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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제일성 전주의 정문 풍남문

이 동 희(예원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사진] (캡션 없음 — 일제강점기 무렵 풍남문 앞 거리 사진)

조선시대 전라감사가 부임할 때 전주성의 4대문 중 어느 문으로 입성하였을까? 서울이 전주의 북쪽에 있으니 거리상으로 북문이 가장 가깝다. 따라서 북문으로 들어왔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다. 북문을 놓아두고 서문도 비켜서 남문으로 들어왔다. 이처럼 가까운 북문을 두고 전주성을 반바퀴나 돌아 입성하는 것은 남문이 정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 남대문도 그렇고, 전주도 남문이 가장 웅장하고 화려하다. 춘향전의 이몽룡이 과거급제하고 암행어사로 내려올 때 삼례를 지나 전주성을 들리는데 이때도, 떡전거리와 숲정이를 거쳐 북문과 서문을 지나 남문에 올라 전주성의 경관을 관망하였다. 전주성의 정문 그 남문이 풍남문이다.

남문을 『풍남문(豊南門)』(보물 308호)이라 함은 『풍패지향(豊沛之鄕)』의 『풍』자를 따다 붙인 이름이다. 풍패지향이란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이 풍패인데서 유래한 것으로 건국자의 본향을 일컫는다. 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선대들이 살았던 조선왕조의 발상지로 함경도 동북면과 함께 조선왕실의 풍패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전주성의 정문을 풍남문이라 명명하여, 이곳이 조선왕조의 뿌리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풍남문의 성안쪽으로는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전주가 호남의 수부, 수도라는 뜻이다. 『풍남문』 편액은 전라감사 홍낙인, 전라감사 이서구, 명필 창암 이삼만 등의 글씨로 전해지나 분명치 않다. 『호남제일성』 편액은 헌종 8년(1842) 전라감사로 부임한 서기순(徐箕淳)이 쓴 것이다. 일제에 의해 성곽이 헐리고 옛 영화는 사라졌지만 호남제일성의 정문 풍남문은 전주의 자존심과 위세를 견지한채 제자리에 우뚝서 오늘날 전주의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다.

서문은 『풍패』의 『패』자를 따서 패서문(沛西門)이라 하였으며, 동문은 완동문(完東門), 북문은 공북문(拱北門)이라 했다. 그 위치를 보면 서문은 현재의 다가동 파출소 근처, 동문은 동문사거리, 북문은 오거리쯤 된다. 성문이 있었던 자리에 현재는 빗돌이 세워져 있다. 전라감사의 집무처인 선화당(宣化堂)은 현재의 도청자리에 있었으며, 전주부윤(현 전주시장)의 근무처는 옛 전주시청 현 중소기업은행 자리이다.

전주성이 처음 축조된 연대는 분명치 않다. 전라감사 조현명은 『명견루기』에서 태조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던 1388년(우왕 14)에 전라감사 최유경이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전라감사 홍낙인은 『패서문기』에서 전주성의 축성연대를 알 수 없다라고 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에도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따라서 전주성의 축조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고려말에 이미 축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유경은 고려말 우왕 14년에서 공양왕 1년까지 전라관찰사로 있었다.

전주성 수축에 관한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것은 1734년(영조 10)이다. 이 때 전주성이 너무 오래되어 퇴락했다는 이유로, 전라감사 조현명이 부성을 크게 개축하고, 4대문을 다시 쌓았다. 남문은 성문 내외를 아치형의 홍예문(무지개문)으로 쌓았으며, 성문 위에 3층의 문루를 세워 『명견루』라 이름하였다. 현재의 풍남문이 2층이니, 얼마나 웅장했을지 짐작이 간다. 남문외의 성문 누각은 모두 2층으로 하였다. 정유재란때 훼손된 성곽을 영조대에 이르러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명견루(明見樓)』라는 이름은 3층의 망루에 올라 보면 앞이 탁 트여 잘보인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만, 또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음양오행론에 의하면 남쪽은 '밝을 명(明)'이다. 임금이 남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즉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잘 헤아려 정치를 잘하라는 뜻이다. 이런 이치로 볼 때 남문을 명견루라 한 것은 눈으로 잘보인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전라감사로 하여금 백성들의 삶을 잘 돌보라는 경계의 의미가 있다.

[사진] (캡션 없음 — 전주부성을 그린 옛 지도)

전주성이 개축된지 30여년이 흐른 후 안타깝게도 1767년(영조 43) 3월 전주에 큰 불이 나(丁亥大火), 민가 1천여호를 불태우고, 문루도 모두 불탔다. 그리하여 그해 9월 전라감사 홍낙인이 3층이던 명견루를 2층으로, 2층이던 서문을 단층으로 복구하고, 그 이름도 『풍패』의 글자를 한자씩 따서 각각 풍남문과 패서문으로 바꾸었다. 『풍남문』은 이렇게 해서 탄생되었다. 동문과 북문은 영조 51년(1775) 전라감사 서호수가 도임하여 중건하고 각각 완동문 공북문이라 이름하였다.

