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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이론

추사 예서(隸書)의 기괴(奇怪)와 고졸(古拙)의 조형성

김정희(전북대 겸임교수 / 홍익대 미술학 박사)

김정희(金正喜)1)가 활동하던 19세기 전반기의 조선 사상계는 여러 사조가 혼재하던 시기였다. 조선의 건국이념인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서학과 고증학을 수용한 실학의 이념이 여러 방면에서 확산되었다.

추사는 이러한 시대 배경 아래에서,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교유하며 다양한 방면의 이론을 섭취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고자 했다. 그는 성현의 도(道)란 공소한 이론을 숭상하는데 있지 않고, 몸소 실천하는데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사회를 이루기 위해 각자가 제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여, 전통적인 유가의 "옛것을 잘 살펴서 새로운 것을 안다"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論語』「爲政第二」는 방법론을 계승하여 자신의 삶에 실제적으로 적용시켰다.

서화예술에는 주체적인 생명의 정보가 필묵에 스며들어 있으며, 인격 · 성정 · 감각 · 정서가 배어나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계절감과 습도 같은 객관적인 환경요소까지 모두 필묵에 스며들 수 있다. 이렇게 서화예술은 필묵 안에 내재되어 있는 정신적인 요소, 즉 필묵의 정신적 기세와 생명력이 매우 중요했다. 이러한 이유로 서화속의 필묵에 '기(氣)'가 형성되면서 선의 굵기, 역량, 기세, 구도 등이 함께 자리 잡게 된다. 필묵의 윤기 나는 짙은 먹의 기운에서 우리는 작가의 왕성한 기력이 배어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추사의 인생 역정과 생명력을 담고 있는 필묵의 흔적들을 구체적으로 파헤쳐 본다면 추사의 기술적인 측면은 물론 나아가 철학적 도까지도 겸비된 그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대가의 붓이 지난 자리는 공허하지도 가득 차지도 않다. 그 대신에 기운과 여운이 아련하게 남아 강직함과 유연함, 건조함과 습윤함, 농염함과 담담함, 신속함과 느긋함, 그리고 수많은 우여곡절과 감성의 발산, 천변만화(千變萬化)가 계속해서 진행되고 생성되는 창조적 활동을 우리는 느낄 수 있게 된다. 오묘하고 신비한 필묵의 매력은 이미 '도'의 경지에 들어섰다고 말 할 수 있다.1) 우리는 이러한 필묵이 추사의 서화에서 살아 숨 쉬는 존재로써 그의 표현 속에서 더욱 돋보이게 하는 그 무언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1) 김정희(金正喜 : 1786(정조10)~1856(철종7)는 조선 말기의 문신 · 학자 · 서화가. 자(字)는 원춘(元春), 호(號)는 추사(秋史) · 완당(阮堂) · 예당(禮堂) · 노과(老果) · 시암(詩庵) 등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24세 때 부친 김노경(金魯敬)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서 청(淸) 나라의 거유(巨儒) 옹방강(翁方綱) · 완원(阮元) 등으로부터 지우(知遇)를 입었다. 1840(헌종6)년에 윤상도(尹尙度)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9년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2) 딩시위안 지음, 이화진 옮김,『예술풍수』, 도서출판 일빛, 2010, 138-139쪽.


추사는 제주도에서 유배하던 때에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에까지 내려오는 한국의 서법을 연구하여 만든 서체가 추사체이다. 이 추사체는 한국의 필법뿐만 아니라 한국의 비문과 중국의 비문의 필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추사는 '모든 서체의 종합'이라고 알려져 있다. 특히 그의 예서는 더 출중하다고 평가 받고 있다. 이에 그의 예서체에 나타난 怪(괴)와 고졸의 경지는 한국적 조형의식이 두드러지게 표현된 미의식이기도 하다. 이 글은 그의 예술창작의 극히 일부분의 조형관을 피력하였지만 그가 주장하는 가슴속의 청고하고 고아한 뜻인 문자향(文字香) · 서권기(書卷氣)를 갖춘 조형의식을 통해 품격 높은 조선인의 인격미이자 사대부의 시 · 서 · 화 일치의 생활의 멋이 담긴 한국적 조형관을 담고 있는 대표작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추사체에 나타난 奇怪와 氣魄

추사는 기괴한 조형의 대명사인 추사체를 만든 주인공으로 우리에게 각인되어있다. 이것은 다분히 추사를 단편적으로 이해한 결과지만 추사체가 추사의 전부는 아니다. 추사는 조선 말기의 고증학자이자 금석학자3)이며, 또한 서도가로서 그의 위치를 굳힌 사람이다. 그의 '기(奇), 괴(怪)'에 관한 이론과 그 실기에 대한 견해를 보자.

일반적으로 예서의 법은 졸(拙)할지언정 기(奇)함이 없어야 하고, 고(古)하면서도 괴(怪)하지는 아니해야 한다. 비록 척백(戚伯), 양두(羊竇)의 험조(險阻)함에도 기(奇)하거나 괴(怪)하지 아니해야 하니, 기(奇)와 괴(怪) 두 가지 의미는 유독 서법에만 아니라, 일체에서 경계하는 것이 좋다.4)

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추사는 이론상 기(奇)와 괴(怪)를 수용하지 않았다. 회화의 이론 발전사상에서 사혁(謝赫)의 '육법(六法)', 형호(荊浩)의 '육요(六要)', 황휴복(黃休復)의 '사격(四格)', 한졸(韓拙)의 '팔격(八格)'에도 '추괴(醜怪)'는 없었다. 그러나 유도순(劉道醇)의 '육장(六長)' 중에서 '광괴구리(狂怪求理)'가 나온 후로부터 '괴(怪)'의 심미법주가 처음으로 형성되게 되었다. 문인화가 소식(蘇軾)은 마음이 우울할 때〈고목괴석도(古木怪石圖)〉를 그렸다. '기(奇)'에 관한 추구는 일찍부터 있었다. 장자굴자(莊子屈子)의 문장은 기(奇)하다는 평가와 함께 화가들의 그림이 '기작(奇作)이다', '기필(奇筆)이다' 라는 등의 말은 예술이 아직 발달되지 못했을 때의 기교의 고졸(古拙)함을 묘사한 것으로서, 예술이 고도의 자각적 발전을 이루었을 때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깊은 정감의 표현으로부터 출발하여, 자각적으로 기괴(奇怪)의 미학적 규율을 추구하는 것은 봉건사회의 부패와 압박의 산물이며, 예술의 한 부분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추사는 저도 모르게 '기괴(奇怪)'의 단계에로 들어간 것이다.

