 물고기를 잡게 해주기를 기원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또한 선사시대 암각화에서 보여지는 바위구멍은 특정하게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신격화시킨 바위나 암벽, 그리고 고인돌에 크고 작은 구멍을 얕게 파놓은 경우이다. 대체로 '구멍'이 지닌 상징성 탓에 바위구멍은 여성의 성기를 의미하고, '구멍파기'는 곧 바로 성행위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이름도 '성혈(性穴)'이라고 부른다. 이 성혈은 아이 낳기를 바라는데에서 출발하여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행위로 쪼았을 것이다.

청동기시대에서 초기 철기시대에 이르는 성기를 표현한 다산의 상징성은 4~5세기 고신라(古新羅)의 무덤에서 출토된 흙인형 토우(土偶)로 이어진다. 토기에 장식했거나 별도의 인형으로 제작된 신라 토우들은 여러 가지 동물상과 인물상들이 나타나는데, 나체의 인물조각은 남녀의 성기가 표현되거나 성행위를 형상화한 경우가 많다. 이 나신(裸身)들은 실감나게 사실적인 성행위를 표현하기도 하고 남녀의 성기를 애교스럽게 과장시키거나 여성을 더 크게 만들어 놓고 있어 강한 숫줄의 의미-다산을 기원하는-를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토우는 손으로 몇 번 주물러서 투박하게 만들었어도 에술적인 조형미를 보여줄 뿐 아니라 과장된 성기-성기가 무릎까지 내려오거나 다리와 크기가 같은-를 드러내 놓고 있는 당당한 자세는 부끄럽기보다 오히려 해학적인 즐거움을 준다.

이외에도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남녀 혹은 음양의 교합(交合)을 상징하는 설화적인 도상들이 보인다. '견우와 직녀'라든지, 삼실총의 '교사도(交蛇圖)', '해신과 달신'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이러한 것들은 선사시대의 암각화와 마찬가지로 다산과 풍요의 생산력을 염원하기 위해 신격화되어 있고, 노골적인 고신라의 토우와 비교해 보면 직접적인 성행위 묘사가 아니어서 더 상징성을 나타낸다.

통일신라시대는 귀족사회로 그들의 성문화는 풍류적인 유흥의 공간인 포석정이나 안압지를 통해 가늠된다. 특히 귀족들의 성풍속을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는 안압지에서 출토된 목제 남근이다. 그 물건은 실물크기(?)로 리얼하게 조각되어져 있을 뿐 아니라 앞쪽에 작은 혹같은 것을 붙여놓고 있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렇다면 이 목제 남근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두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왕족여성이나 후궁들의 자위행위 도구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아들 갖기를 기원하는 신앙적 용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그 당시 상류사회 여성들의 성풍속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어서 가부장적인 현실에서 어떻게 허용되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아마도 대범한 귀족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낸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 밖에도 고려시대에는 알려진 것이 없는데 유일한 성교상은 동경(銅鏡)의 뒷면에 장식된 네 가지의 체위를 부조로 표현한 것이 있다.

