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감영
조선시대 전주부성은 그 면적이 18만여평으로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성이었다. 북쪽에서는 평양과 함흥, 남쪽에서는 전주와 대구성이 큰 성곽이었는데, 대구성은 전주성의 2/3정도에 불과하였다. 전주부성에는 오늘날의 전주시청인 전주부영만이 아니라 전라감영이 자리하였다.
전라감영이란 전라도 감사가 근무하는 관아라는 뜻이다. 감사(관찰사)란 일도를 총괄하는 종2품의 관리로 오늘날로 말하면 도지사에 해당된다. 조선시대 육조판서가 정 2품이고, 그 아래 육조 참판이 종2품이니, 감사는 직급상으로는 참판급이다. 하지만 이는 직급상 그러할 뿐, 감사는 일도의 장관으로서 행정 군사 사법을 총괄하는 막대한 권한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조선정부는 감사의 임기를 1년으로 제한하여 그 권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견제하였다.
전주에 이러한 전라감영이 설치된 것은 고려말 조선초의 일이다. 물론 전라도라는 이름은 고려시대에 등장하였다. 고려초인 현종대 오늘 날의 전라남북도와 제주도를 합쳐 전라도라고 이름하였다. 그러나 이는 구역을 그렇게 나눈 것일 뿐 전라도를 총괄하는 감영이 설치되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5, 6품의 중앙 관리들이 안찰사라는 직함을 띠고 6개월간의 임기로 일도를 순력할 뿐이었다. 감영제는 고려말에 처음 등장하였다. 창왕 즉위년(1388) 안찰사가 도관찰출척사(감사)로 개칭되어 2품 이상의 대신이 임용되기 시작하였고, 이어 공양왕대에 임기도 1년으로 연장되었으며, 그 예하에 경력사라는 기구까지 설치되었다. "전라도 선생안(감사 명단)"을 보면 창왕즉위년에 부임한 최유경부터 도관찰사로 기록되어 있고 임기도 1년이다. 이때부터 군현의 상위기구로서 행정도제가 전라도에 실시되었던 것이다.
전라감사는 전주부윤(전주시장)과 직급이 같았다. 즉 전주부윤도 전라감사처럼 종2품직이었다. 조선전기에는 대체로 감사와 부윤이 따로 임명되었지만, 임진왜란 후에는 주로 겸직제로 운영되었다. 전라감사가 전주부윤을 겸할 경우 감사가 전주부의 실무들까지 일일이 다 챙겨 볼 수 없음으로 종5품의 판관이 파견되어 실질적인 전주부윤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감사 부임시 가족동반여부도 겸직제와 관련이 있는데, 세종 때 전라감사가 전주부윤을 겸하면서 가족을 데리고 올 수 있었는데, 단종 때 겸직체제가 혁파되면서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는 것도 폐지되었다. 그러다가 현종 11년 겸직체제가 되면서 다시 감사가족을 데리고 부임할 수 있게 되었다.
전라감사의 전주부윤 겸직체제는 감사의 근무형태와 관련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전기에는 감사가 도 전역을 순력 하였으므로 전주부윤을 겸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하지만 조선후기 감사가 이제 더 이상 순력하지 않고 감영에서 일도를 총괄하는 형태로 바뀌면서 겸직체제가 가능해졌던 것이다.
[도판] 19세기 전라감영배치도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병풍형 지도)
조선후기 감영의 기구와 시설들이 확대되는 것도 감사의 근무형태 변화와 직결되어 있다. 감사가 감영에서 도정을 관장하고, 또 식구들까지 데려 올 수 있음으로 시설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라감영이 위치했던 곳이 현재 전북도청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풍남문에서 객사를 향해 반듯하게 뚫린 주작대로 좌편에 감영, 우편에 전주부영이 자리하여 좌감영·우부영의 도시구조를 이루었다. 전라감영의 전체면적은 1만 2천평정도 되었으며 그 중심 건물은 감사의 집무처인 선화당이다. 선화당(宣化堂)이란 이름은 '宣上德而化下民(선상덕이화하민)', 즉 '임금의 덕을 베풂으로써 백성을 교화한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선화당은 수령의 집무처인 동헌(東軒)과 달리 어느 도나 관찰사 집무청을 선화당이라 칭하고, 그 정청 중앙에「宣化堂」이란 편액을 달았다. 반면에 군현 수령이 정무를 보는 정청은 동헌이라 하였는데, 동헌에 걸리는 편액 당호는 군현마다 달랐다.