추사는 '기괴함'을 좋지 않은 것으로 보고 피하고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글씨 역시 "기괴함"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아! 일부러 괴이함을 꾸미고자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라고 말하며 이러한 상황은 곧 '기괴함'이 원래 목적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 목적을 달성하기위한 중요한 표현 형식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의 글씨〈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그림 1)의 경우 다 떨어진 책과 무뚝뚝한 돌이 있는


3) 석고문(石鼓文) : 석고문(石鼓文)은 최초의 석각(石刻) 문자이며, 그 형태가 북처럼 생겼다 해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 석고문이 발견된 때 당대(唐代)의 학자, 문인들은 주선왕(周宣王) 시대의 산물(産物)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은 석고문은 진각석(秦刻石)이라는 정초(鄭樵)의 논점을 긍정하였다. 석고문(石鼓文)의 서체는 고문(古文)과 진전(秦篆)사이의 것으로써 대전(大篆)에 속하며 대전에서 소전(小篆)에로 연변(演變)하는 시기의 전서이다. 대전 이란, 협의(狹義)의 해석으로 한다면 주선왕(周宣王) 태사(太史)가 정리 심사한 문자로써 주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태사가 만든 대전은 모두 15편(篇) 밖에 안 되며 그 진적(眞蹟)도 보기 드물다. 그러므로 석고문을 대전의 대표작으로 친다. 석고문 중에서 적지 않은 글자가 설문 중의 기록한 주문하고 합치 되어 그것을 주문이라고 부른다.吳明南,「圓嶠와 秋史의 書藝 比較 硏究」, 成均館大學校博士學位論文, 2004, 135쪽 재인용 4) 金正喜,『阮堂全集』, 卷四, 한글 44쪽, 漢文, 16쪽. "大隸法. 寧拙無奇, 古而不怪雖戚伯羊竇之險. 亦不奇不怪. 奇怪二意 . 不特書法. 一截戒之爲佳"


그림 1 김정희,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그림 1 김정희,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서재라는 뜻으로 제주도 유배 후 강상(한강 용산변의 강마을)시절의 대표작이다. 글자의 윗선을 맞추고 내리긋는 획은 마치 치맛자락이 휘날리는 듯 변화를 주었다. 이렇게 자유분방한 글씨는 추사 김정희밖에 없었다. 서예(書藝)에 있어서 기맥이 흐르는 글씨가 살아있는 글씨이며, 기맥연관이 된 글씨는 곧 붓에 먹을 찍어 단숨에 한 작품을 완성해 나가는 일필화(一筆畵)5)을 의미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글자 간에 일기(一氣)가 관통하고 농담(濃淡)과 고윤(枯潤)이 생겨 음양(陰陽)을 갖추어 기백(氣魄)있는 훌륭한 글씨가 표현되는 것이다. 기백은 한국미학의 대부인 고유섭(1905-44)이 '힘있는 조선'의 미감을 '기박(氣迫)'으로 표현했는데 요즘말로 하면 기백 또는 박력과 통한다.6) 기박은 거칠면서도 박력있고, 분위기 있으면서도 활달한 것을 말한다. 추사는 서예에서 기의 역사와 함께하여 서예에서 실현했다.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그림 1)글씨의 조형은 오체가 하나의 글씨 속에 동시에 표현되었다. 잔(殘)과 서(書)는 전서(篆書)의 자형을 쓰고 있으며 운필방법도 소전(小篆)의 필을 살리고 있다. 루(樓)의 계집녀(女) 변은 행서의 운필법이 보인다. 특정한 획을 도출시켜 힘과 세를 취하였으며, 변의 축소에 따른 상양 결구법을 사용하고 있다. 잔은 우측변을 적고 복잡하게 쓰고 좌측 변은 강하고 크게 썼다. 이는 주객을 전도시켜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서의 자형은 전서의 자형을 사용하여 기필 부분은 예서의 운필과 해서의 운필을 동시에 사용하였으며 위의 변을 크게 하고 아래쪽의 변을 작게 하여 변화를 줌으로써 자형이 불안한 느낌을 주는 것도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한 방법이다. 대신에 석(石)자는 세로획의 기필부분을 안진경체7)의 운필법으로 사용하고 입구(口)변을 아주 작게 배치함으로써 복잡한 다른 글자와 균형을 맞추고 있다. 처음과 끝은 강하고 안정감이 있게 쓰고, 그 사이 서(書)자와 석(石)자는 흐트려서 감상자로 하여금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전체적인 구도에 있어 윗부분을 가지런하게 하고, 아래 부분은 들쭉날쭉하게 한 것은 예서의 결구법을 적용한 구도이니 이는 팔분 예서의 특징을 잘 살린 작품이라고 하겠다. 획의 배출에 있어, 글자에 따라 자유스럽게 아랫부분만 도출시켜 마치 빨래가 널려 있는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8) 추사체의 가장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평가인 '여러


5) 일(逸)은 심미적 통찰이자 예술적 경지로 초일(超逸)을 가리킨다. 일은 보통 수준을 넘어선 것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회화 규칙과 법칙을 넘어서는 것을 가리킨다. 일에는 두 가지의 함의를 갖는다. ① 연한 먹으로 가볍게 그리는 것과 평원하고 간결하며 맑고 투명한 의취를 가리킨다. ② 도달하고 싶지만 도달할 수 없는 최고의 본보기를 가리킨다. 즉, 일(逸)은 세속적인 것으로부터의 초탈과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법규에 거리끼지 않는 자유자재의 성격을 갖는다. 심미형태로서의 일(逸)은 생활태도이자 가슴 속의 지향인 정신적 이상으로서의 일(逸)[인생과 세계에 대해 지혜로 충만한 탈속]로부터 비롯된 예술적 반영이다. 은일(隱逸), 고일(高逸)은 세상이 내 뜻과 맞지 않아 들어앉은 은거이다. 일의 철학은 장자의 철학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 일은 애초에 사람에 대한 품평의 용어로 사용되다가 예술범주로 변용되고, 宋代 이후엔 서화의 품격 중 최상의 품등이 된다. 임태승,『상징과 인상』, 학고재, 2007, 96-107 참조. 6) 조동일 외 지음,『기학의 모험 2』, 도서출판 들녘, 2004, 79-82쪽 참조. 7) 안진경 글씨는 남조(南朝) 이래 유행한 왕희지(王羲之)의 전아(典雅)한 서체에 대한 반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남성적인 박력과 균제미(均齊美)가 있어 당대(唐代) 이후의 중국 서도(書道)를 지배하였다. 8) 황지원/사공홍주 저,『金正喜의 哲學과 藝術』, 계명대학출판부, 2010, 152-153쪽.


