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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계절 지나가는 좁은 목, 한벽루 상념

곽병창(전주전통문화센터 관장)

창 밖 풍경을 보세요.

창 밖 풍경이 자꾸 바뀌어 갑니다. 푸르른 시냇가의 키 큰 나무들이며 그 곁의 작은 덤불숲, 건너 아파트 뒷산 남고산 능선이, 그리고 더 멀리 아스라이 뵈는 고덕산 가을 경치가 말할 수 없이 아름답습니다. 몇 달 전만 해도 우렁찬 매미 울음으로 하루가 가고 오던 자리였습니다. 초록물이 배어 나올 듯 짙푸른 풍경이 있던 바로 그 곳입니다.

전통문화센터의 찻집 다향에 반가부좌를 하고 앉아 쏟아질 듯 창 안으로 밀려 들어 온 풍경을 바라보는 일은 어느 누구에게도 부럽지 않은 일상의 기쁨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까운 천변 나무 한 그루는 이제 막 잎들을 다 털고 고즈넉이 서서, 하늘을 향해 여린 가지 끝으로 손사래를 쳐 댑니다. 땅이 밀어올린 제 필생의 수신호인 셈이지요. 허공을 향해 쑥스러운 듯 내민 손, 그 누군가를 간질이는 듯한 몸짓으로 지상 약 20여 미터 높이의 미풍에 한들거리고 있는 그 가지 끝을 보면서 사람 사는 일을 생각합니다. 나무는 제 평생 그렇게 자기 자리 한 번 옮겨 앉은 적 없이도 제 구실 다하며 계절을 보내고 맞습니다. 이럴 때면 더욱, 부산하게 싸돌아다니면서도 제 구실 제대로 못하는 사람으로서 한없이 초라한 마음을 가눌 길 없습니다.

나무뿐인가요? 제 몸 안의 온갖 기운 다 모아서 나무를 허공으로 밀어 올리는 땅의 기업, 대지의 한평생은 또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물불 안 가리고 한껏 더럽혀 놓은 땅일지라도, 불평 한 마디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때가 되면 제 소산의 자식들 있는 힘껏 키워내지요. 철철이 옷 갈아 입히지요. 그리고는 마침내 저 영원한 연인인 하늘을 향해 진수성찬의 풍경들 총동원해가지고 구애의 몸짓을 해 대는 것 아닌가요? 철이 바뀌어도 그 현란한 치장은 멈출 줄 모르고, 연년세세 해가 열두 번 바뀌어도 절대 늙어 초라해 지거나 기운 사그러들지 않습니다.

하늘이 이 현란하고 다채로운 땅의 구애를 놓칠 리 없어서 못 이기는 척 응답하기 시작하는 계절이 바로 이 가을 아닌가 싶습니다. 어김없이 어린 끝가지들만 남겨서 마지막 애처로운 손짓을 보내노라면 천상에서, 하늘의 답장인 듯한 형형색색의 단풍잎들이 흩날려 옵니다. 니 맘 다 안다는 듯이, 만날 날 언젠가 온다며 달래 주는 연인의 편지처럼요. 먼 하늘은 점점 아득히 더 멀어져 가고 짐짓 안타깝게 높아져만 가고, 그러다 마침내 더 먼 곳에서의 송신으로 흰 눈이 나부끼기 시작하면, 대지와 하늘의 장엄한 연애는 결실을 맺게 되겠지요. 온 세상을 덮은 흰 눈의 포근함. 저들의 저 호화무쌍한 한 해의 연애가, 겨울 따뜻한 이불 속의 동침으로 대미를 장식하는 순간입니다. 사람이야 그 장엄한 연애 앞에서 한낱 노리개에 불과한 것-. 다만 그 약동하는 움직임의 한 자락을 붙들고 그저 그 순간 영원하겠거니 찬탄할 따름입니다. 장쾌한 연애담, 스펙타클 멜로드라마의 단역배우에 불과한 존재입지요.

그리하여 인간은 끊임없이 저 탄복할 풍경 앞에서 망연해질 수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을 만났을 때 느끼는 멍한 느낌 바로 그것입니다. 무방비의 몽아상태가 되어 잠시 풍경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것이겠지요. 자질구레한 기쁨, 슬픔에 옥신각신하던 영혼들, 지루한 욕망에 싫증난 육신들, 일제히 가을 풍경들 앞에 두고 서서 멍청히 제 영육을 씻겨 달라고 애원합니다. 가끔 이렇게 한 번이라도 제 정신 돌아오게 해 달라고 매달려 보는 것입니다. 부질없는 일이지만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길 가의 돌멩이, 똥개만큼이라도, 제 구실 다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느닷없이 그 풍경 깊은 속으로 들어가 한 구석 빌려 살면서, 가는 계절의 한 토막이라도 화폭에 붙들어 앞힐 궁리에 여념이 없는 화가들, 혹시 이런 심정일랑가요? 남의 연애를 안 보는 척 다 엿보면서, 죄 없는 제 가슴 쥐어뜯으면서, 나도 어서 커서 저 멋들어진 연애담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사춘기 아이들이 이런 심정일랑가요?

이래저래, 뉘우치다가 흘겨보다가, 눈자위만 싸하니 아파오는 계절, 가을은 지나갑니다

[사진] (35쪽 중앙, 단풍 든 나뭇가지 — 캡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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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1지면 2

원 게재: 특별기고 / 회화지 10호(2002) 34–35쪽 · 원본 PDF 3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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