마지막으로 성문화의 하이라이트인 조선시대는 국가이념인 성리학의 도덕정치와는 반대로 억제속에서 더 활발한 성풍속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유교사회의 이중적인 성의식은 조선 사대부들이 추구한 풍류와 생활문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중성이 더욱 두드러지면서 에로틱한 면모가 때론 노골적으로, 때론 은밀하게 드러난다. 조선 후기 사대부들이 즐겨 사용한 문방구 중에 복숭아연적을 보면, 복숭아는 다산과 장수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 형태는 여성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것으로 연적을 어루만지면서 간접적으로 즐기는 은근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 정선의 〈박연폭포〉그림은 음양을 조화시킨 화법으로 폭포와 소(沼)는 여성을 나타내고 폭포를 떠받치는 바위는 바위는 남근을 연상케 형상화하고 있다. 이외에도 노골적으로 표현한 〈陰陽山水畵〉는 남녀의 성기형상을 염두에 두고 그려져 있어 해학적인 운치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그 이후 풍속화가 발전하면서 남녀의 애정표현은 구체적이고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풍속화는 발생초기에는 민중의 생활상을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하여 후기에 이르면 김홍도, 김득신, 신윤복에 의해 사대부의 생활상이나 일상의 민간생활로 그 소재가 확산되고, 문예발전속에서 새롭게 부상한 교양계층의 경제력과 맞물려 분방한 여성행각이 춘화라는 장르까지 개척시켜 나간다. 김홍도가 농촌생활상을 중심으로 서민층의 일상적 삶을 중심으로 삼았던 것과는 달리 신윤복은 여속이나 노골적인 남녀의 애정표현을 자신의 예술세계로 끌어들여 대담하게 색정(色情)을 표출하였다. 신윤복의 〈혜원풍속도첩〉에는 기방풍속에 두세 쌍의 행락과 남녀의 밀회가 중심이며, 승려가 끼거나 색정을 돋우는 여속장면, 무속, 주막들이 포함되어 있다. 시간은 봄, 가을이 많고 야밤풍경이 설정된 점은 유흥과 남녀의 정욕을 살리기에 좋은 때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월야밀회 月夜密會〉나 〈단오풍정 端午風情〉은 화면안에 훔쳐보는 제3의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어서 호기심과 짜릿함이 배가 된다. 이 훔쳐보는 인물설정은 춘화(春畵)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춘화는 조선후기 세속적이고 부패한 사회여건과 맞물려 경제성장을 토대로 사대부는 물론 민간, 여성, 불가(佛家)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확대된다. 그러나 조선후기 사회는 성리학의 이념을 토대로 하고 있어 우리나라보다 먼저 춘화가 발달한 중국이나 일본의 작품들이 유입되었을 때는 거부감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이나 일본의 춘화와 달리 변태적이거나 최음적인 소재를 노골적으로 다루지 않았던 조선적인 춘화의 특징을 형성하게 한다.

'김홍도印'이 찍혀있는 〈사계춘화첩四季春畵帖〉은 계절에 맞게 야외에서 벌이는 성희장면을 가지각색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인물의 필선 뿐 아니라 배경산수의 회화성이 뛰어나다. 또한 이 춘화첩에는 승려와 양가집 여인, 노인부부와 같은 색다른 계층의 성희를 포함하고 있어 주목된다. 특히 승려와 여인의 성희그림은 당시 문란한 사회상을 엿볼 수 있지만 이 그림의 해학미는 문틈으로 몰래 훔쳐보는 동자승의 표정에 있다. 역시 우리 춘화만이 지닌 해학미이고 낭만성이다. '훔쳐보기'장면은 '신윤복印'이 찍혀있는 〈건곤일회첩乾坤一會帖〉에서 어린 소녀를 통해 나타난다. 이 훔쳐보는 사람들은 춘화마다 등장인물들이 각기 다른데 동자승, 어린소녀, 기생 등 성희장면에 맞게 해학적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춘화의 해학미는 다른 춘화에서도 보여진다. 작가미상의 〈무산쾌우첩巫山快帖〉에는 댕기머리 소년과 소녀가 집안 뒷켠에서 하는 장면이 설정되어 있는데 소녀가 잡고 있는 나무 절구통과 절구공이 상징적으로 배치되어 있어 은근하게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이처럼 우리 춘화의 성희장면들은 단순히 도색적인 성희만 추구한 것이 아니라, 인간사의 하나로 표현한 것이어서 동시대에 그려진 중국이나 일본의 춘화와 구분되어 조선적인 품위와 예술성이 보여진다.

지금까지 선사시대부터 조선후기에 이르는 미술품과 조형물을 통해 성문화를 살펴보았다. 性이라는 것이 인간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이면서도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민족의식 때문에 남아있는 자료가 많지 않아 연구가 미비한 상태지만 현대의 성문화를 올바르게 밟기 위해서는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특히 일제시대 이후 서구문화의 유입으로 인한 성문화의 변화는 문화적 혼돈과 갈등의 현상이며, 굴절된 현대의 성문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우리 선조들의 성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연구한 자료를 발판삼아 성숙한 현대의 성예술이 창조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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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게재: 특별기고 / 회화지 10호(2002) 28–31쪽 · 원본 PDF 2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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