서체의 장점을 취합한 종합적인 서체'라는 평가는 김정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한송절충론9)적 사유에 의해 오체를 종합하고자 한 것이지, 자유분방한 개성의 발현으로서 기괴함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예서의 바탕에서 그 속에 오체가 모두 구현되는 '서체절충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그 결과가 '기괴함'으로 나타나는가? 그 원인은 다음과 같다.

서예의 일반적 특징은 두 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기록성(記錄性)이고 하나는 예술성(藝術性)이다.10) 기록성을 초월하여 예술적 가치로 발전하려면 먼저 서예의 문자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창작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서체를 변형하여 서로 절충하거나, 크기에 변화를 주어 다양한 결구를 한다거나, 장법11)을 다양하게 하여 조형성을 새롭게 한다거나, 용지의 선택이나 먹물의 농도와 표현 방법이나 재료를 다양하게 이용한다면 문자의 한계를 극복하여 새로운 창작을 모색할 수 있다. 추사체도 이러한 측면으로 검토할 수 있겠다. 획이 극도로 가늘다 던지 굵기의 차이는 자간(字間)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운필에서 있어 붓을 빠르게 움직여 획이 경쾌하고 강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끊임없이 역동하는 생명력의 표현은 예서와 행서의 결합의 결과다. 세 번째로 표현기법에서 글자마다 중심선 이동을 심하게 하여 획을 불규칙적으로 배치함으로써 획 사이의 변화를 많이 주는 것은 왕희지체12)와 안진경체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배세(背勢)와 향세(向勢)를 활용한 결과다. 이와 같이 추사는 행서와 초서의 장점을 수용한 빠른 운필법과 극단적인 획의 변화를 추구한 결구법, 그리고 불규칙적으로 획을 배치하여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자형의 중심선을 의도적으로 이동시킨 장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독창성은 감상자로 하여금 '기괴함'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자연스럽게 발현된 '괴'는 처음부터 기괴함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또한 그의 예서 작품〈구오복일수(九五福一壽)〉(그림2)를 살펴보면, 좌우의 위치를 바뀌어 써진 '복(福)'자, 머리가 무겁고 발이 가벼운 '수(壽)'자, 썩고 끊어진 가지 같은 횡(橫), 고법(古法)이 조금도 없는 파(波)들은 "거칠고 난잡하여 어찌 보면 차마 할 수 없는 것이었다."(정수어(程邃語), "순용황졸(純用荒拙), 이추태고(以追太古), 조란착종(粗亂錯綜), 약유부가능자(若有不可能者)")는 말까지 듣게 된다.

추사의 '기괴'는 저절로 발전된 단계라 하겠다. 그렇다면 중국의 비학가들은 기괴를 어떻게 대하였을까? 정판교(鄭板橋)는 '육분반서(六分半書)'를 창조하였는데 '난석(亂石)'이 길가에 깔려 있는 것처럼 난(亂)으로 '괴(怪)'한 절정에 이루었다. 김동심(金冬心)은 죽(竹)을 그릴 때면 '난죽(亂竹)'을 그린다. 오창석(吳昌碩)은 금석비학(金石碑學)에 대한 이해의 뿌리가 깊고, 고도(古陶), 고부(古缶)를 좋아하였으므로 '부려(缶盧)', '창석(蒼石)', '창석(倉石)'이라

그림 2 김정희, 구오복일수(九五福一壽)
그림 2 김정희, 구오복일수(九五福一壽)

9) 실학은 중기이후로 접어들면서 반주자학 · 탈주자학적 특성을 보다 분명히 드러내며, 추사도 후기 실학자에 속하면서도 '한송불분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한학과 송학은 본래부터 하나의 이치이므로 쓸데없이 나눠보아서는 안된다는 '한송불이'을 주장하는 것이다. 즉 훈고를 중시한 한학과 의리를 중시한 송대의 주자학이 서로 다르지 않고, 나눠지지도 않는다는 주장을 폈다. 이는 그의 실학이 반주자학적 · 탈주자학적 색채가 약하며, 주자학의 학문적 태도를 비판하면서도 실학의 탈주자학적 입장과도 궤를 달리하는 것이 김정희 철학사상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황지원/사공홍주 저, 앞의 책, 43쪽 참조. 10)『金正喜의 哲學과 藝術』, 153-156쪽 참조. 11) 장법(章法)은 결구에 의하여 이루어진 문자를 조화롭게 배열 또는 배자를 하여 하나의 완성된 문장을 꾸며 작품을 완성하는 단계를 말하며 여기에는 낙관까지도 포함된다. 12) 동진(東晉) 사람인 왕희지체는 한나라 때 생겨난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의 실용서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승화시킨 전아(典雅)하고 힘차며 기품이 높은 귀족적인 특징을 지님.


자호(自號)하면서 삼대의 정(鼎), 진한와(秦漢瓦) 중의 원시적 의미의 특징으로 심미취향에 영향 주었다. 추사는 '이기(離奇)한 그림은 오히려 나를 좋아하는데 전(篆)은 단청(丹靑)이 아니라고 말하네(이기작편애아(離奇作偏愛我), 위시전비단청(謂是篆非丹靑))'라는 말에서와 같이 바로 금석학에 대한 깊은 공력이 전통예술 중의 '괴' 하고 '졸' 한 요소를 발굴해 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정판교, 김동심, 오창석은 모두 중국 비학의 개척자이며, 자각적으로 '괴(怪)', '기(奇)'의 필적을 남긴 사람들이다. 추사의 '기괴' 한 묵적(墨蹟) 또한 이들의 예술 실천과 때를 같이 하여 비학의 역사에 한 페이지를 남겼다.

김응현(金膺顯)은 추사의 예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쓰고 있다.