선화당은 객사 다음으로 그 규모가 커 5칸 집에 건평이 78평이었다. 객사는 지방 관들이 서울에 있는 임금에게 예를 올리는 곳으로, 지방의 궁궐로 인지되어 도시 공간배치의 중심점이 되었으며 크기도 가장 컸으며, 그 다음으로 선화당이 컸다.
현재 전라감영의 흔적으로는 선화당 주변에 있던 회화나무 한그루가 도의회건물 뒤편에 유일하게 남아 있다. 선화당 건물은 일제 강점기《전주부사》에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선화당은 조선 몰락 후 전북도청사로 활용되었다. 1921년 선화당 앞에 새로 도청사가 건립되면서 그 기능을 넘겨주었으며, 1951년 화재 때 도청본관과 함께 선화당도 소실되고 말았다.
고지도를 통해 감영의 구조를 보면 감영의 정문 포정루는 남북대로변에 위치하였는데 현재 도청후문자리에 있었다. 여기에 전라관찰사가 6개월마다 군현 수령들을 상·중·하로 포폄하는데 그 결과를 사언절구로 요약해 걸어두었다고 한다. 현재 1909년경에 찍은 포정루 사진이 남아 있는데, 2층 누각으로 그 앞에는 하마비, 선정비 등이 세워져 있었다.
선화당 뒷편에는 감사 가족들이 사는 내아가 있으며, 서편으로 감사 심부름꾼인 급사들의 대기소인 통인청이 있었다. 선화당과 내아 사이에 감사가족을 돌보는 예방비장(내아 사무)실 응청당이 딸려 있었다. 선화당 중삼문 앞에는 아전들의 집무처인 작청이 있었다.
선화당 좌편 끝자락에는 종이를 만드는 지소와, 책을 찍는 인출방이 있었다. 여기에서 남쪽방향으로 더 내려오면 진상할 부채를 만드는 선자청이 크게 자리하였다. 전라감영에 전주의 자랑인 한지와 부채 공장이 속해 있었던 것이다. 한편 감영의 내아 뒷담 너머 양사재가 위치했었다. 양사재는 조선말 향교 뒷편 현재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사진] 전라감영 선화당 (1939년경)
요즘 전라감영 복원문제를 놓고 논란이 뜨겁다. 내년 7월 전북도청이 서곡지구 신청사로 이주하면, 그 자리가 옛 전라감영이 있던 곳이었던 만큼 감영을 복원하자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구도심 활성화차원에서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적극적 개발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 가운데 지난 9월 전주시에서 개최한, 전라 감영지 활용방안에 대한 2차심포지움에서 한양대 서현교수가 어린이 체험박물관을 제안하여 도청일대 상인들의 큰 박수를 받기도 하였다. 서울 송파구에 한 곳 설치되어 있는데 대 성황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구 200만이 안되는 전북도, 60만 인구의 전주시, 서울과 비교도 안되는 이 작은 도시에서 어린이체험 박물관이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무엇보다도 역사성을 상실했을 때 그 수명이 또 얼마나 갈 것인지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 전라감영지는 그것이 어떤 형태든 이 일대가 가지는 역사성과 접목되어 개발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라감영의 역사문화적 성격을 바탕으로 한 문화공간으로의 활용 내지 개발이 적절치 않을까 한다.
원 게재: 역사와 미술 / 회화지 12호(2004) 28–29쪽 · 원본 PDF 28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