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의 그림에서 박수근을 읽는다.


우리가 그림을 보면서 느끼는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화가마다 다르게 화폭에 그려낸 독특한 형태, 즉 조형미에서 기쁨을 느끼거나, 또는 서로 다르게 조합된 색채들에서 즐거움을 느끼거나, 또는 그 그림이 보여주는 스토리텔링의 의미를 깨달으면서 정신적 교감을 느끼거나, 혹은 그 그림 속에 나타난 시대적 배경을 음미하면서 인지적 기쁨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칸트를 대표로 하는 형식주의자들이 전자의 경우를 강조한다면, 헤겔과 같은 내용 우선론자들이 후자의 경우를 대변한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림을 감상하면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기쁨 중의 하나가 바로 그림 속에 서 그 화가의 캐릭터를 발견하면서 느끼게 되는 기쁨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그림 속에서 그 독특한 형태와 색채와 더불어 그 화가가 그린 시대에 대한 이해, 그 화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 등을 읽어내면서 그 화가의 고유한 내면을 만나게 된다. 즉 형태와 색채를 다른 방식이 아닌, 바로 이 방식으로 만들어 낸, 그리고 배경과 주제를 다른 방식이 아닌, 바로 이 방식으로 바라보게 만든, 화가의 내면을 읽게 되는데,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을 그 사람의 그림을 통해 하나하나 발견해 나가는 기쁨은 결코 작지 않은 기쁨이다. 나는 유독 박수근의 그림에서 그러한 기쁨의 극대치를 맛보았다.
박수근의 그림을 보면서 왜 그가 빨래터에서 빨래하는 여자들이나 동생을 업고 있는 소녀나 노상에서 물건 파는 아낙네들을 주로 그렸을까, 그리고 왜 인물들의 형태를 그토록 단순하게 그렸을까, 또 그는 왜 색채를 주로 흙갈색이나 무채색 톤으로 그렸을까, 더 나아가 인물들의 색채와 배경의 색이 별로 구별되지 않게 그렸을까, 그리고 궁극적으로 화면을 화강암 표면처럼 보이게 하는 독특한 마티에르 기법을 창안해냈을까 등등의 의문을 하다보면, 그 모든 것이 그의 내면에서 비롯된 것임을 읽어 내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박수근이라는 인간의 고유한 인간성을 오롯이 발견하게 된다.
박수근은 주로 노점에서 장사를 하는 여인들, 장사를 끝내고 머리에 무언가 저녁거리를 이고 바삐 집으로 돌아가는 여인, 아기를 업고 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는 소녀 등을 그렸다. 이 때 배경으로 줄곧 등장하는 것이 바로 겨울나무이다. 그리고 이때 겨울나무는 비록 화려한 이파리들은 매달려 있지 않지만, 그 튼튼한 줄기며, 사방으로 막힘없이 뻗어나간 가지들로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어 우리에게 결핍감을 느끼게 하기 보다는 오히려 안정감과 견실함을 느끼게 해준다. 지독히 가난했던 시절, 엄마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노점에 나가 앉아 있지만, 저녁시간이 되면 종종 걸음으로 식구들에게로 돌아오고, 엄마가 없는 집에 대신 동생을 업어 키우는 소녀의 시선은 반은 등에 업힌 동생에게, 나머지 반은 머지않아 돌아올 엄마를 향해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그들의 끈질기게 생명을 길러내는 일은 마치 겨울나무가 비록 아직 잎을 피우지는 못했지만 줄기와 가지를 꼿꼿이 키워내는 모습을 닮아 있다. 아마도 박수근은 이와 같이 겨울나무와 한국 여성들이 보여주는, 자기 본업에의 충실을 표현하기 위해 그들의 형태를 단순하게 형상화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다른 다양한 삶의 양태들, 그리고 서로 다른 특별한 인간 군상의 모습들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무의미한 것이리라. 다른 가족이나 이웃과 유리된 채 고립된 자아의 모습도, 타인을 짓밟아 자기의 이익을 취하는 탐욕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가 해야 할 일, 즉 가족을 먹여 살리고 생명을 키워내는, 삶의 진정한 본업에 충실한 사람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듯 자기 일에 열심이면서 동시에 이웃에게도 따스한 관심을 표현하고 있다. 빨래터에서 빨래하면서, 그리고 길에서 장사를 하면서 그들은 늘 반은 고개를 이웃에게로 돌리고 있다. 박수근의 그림에서 군상의 모습은 서로 다르지 않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자기 일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이웃과 정을 주고받는다. 이와 같은 인간의 본질적인 인간상의 측면에서 바라볼 때 인간 개개인의 차이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겠는가.
뿐만 아니라 박수근이 그린 인간은 배경과도 확연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단지 인물의 윤곽을 검은 선으로 구별해 놓고, 인물의 옷 색깔이 조금 다를 뿐 그들은 배경과 한 데 어우러져 있다. 박수근의 그림에서 배경이 인물을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거나, 배경이 인물을 압도하지 않는다. 멀리서 보면 서로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둘은 함께 있다. 심지어 박수근의 인물들의 얼굴은 그들이 뿌리내리고 있는 흙을 닮아 흙빛이다. 박수근의 인물들은 그들이 태어난 배경을 혐오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철저히 그리고 묵묵히 순응하고 있을 뿐이다. 마치 겨울나무가 겨울을 이겨내듯이.
박수근은 다른 화가들처럼 인생의 시기에 따라 소재와 화풍이 바뀐 화가가 아니었다. 박수근은 자기가 발견한, 혹은 추구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더욱 더 천착해 나갈 뿐이었다. 요사스럽고 번잡한 말을 잃어버린, 형태의 단순함을 보여주는 돌부처의 모습에서 무한한 아름다움을 느낀 박수근은 이제 마티에르 기법, 즉 붓 칠을 하고 말리고 다시 붓 칠을 하는 과정을 여러 번 함으로써 화면을 (우리 땅에 흔한 화강암의 표면과 같은) 울퉁불퉁하게 하는 기법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제 그는 선한 심성을 갖고 열심히, 그리고 한결 같이 자기 본업에 충실한 사람의 모습에 더 깊은 중후함을 부여할 수 있었으며, 그리하여 불멸에 가까운 변치 않음을 형상화시켜냈다.
이와 같이 박수근이 형상화시켜낸 인간상은 결국 박수근 바로 그 자신이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가난과 고난 속에서도 가족과 이웃에 대한 애정을 잃어버리지 않고, 묵묵히 그리고 변함없이 자기 일에 충실할 수 있었던, 그의 인간성을 재발견함으로써 필자는 무한한 위로와 용기를 느낄 수 있었다. 탐욕과 허영, 거짓과 사기가 횡행하는 우리 동시대인들에게서도 겉모습을 한 꺼풀 벗겨내면 그 밑바닥에는 박수근이 그려낸 우리 민족의 민족성이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원 게재: 미술관을 찾아서 / 회화지 17호(2010) 52–53쪽 · 원본 PDF 52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