추사서법 중 예서는 그 대종을 이룬다. 특히 예서에도 서경례(西京隸)(전한례(前漢隸))와 동한례(東漢隸)(후한례(後漢隸))로 구분하여 서경례(西京隸)는 파세(波勢)가 없고 동경례(東京隸)는 파(波)가 있어 일반으로 팔분(八分)이라고도 칭하고 있다. 한경명(漢鏡銘)[秋史 隸書 臨漢鏡銘(일부)〈그림 10)] 등 김문(金文)과 한와(漢瓦)를 비롯하여 한비(漢碑) 중에도 촉도제각(蜀道諸刻)에 특히 주목하였음은 추사예(秋史隸)의 기본(基本)이 되었다고 보여 진다.13)

추사의 예서가 그의 서체 중에서 가장 출중함을 피력하고 추사가 "예서(隸書)는 서법(書法)의 조가(祖家)"라고 하였으며 "예법(隸法)은 방경(方勁)과 고졸(古拙)을 상(上)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 졸한 곳은 또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예(漢隸)의 묘는 오로지 졸한 곳에 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추사는 예서를 씀에서 고졸미의 표출을 위해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를 강조하였는데 이는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내면의 온축(蘊蓄)이 무르녹아 손끝에서 피어나야 한다는 지고(至高)한 이념미의 구현에 근본을 두고 있다.

추사가 39세에 쓴 예서〈호고유시수단갈(好古有詩搜斷碣), 연경루일파음시(研經婁日罷吟詩)〉(그림3)대련은 등석여(鄧石如, 1743-1805)의 아들 등전밀(鄧傳密)에게 써 보낸 것이었다. 그는 작품의 변관(邊款)에 등석여의 예서와 전서등을 평가했는데, 예서는 이묵경(伊墨卿)의 것이 기고(奇古)하여 오봉각석(五鳳刻石)과 황용자(黃龍字)에다 촉도(蜀道)의 제비(諸碑)를 더하면 그 문경(門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피력하였다.

한편 호암미술관 소장 작품〈산숭해심(山崇海深), 유천희해(遊天戲海)〉(그림 4)에서는 위의 작품과 또 다른 자연을 만나게 해준다.〈산숭해심〉의 뜻은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이고〈유천희애〉는 '하늘에서 놀고 바다에서 노닌다'는 뜻이다.

그림 3 김정희, 호고연경(好古研經) 〈129.7×29.5cm〉
그림 3 김정희, 호고연경(好古研經) 〈129.7×29.5cm〉
그림 4 김정희, 산숭해심 유천희해(山崇海深 遊天戲海) / 조선 19세기 중반, 42×207×2cm, 호암미술관
그림 4 김정희, 산숭해심 유천희해(山崇海深 遊天戲海) / 조선 19세기 중반, 42×207×2cm, 호암미술관

13) 金膺顯,『秋史 書體의 形成과 發展』, (韓國의 美⑥, 秋史 金正喜 1988.10.) 185쪽.


이 작품의 필획들은 마치 폭풍우 바람에 날아갈 것 같고 풍랑(風浪)에 휩쓸려 갈 것만 같은 충격적 기운을 주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카타르시스적인 정신적 정화(淨化)를 얻게 한다. 지필묵은 자연스런 운동에서 거스르는 힘, 저항력인 마찰력을 최소화하려는 측면에서 발달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빠르고 거친 필획은 강제적 힘이 아닌, 강한 감흥(感興)이 일어나 이 동력에너지가 허한 통로를 통하여 화면에 쏟아져 나오는 창작과정에서 가속도가 붙어 모필에 강력한 운동 마찰력이 생긴 자연스런 결과이다. 추사의 독특한 서체는 그 조형미가 회화적 요소들과도 잘 융합한 화의적(畵意的) 서풍(書風)임을 볼 수 있다. 유홍준은『완당평전』에서 이 작품에 대해 현존하는 작품 중 최대이며 전예행서가 함께 어우러진 괴가 가장 강한 작품이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예서에서의 섭렵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그의 예서 작품으로는 장법이 특이하고 필법이 고졸한〈사서루(賜書樓)〉(그림 5), 두려울 정도로 흉험(凶險)한〈죽로지실(竹爐之室)〉(그림 7)과〈산숭해심(山崇海深)〉(그림 4) 및〈유천희해(遊天戲海)〉(그림 4), 청아(淸雅)하고 고의가 있는〈신안구가(新安舊家)〉(그림 6),〈은지법신(銀地法臣)〉(그림 8), 추기(醜奇)하고 괴란(怪亂)한〈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그림 1),〈구오복일일수(九五福一日壽)〉(그림2) 등이 있다. 그의 예서는 개별적인 것들을 극히 제외하고 대부분 작품들이 음양의 배비(配備)가 훌륭하다. 그의 이런 예서 작품 가운데는 기괴한 풍격(風格)이 있는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한예(漢隸)의 흉험(凶險), 고졸(古拙)한 풍격(風格)을 풍긴다. 그가 강조하는 음양설은 예서에서 극히 일부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도입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예서의 서풍은 고졸하고 흉험하다.14)

김기승은 "'기괴한 추사체'로 명필이 된 그의 서체"라고 하면서『초산저(樵山著)』의 평을 인용하는데, 다음과 같다.

그림 6 김정희, 신안구가(新安舊家)
그림 6 김정희, 신안구가(新安舊家)
그림 7 김정희, 죽로지실(竹爐之室) / 조선 19세기 / 30.0×133.7cm
그림 7 김정희, 죽로지실(竹爐之室) / 조선 19세기 / 30.0×133.7cm
그림 8 김정희, 은지법신(銀地法臣) 121.1×28.8cm, 개인소장
그림 8 김정희, 은지법신(銀地法臣) 121.1×28.8cm, 개인소장
그림 5 김정희, '사서루'(賜書樓), 종이에 먹, 27.0×73.5cm, 개인 소장
그림 5 김정희, '사서루'(賜書樓), 종이에 먹, 27.0×73.5cm, 개인 소장
추사의 예해자(隸楷字)에 대하여 모르는 자(者)는 괴(怪)라 말하고 약간 아는 자는 어리둥절 만해서 진기를 모른다. 대체로 글씨의 묘오(妙吾)를 얻으려면 법을 떠나서도 안 되는 동시에 법에만 구애되어서도 안 된다. 추사가 쓴〈유숙사산방(遊肅寺山房)〉의 편제(扁題)를 보면, 어떤 자(字)는 굉장히 크고 어떤 자는 아주 작으며, 한 자에서도 위가 넓고 밑이 좁으며, 자에 있어서도 머리칼 같이 가는가 하면 석가래 같이 굵기도 하다. 그래서 보는 자(者)로 하여금 마음과 눈을 놀라게 한다. 마치 조발란복(粗髮亂服)의 무례자(無禮者)의 모습과 같다. 이런 필치(筆致)는 무슨 자득(自得)의 공(功)이 아니고는 얻을 수 없는 경지(境地)로서, 선불(仙佛)의 힘으로 진(塵)을 떨치고 천외(天外)에 초연(超然)한 자세(姿勢)와 같다. 동속(東俗)의 서자(書字)는 대개 부란(腐爛)하지 않으면 노망(鹵莽)하거니와 이 사자(四字)도 역시 전공(全功)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때에 전공(全功)을 자임(自任)하는 자(者)가 있을지 라도 그 길이 추사에서 출발(出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4) 오명남, 앞의 논문, 135-140쪽.