이후 전주성은 동학농민전쟁 때 또한번 시련을 겪었다. 1894년 4월 27일 동학농민군이 밀고 들어 온 곳이 이곳 남문과 서문이다. 이 날은 서문 밖 장날로 장사꾼으로 위장한 수천명의 농민군들이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경)에 용머리고개에서 대포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수천발의 총소리와 함께 서문과 남문으로 물밀듯이 밀고 들어와 삽시간에 전주성을 점령하였던 것이다. 용머리고개에 진을 치고 있던 전봉준은 대군을 거느리고 서문으로 입성하여 선화당을 점거하였다. 농민군은 전주성 점령후, 완산에 진을 치고 있던 홍계훈의 경군과 치열한 접전을 전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전주성의 상당부분이 파괴되었다. 이후 전주성은 일제에 의해, 전주 군산간 번영로가 뚫리면서 1907년부터 본격적으로 철거되기 시작하여 1911년에 풍남문을 제외하고 완전히 철거되었다.

현재의 풍남문은 1978년에서 1980년에 걸쳐 보수한 것이다. 중앙의 문루만 남아 있었는데, 양쪽의 날개 문루를 복원했으며, 이 때 옹성도 복원하였다. 옹성은 적의 공략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문 바깥 주변을 둘러싼 성이다. 고지도나 기록에는 4대문 중에 북문만이 옹성으로 나타나 있다. 문루보수공사 당시 풍남문의 모습 또한 옹성이 아니었다. 문 바깥을 파헤치다가 옹성의 흔적이 나옴에 따라 지금과 같은 형태로 복원하였다. 새로 쌓은 것이라 감흥이 덜하나 옹성 하단에 전주성 당시의 누런 성돌들이 세월을 담아내 옛맛을 느껴볼 수 있다.

[사진] (캡션 없음 — 현재의 풍남문)

그런데 풍남문이 원래 옹성이 아니었는데 잘못 복원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예컨대 옛지도에 풍남문이 옹성으로 그려져 있지 않으며, 남문으로 복이 들어오는데 구태여 옹성을 쌓아 이를 차단시킬리 없다는 것이다. 문루 옆의 치성을 옹성으로 오인해 잘못 복원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럴 개연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발굴과정에서 옹성이 찾아졌고, 옛 지도중에 옹성으로 그려진 지도도 있는 것으로 보아 옹성복원을 잘못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영조 때 조현명이 개축하면서, 혹은 홍낙인이 2층으로 낮추어 지으면서 옹성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 한다.

풍남문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한 성문의 개폐를 알렸던 종이다. 처음 쌓을 때는 사방 문루에다 종을 달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정유재란 때 사방 문루가 무너지고 종도 부서졌다. 광해군초 1609년경 다시 종을 달았는데 이때부터 남문에만 달았다. 그런데 종이 너무 작고 소리도 좋지 않아 오히려 부성 사람들의 기분을 언짢게 했다. 또 튼튼하지도 못해 오래가지 않아 깨지곤 하였다. 이후 효종 6년(1655), 영조 7년(1731), 정조 20년(1796) 여러차례 종을 주조했으며, 임시조치로 북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경제사정이 좋지 못한 결과였다. 영조 정해년에 큰 불이 나서 문루와 함께 종도 불타버렸다고 『완산지』에는 되어 있으나, 도사 이재후의 아들 이시종은 종만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하였다.

왜란후 이런 저런 어려움을 겪다가 제대로 된 종을 만든 것이 순조 때에 와서이다. 1837년(순조 37) 전라감사 윤인영과 판관 이희평이 주조한 것으로, 종의 지름은 넉자 일곱치, 높이가 다섯자 아홉치이고 중량은 530관이었다. 새벽 오경 석점(五更 三点), 5시 30분에 33번을 쳐서 아침을 알리고 성문을 열었으며, 밤에는 이경(二更), 10시에 28번을 쳐서 성문을 닫고 통행을 금지시켰다. 전자를 파루종(罷漏鐘)이라 하고, 후자를 인정종(人定鐘)이라 한다. 중앙 문루 양쪽에 나지막한 문루를 붙여 성문을 오르내리게 하였는데, 이중 서편의 작은 문루가 종각으로 여기에 종을 매달아 두었다. 이 종은 그 소리가 빼어나 부성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105년간을 버티면서 전주사람들과 같이 했으나, 안타깝게도 태평양 전쟁 때 일제에 의해 군수물자로 몰수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철로 녹여지지는 않았다 하는데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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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게재: 역사와 미술 / 회화지 10호(2002) 36–38쪽 · 원본 PDF 3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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