추사의 서예에 대한 평가는 대략 이러하다. 이 단락의 평가에서 주목할 것은 법을 떠나서도 안 되고 법에 구애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과, '선불(仙佛)의 힘'과 '천외(天外)에 초연(超然)한 ' 전공(全功)이라는 것과 다른 때에 전공(全功)을 자임(自任)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그 길의 출발점은 추사라는 것이다.

추사의 글씨를『초산잡서』에서 유최진은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글자의 획이 혹은 살찌고 혹은 가늘며, 혹은 메마르고 혹은 기름지면서 험악하고 괴이하여, 얼핏 보면 옆으로 삐쳐나가고 종횡으로 비비고 바른 것 같지만 거기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하는데서 추사체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추사체의 운필에 있어 방원(方圓) 혼용, 용묵에 있어 윤갈혼융(潤渴混融), 점획에 있어 태세(太細) · 장단(長短) 측도의 대비, 결구(結構)에 있어 비정형(非定形)구조, 장법(章法)에 있어 자간 · 행간의 운필(運筆)의 지속(遲速)이나 글자자체의 대소(大小)대비, 서체에 있어 비학과 첩학의 성과를 해 · 행 · 예서 등의 각체에 혼용에 있다고 한다. 여기서 추사체의 또 다른 특징이 도출되는데, 그것은 서로 다른 정반대의 이질적이고 극단적인 조형요소를 한 화면에서 조화롭게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추사 隸書의 虛和的 古拙美

추사는 과천으로 돌아와 졸(拙)함을 말하고 있다. 기교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기교를 감추고 졸함을 존중하는 것이다. 추사가 강상시절 새롭게 발견한 경지인 괴의 가치와 졸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노자(老子)는 "교묘의 극치는 가장 졸렬한 것처럼 보인다."[大巧若拙《老子》45章]고 하였다. 이는 눈에 아름답게 띄거나 교묘한 그림은 아직도 미숙한 것이다. 고졸(古拙), 즉 일견 졸필처럼 보여도 실은 자연스러움과 소박하고 청아한 맛이 풍기는 데에 지극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이다. 유안(劉安)이 말하는 "교는 졸만 못하다"[ 巧不若拙,《회남자 淮南子》人間訓]라는 것 또한 실로 기교는 서투른 것만 못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추사는 괴가 결코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개성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추사는 이를 허화(虛和)라고 했다.15) 추사체의 괴는 '기(氣)'의 글씨로 말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서 얻어낸 경지가 곧 '허화'이다. 추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즘사람들이 써낸 글씨를 보니 다 능히 허화하지 못하고 사뭇 악착한 뜻만 많아서 별로 나아간 경지가 없으니 한탄스러운 일일세. 이 글씨의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허화한 곳에 있으니 이는 인력으로 이르러 갈 바가 아니요, 반드시 일종의 천품(天品)을 갖추어야만 능한 것이며, 심지어 법을 갖추고 기(氣)가 이르러 가면 한 경지가 조금 부족하다 해도 점차로 정진되어, 스스로 가고자 아니해도 곧장 뼈를 뚫고 밑바닥을 통하는 수가 있게 마련이라네.16)

위의 내용으로 보아 추사는 '허화'의 경지를 동경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장자(莊子)가 추구했던 허(虛)17), 즉 무위(無爲)18)의 세계와 일맥상통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5) 유홍준,『완당평전』, 학고재, 2002, 712-714쪽 참고. 16) 金正喜,『阮堂全集』권4, 김석준에게, 제4신.『완당평전』, 713-714쪽 재인용. 17) 동양회화는 허(虛)를 중시한다. 허에 대한 강조는 노장사상이 끼친 영향이다. 노장 철학은 '허무를 근본으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즉, 감각기관으로 얻은 형색과 명성의 틀을 탈피해야 비로소 大美(진정한 아름다움)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허는 필획 사이와 작품 주변의 여백 부분을 가리킨다. 실(實)은 점과 선이 작품에 머문 부분을 일컫는다. 동양예술은 허를 더 중시하기에 허로써 실을 생기게 하고 실(實)에 노력을 두어 허와 실이 상생(相生)하고 허 가운데 실이 있도록 해야 했다. 임태승,『소나무와 나비』, 심산문화, 2004, 213-217 참조. 18) 무위(無爲;노자)-무작위, 자연주의.


올바르면 편안해지고, 편안하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분명해지면 스스로를 허하게 할 수 있다. 스스로를 허하게 하면 새삼 무슨 일을 하지 않게 되고, 그러면서도 자연의 대도(大道)와 하나가 되어 하지 않는 일이 없게 된다(正則靜, 靜則明, 明則虛, 虛則無, 無則無爲而無不爲也).『莊子』,「庚桑楚」19)

동양의 자연철학자 장자의 형이상학적인 '허'의 의미는, '허무를 근본으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즉, 감각기관으로 얻은 형색과 명성의 틀을 탈피해야 비로소 '대미(大美;진정한 아름다움)'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허는 필획 사이와 작품 주변의 여백 부분을 가리킨다. 실(實)은 점과 선이 작품에 머문 부분을 일컫는다. 허를 더 중시하기에 허로써 실을 생기게 하고 실에 노력을 두어 허와 실이 상생(相生)하고 허 가운데 실이 있도록 해야 했다. 이것은 공자가 말한 '지락(至樂)의 경지'와 장자가 주장한 '허(虛)로 인한 무위(無爲)' – 허하면 무슨 일도 하지 않게 되나 하지 않는 일이 없게 된다는 특히 '어떠한 사적인 이득과 상관없이 지혜로움으로 최선을 다하는 지극한 즐거움(至樂)' 근거가 되어주는 셈이다. 이렇게 '허(虛)라는 기준'으로 아집(我執)을 버린 마음은 도가사상과 동양미학을 통해 손가락의 힘이 '허' 할 때 우주의 '기(氣)'가 화면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즉 인위적인 힘을 가하지 않고 자연의 힘만으로 움직이는 것을 무위(無爲), 허(虛)의 상태라 할 수 있다.

1841년 추사가 56세 때(헌종7년) 초의 스님을 위해 대흥사 노전(爐殿) 현판으로 써준〈일로향실(一爐香室)〉(그림 9) 현판글씨는 초의(草衣)의 선실(禪室) 이름인데, 완당이 예서로 써 준 액자가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20)〈일로향실〉은 "화로 하나 있는 다실"이라는 뜻이다. 뜻도 좋고 글씨도 아름다워 완당 현판 중 명품으로 손꼽는다. 노전이란 법당에 아침저녁으로 향과 부처님 공양을 일과로 받드는 스님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이 글은 허소치가 제주도로 추사를 찾아갔다. 오는 편에 초의 스님에게 보내졌는데, 예전의 추사의 예서보다 필획이 가늘어지고 우아해졌음을 알 수 있으며, 추사의 새로운 조형적 감각이 느껴진다.〈일로향실〉(그림 9)은 예산 화암사에 써준〈무량수각〉(그림10),〈시경루〉(그림 11)와 마찬가지로 예서체 중에서도 전한 시대의 고졸하면서도 힘 있는 글씨체를 기본으로 하면서 글자의 구성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디자인해 추사체의 참 멋을 느끼게 한다.

그림 9 김정희, 일로향실(一爐香室) 〈32×120cm〉
그림 9 김정희, 일로향실(一爐香室) 〈32×120cm〉
그림 10 김정희, 무량수각(无量壽閣) 〈67×186cm〉
그림 10 김정희, 무량수각(无量壽閣) 〈67×186cm〉
그림 11 김정희, 시경루(詩境樓) 〈30×100cm〉
그림 11 김정희, 시경루(詩境樓) 〈30×100cm〉
그림 12 김정희, 일로향각(一爐香閣) 〈68×170cm〉
그림 12 김정희, 일로향각(一爐香閣) 〈68×170cm〉

20) 추사와 초의의 평생에 걸친 교분을 보여주는 편지 글로 다음과 같다. 중이 와서 초의의 서한을 전하고 또 다포(茶包)도 전해 주었네. /이곳의 샘 맛은 바로 관악산(冠岳山) 한 맥에서 흘러나온 것인데,/ 두륜산(頭輪山)에 비하면 갑을(甲乙)이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역시 공덕(功德)의 삼사(三四)는 있겠기에 빨리 보내 온 차를 시험해 보니 샘 맛도 좋고 차 맛도 좋아서 바로 한 조각 희환의 인연이었네. /이는 차가 그렇게 만든 것이요, 편지로 그런 것은 아니니, 그렇다면 차가 편지보다 낫단 말인가? /더구나 근일에는 일로향실(一爐香室)에 죽 머물러 있다니,/ 무슨 좋은 인연이 있는 거요? 왜 갈등을 부숴 버리고 한 막대를 멀리 날려 나와 이 차의 인연을 같이 아니하는 거요? /또한 근자에 자못 선열(禪悅)에 대하여 자경(蔗境)의 묘가 있는데,/ 더불어 이 묘체(妙諦)를 함께 할 사람이 없으니, /몹시도 선사와 한 번 눈썹을 펴고 토론하고 싶은데, /이 소원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소./ 약간의 졸서가 있어서 부쳐 보내니 거두어들이기 바라오./ 비 오기 전의 잎(雨前)은 얼마나 가려 놓았는지. /어느 때나 (내게로) 부쳐 보내 이 차에 대한 굶주림을 진정시켜 주려는가!/ 날로 바라며 불선. 향훈에게 가는 한 장의 편지는 행여 전달해 주기 바라네.


〈일로향각(一爐香閣)〉(그림 12) 글씨는 통도사에 걸려 있는 현판 글씨이다. 1847년 팔공산 은해사(銀海寺)에 큰 불이 나서 절의 거의 모든 전각이 타버려 3년 이상의 중창 끝에 추사에게 여러 전각의 현판을 부탁했다. 당시 영천 군수였던 이학래(李鶴來)가 쓴「은해사연혁변(銀海寺沿革辨)」을 보면 '은해사의 불당(佛堂)인 대웅전, 종각인〈보화루(寶華樓)〉(그림13)가 모두 추사의 글씨이며, 노전(爐殿)을 일로향각이라고 했는데, 이도 역시 추사의 예서다' 라고 했다. 아마도 이 글씨는 은해사의 것을 모각한 것인 듯하다. 추사 예서 중의 백미로, 제주 시절 이후의 작품이다.

제주 시절 이후의 글씨로 보이는〈동국선원(東國禪院)〉(그림 14)글씨는 해남 대흥사 선원의 편액이다. 이 작품도 매우 고졸한 글씨이다.

과천 시절 작품으로 작품〈공산무인(空山無人)〉(그림 15)은 "공산무인(空山無人), 수류화개(水流花開) 빈산에 사람은 없으나 물은 흐르고 꽃은 핀다." 이는 소동파의 나한송(羅漢頌) 가운데 한 구절로, 인구에 회자되는 내용이다. 공(空)자나 유(流)자의 구성은 추사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준다.〈공산무인(空山無人)〉(그림 15)은 문자와 회화적 요소들 간의 유기적 결합을 통하여 삶에서 체득된 본성이 우러나 온 결과이다. 즉, 그는 서화불분론(書畵不分論)의 입장에서 시 · 서 · 화 일치사상으로 "글씨는 그림처럼, 그림은 글씨처럼"이라는 의미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렇게 그는 글씨나 그림이 법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에 이르면 자연히 우러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림 13 김정희, 보화루(寶華樓) 〈97×210cm〉
그림 13 김정희, 보화루(寶華樓) 〈97×210cm〉
그림 14 김정희, 동국선원(東國禪院) 〈35×113cm〉
그림 14 김정희, 동국선원(東國禪院) 〈35×113cm〉
그림 15 김정희, 공산무인(空山無人) 〈47×151cm〉
그림 15 김정희, 공산무인(空山無人) 〈47×151cm〉

필법에서 가속도에 의해 속도가 너무나 빨라진 필획은 자칫 가벼워 보여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어서 금기시 되어왔다. 어설프게 다루다가는 낭패 보기 쉬워 금기시 되는 법칙조차도, 자연에서 느낀 특별한 감흥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과감히 시도해 훌륭하게 소화시킨 경지를 뛰어넘은 추사의 기예에 이 극과 극의 서로 다른 작품을 추사 한 사람이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순수하고 허한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추사는 이러한 열린 마음으로 천변만화한 자연의 이치를 받아들일 수 있었고, 심수상응(心手相應)에 의해 숙련의 여유를 가진 허한 손으로, 또한 부드럽고 허하도록 역사 속에서 개선되어온 모필을 매개로 모든 것이 일체가 되어 화면에 표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21)


21) 최현우,「추사 김정희의 서화작품에 나타난 바른 집필법 고찰- 자연과학적 측면에서」『추사연구』제 5호, 추사연구회 2007. 8쪽.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쓰셨다는 서울 강남 봉은사(奉恩寺)의 현판인〈판전(板殿)〉(그림 16)은 어린 아이 글씨와 많이 닮아 있다고 평가된다.22) 보통 불경 등의 경판을 보관하는 전각을 대장각, 장경각이라 부르는데, 유독 이곳만은 '판전'이라 부른다. 봉은사 판전은 1856년(철종7년) 남호(南湖) 영기 (永奇) 스님이 조성한 80권 본 화엄경소(華嚴經疏)를 봉안하기 위해 지었다. 이때 남호 스님의 부탁으로 쓴 것이〈판전〉이란 편액이다. 판전의 '선계비불'은 획의 굵기에 다양한 변화가 있어 울림이 강하고 추사체의 파격적인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다.〈판전〉은 고졸한 가운데 무심의 경지를 보여주는 명작이다. 유년과 노년의 시절은 자연의 선천적인 힘이 육체의 인위적인 힘보다 강하여 손가락의 힘이 자연스럽게 허(虛)함으로 갈 수 있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추사의 노년의 손모양이 어린 시절과 비슷하게 형성되어 글씨 또한 유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아무런 의지나 미련도 남아있지 않아 '추사체의 당당한 멋스러움' 조차 사라진 이〈판전〉이라는 순수한 두 글자는 바른 집필법의 기본 바탕이 되는 기준 '허(虛)의 완벽한 재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점의 속된 기운이나 일호(一毫)의 기교도 없어 항상 대해도 싫증이 나지 않는 작품이다. '고졸(古拙)'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글씨로서, 추사가 이 세상에 유언 같이 써 놓고 간 글씨다. 추사도 이〈판전〉과〈압구정(狎鷗亭)〉이 자신이 쓴 편액 중에 스스로 잘 썼다고 말했다.

말년 71세인 과천시절 완당이 남긴〈대팽두부(大烹豆腐)〉(그림 17)는 1856년 당시 71세 추사의 마지막 예서체 작품이라고 전하며 그의 서체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명작이다. "최고의 반찬이란 두부나 오이와 생강과 나물(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최고의 모임이란 부부와 아들 · 딸과 손자(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23)"라고 대련(對聯)으로 쓰여 있고, 조그만 글씨로 "이것은 시골늙은이의 제일가는 즐거움이다"라고 덧붙여 써 놓았다. "비록 허리춤에 말(斗)만큼 큰 황금인(黃金印)을 차고, 먹는 것이 사방 한길이나 차려지고 시첩(侍妾)이 수백 명 있다 하더라도 능히 이런 맛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행농(杏農)을 위해 쓴다." 글의 내용만큼이나 글씨 또한 소박하고 욕심없고 꾸밈없는 순후함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글씨의 골격에는 역사적 연륜조차 느끼게 하는 옛 비문의 졸(拙)함이 뼛속까지 배어 있다. 그러니 엄청난 기교이면서도 그 기교가 드러나지 않고 그저 천연스럽고 순박하게만 보이는 '무기교의 기교'라는 한국의 미를 보이는 작품이다. 진정한 행복은 부귀영화가 아닌 '소박하고 평범한 생활과 단란한 가정'이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깊은 이타심을 느낄 수 있다. 유홍준은〈대팽두부(大烹豆腐)〉글씨를 결국 완당이 살아온 인생의 종착점이 어디였는가를 말해주는 명작 중의 명작이라 칭송한다. 글 내용과 글씨 모두가 완당의 예술이 평범성에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잘 쓰겠다는 의지를 갖지도 않은 상태에서 절로 드러난 불계공졸의 경지로 본다.

그는 예서를 쓰는데 있어 아들 상우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말 한 바 있다.

그림 16 김정희, 판전(板殿) 〈73×213cm〉 봉은사
그림 16 김정희, 판전(板殿) 〈73×213cm〉 봉은사
예법(隸法)은 가슴 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들어있지 않으면 손에서 나올 수 없고, 가슴 속의 청고고아한 뜻은 또 흉중의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들어있지 않으면 능히 어깨 아래 손가락 끝에서 발현되지 않으며 또 심상한 해서(楷書)같은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모름지기 가슴 속에 먼저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추는 것이 예법의 장본(張本)이며 예를 쓰는 신결(神訣)이다.

22) 유홍준,『완당평전』, 학고재, 2002, 761쪽 참고. 23) 此爲村夫子第一樂上樂, 雖腰間斗大黃金印, 食前方丈侍妾數百, 能享有此味者幾人, 爲杏農書, 七十一果


요컨대 추사가 만년에 와서 강조하는 기(氣)와 흥(興)이 넉넉하고 고르게 가라앉은 비움[허(虛)]의 허화로움과 고졸함의 가치는 그의 글씨에 반영되었다. 추사가 추구했던 괴가 괴한 것 아니라 아무 이유가 없는 천연스러운 경지로 나아간 것이다. 이러한 경지는 중국처럼 위압적이고, 이지적이지도 않으며, 일본처럼 기교를 부리거나 결벽성을 강조하지도 않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가식 없이 필세(筆勢)에서 호방하고 자연스럽게 한국인의 심미의식을 반영한 조형이라 하겠다.

그림 17 김정희, 대팽두부(大烹豆腐)
그림 17 김정희, 대팽두부(大烹豆腐)

마치며

한예의 고졸한 기백을 가진 추사의 예서는 그의 서체 가운데서 가장 출중한 것으로 보여 진다. 추사는 연행 이후부터 30대에 옹방강을 통해 정법을 익혔다면 40대에는 바로 옹방강의 토대가 된 구양순법을 체득하면서 정법의 극점에 도달했다. 과천시절(1852-56)에 무르녹아난 추사체의 기괴(奇怪)와 고졸(古拙)함의 미학은 정법의 자기해체나 파괴의 결과물인 것이다. 추사체는 운필과 용묵에 있어 방원(方圓:둥글고 모가 남)과 윤갈(潤渴:기름지고 마름)의 혼용, 점획에 있어 태세(太細:굵고 가늘기) 장단(長短) 측도(測度:기울기)의 대비, 결구에 있어 비정형(非正形) 구조, 장법에 있어 글자 대소대비, 서체에 있어 비학과 첩학의 각체가 혼용되어 있다. 서로 다른 정반대의 이질적이고 극단적인 조형 요소를 한 화면에서 조화롭게 만들어낸다. 즉 글자의 점획이나 짜임새, 글자간의 배치를 문제 삼는 장법 등에서 서로 다른 극단적인 대비 속에서도 전체적으로는 조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추사 공간경영의 특징이다.

그의 예술론은 법고를 통한 독자적인 창신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그 기저에 존고(存古) 정신이 자리하고 있다. 존고는 전통주의라 할 수 있다. 전통론에서는 고전적인 고졸미를 추구하지만 창작론에서는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괴(怪)를 추구한다. 이것이 김정희의 예술론에서 나타나는 양면성이며 겸(兼)의 미학이다. 고졸미에서는 온축된 내면의 미의식을 강조하지만 파격미에서는 미의식의 파격적인 표현을 강조한다. 고졸미가 내용적인 것이라면 파격미는 형식적이다. 김정희는 이처럼 대립적인 미 개념을 자신의 예술세계에 융화시켰다. 결론적으로 추사는 조선 서단에서 유행하던 '동국진체'를 극복하고 서고의 원래적인 미의식을 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서체를 창조한 것이라고 하겠다. 당시 시대적 상황속에서 지나치게 기교적이고 형식적인 방향으로 흘러가 버린 서체를 극복하기 위해 인격과 인품이 작품을 통해서 구현되어야함을 강조한 것이 유학의 근본정신인 '문자향 · 서권기'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미학적으로 순수하고 고박한 원초적인 미에 바탕을 둔 것은 한국민족의 핏속에 흐르는 무속적인 요소가 추사의 필묵으로 모질고 굳세게 삶을 헤쳐 가는 샤먼적 민족혼의 전달이 예서에서 괴와 고졸미로 한국예술의 정신을 드러냈다고 하겠다. 이는 일부러 가식적으로 하고자 한 괴(怪)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발현된 괴의 미학이 추사체를 통하여 드러내는 것이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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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論文類 吳明南,「圓嶠와 秋史의 書藝 比較 硏究」, 成均館大學校博士學位論文, 2004. 최현우,「추사 김정희의 서화작품에 나타난 바른 집필법 고찰- 자연과학적 측면에서」『추사연구』제 5호, 추사연구회 2007. 黃秀煥,「추사의 사상과 추사체 연구」, 전남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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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게재: 회화이론 / 회화지 17호(2010) 41–51쪽 · 원본 PDF 41쪽 ↗

이 지면의 도판

그림 1 김정희,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추사 예서의 기괴와 고졸의 조형성그림 1 김정희,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그림 2 김정희, 구오복일수(九五福一壽)추사 예서의 기괴와 고졸의 조형성그림 2 김정희, 구오복일수(九五福一壽)
그림 3 김정희, 호고연경(好古研經) 〈129.7×29.5cm〉추사 예서의 기괴와 고졸의 조형성그림 3 김정희, 호고연경(好古研經) 〈129.7×29.5cm〉
그림 4 김정희, 산숭해심 유천희해(山崇海深 遊天戲海) / 조선 19세기 중반, 42×207×2cm, 호암미술관추사 예서의 기괴와 고졸의 조형성그림 4 김정희, 산숭해심 유천희해(山崇海深 遊天戲海) / 조선 19세기 중반, 42×207×2cm, 호암미술관
그림 6 김정희, 신안구가(新安舊家)추사 예서의 기괴와 고졸의 조형성그림 6 김정희, 신안구가(新安舊家)
그림 7 김정희, 죽로지실(竹爐之室) / 조선 19세기 / 30.0×133.7cm추사 예서의 기괴와 고졸의 조형성그림 7 김정희, 죽로지실(竹爐之室) / 조선 19세기 / 30.0×133.7cm
그림 8 김정희, 은지법신(銀地法臣) 121.1×28.8cm, 개인소장추사 예서의 기괴와 고졸의 조형성그림 8 김정희, 은지법신(銀地法臣) 121.1×28.8cm, 개인소장
그림 5 김정희, '사서루'(賜書樓), 종이에 먹, 27.0×73.5cm, 개인 소장추사 예서의 기괴와 고졸의 조형성그림 5 김정희, '사서루'(賜書樓), 종이에 먹, 27.0×73.5cm, 개인 소장
그림 9 김정희, 일로향실(一爐香室) 〈32×120cm〉추사 예서의 기괴와 고졸의 조형성그림 9 김정희, 일로향실(一爐香室) 〈32×120cm〉
그림 10 김정희, 무량수각(无量壽閣) 〈67×186cm〉추사 예서의 기괴와 고졸의 조형성그림 10 김정희, 무량수각(无量壽閣) 〈67×186cm〉
그림 11 김정희, 시경루(詩境樓) 〈30×100cm〉추사 예서의 기괴와 고졸의 조형성그림 11 김정희, 시경루(詩境樓) 〈30×100cm〉
그림 12 김정희, 일로향각(一爐香閣) 〈68×170cm〉추사 예서의 기괴와 고졸의 조형성그림 12 김정희, 일로향각(一爐香閣) 〈68×170cm〉
그림 13 김정희, 보화루(寶華樓) 〈97×210cm〉추사 예서의 기괴와 고졸의 조형성그림 13 김정희, 보화루(寶華樓) 〈97×210cm〉
그림 14 김정희, 동국선원(東國禪院) 〈35×113cm〉추사 예서의 기괴와 고졸의 조형성그림 14 김정희, 동국선원(東國禪院) 〈35×113cm〉
그림 15 김정희, 공산무인(空山無人) 〈47×151cm〉추사 예서의 기괴와 고졸의 조형성그림 15 김정희, 공산무인(空山無人) 〈47×151cm〉
그림 16 김정희, 판전(板殿) 〈73×213cm〉 봉은사추사 예서의 기괴와 고졸의 조형성그림 16 김정희, 판전(板殿) 〈73×213cm〉 봉은사
그림 17 김정희, 대팽두부(大烹豆腐)추사 예서의 기괴와 고졸의 조형성그림 17 김정희, 대팽두부(大烹豆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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