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의미학 서화의 세계...
먹의미학 서화의 세계...
전북도립미술관 2010.10.15~11.21
노희선 (호남제일고등학교 2학년)
한국화라고 하면 따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사실적인 묘사와 화려한 색채, 그리고 원근법, 투시법 등을 써서 정말로 화폭 안에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서양화만 주로 접한 우리들이라면 단순한 선과 흑백으로 이루어진 단조로운 한국화는 지루하고, 시시하다고 여기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건 나에게도 별로 다르지 않은 사실이었다. 나에게 한국화란, 우리나라의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생소하고 어색한 것 이었다. 나는 미술관 입구를 들어서면서부터 계속 고민하고 심란해했다. 한국화에 대한 내 지식이란 학교에서 얼마 없는 수업시간, 미술시간에 배운 것이 전부였다. 아주아주아주 유명한 작품 두어개. 이름만 알고 있을 뿐인데, 내가 한국화를? 이걸 보고 뭘 느낄 수 있을까?
한국화라고 하면
따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사실적인 묘사와 화려한 색채,
그리고 원근법, 투시법 등을 써서 정말로 화폭 안에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서양화만 주로 접한 우리들이라면
단순한 선과 흑백으로 이루어진 단조로운 한국화는
지루하고, 시시하다고 여기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강렬한 점은 없지만
수수하고 담백함으로써
멋을 자랑하기에 오히려 단순하기에
더욱 아름다운 것이 있는 법이다.
제대로 된 감상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다. 그리고 지금 역시 고민하고 있다. 내 짧은 지식으로는 내가 전시된 작품들을 보면서 느낀 감동과 감상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감상한 한국화는 따분하기는 커녕 흥미진진하고 우아하기까지 한, 멋진 작품들이었다.
첫 번째 전시실은 남정 최정균 선생님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온통 잘 알아보지 못하는 한문으로 빼곡한 전시실이었지만 나는 그 작품들을 흰건 종이요, 검은건 글씨로다 하는 감상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한지 위에서 고고하게 씌어진 한문의 글씨체가 너무 우아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과서나 한자쓰기 책에서 보는 활자로 찍힌 한문과는 다르다. 자를 대고 쓴 것도 아니고 컴퓨터나 도장으로 찍어낸것도 아닐텐데, 가지런히 씌인 글자들은 비록 그 뜻을 모른다 할지라도 커다랗게 울린 종의 반향처럼 잔잔하게 가슴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이 전시실에는 시 뿐만 아니라 그림도 있었다. 시만 가지런히 씌인 것도 멋있지만 그림과 한문이 함께 있을 경우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다. 그림이 글씨를 설명하고 글씨가 그림을 설명한다. 수많은 먹의 향연 중에서 곱게 핀 수려한 연꽃이나 하얗고 검은 세상 사이에서 붉게 피었기에 더욱 아름다운 벚꽃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종이에서 선 몇 개로 떠올라서 날 바라보는 달마도도 있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유려하게 그어진 선들이 모여서 그림이 되고 글씨가 되고 의미가 담겼다. 난 하나의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라고 느꼈다. 한 획, 점 하나,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종이까지 모두 함께 어우러져서 하나의 작품이 되었다. 흰 종이를 모두 덮어버려서 종이 그 본래의 빛깔이 하나도 드러나지 않는 서양화와는 달리 또 다른 맛이 있었다. 문득 나는 내가 처음으로 한국화 작품들을 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그 전에는 교과서에서나 슬쩍 보고 지나갔을 뿐 이렇게 두 눈으로 직접 종이 위를 지나간 먹의 흔적을 보지는 못했었다. 붓에 있는 먹의 양, 붓을 놀리는 빠르기 등에 의해 일어나는 다양한 작품의 면모를 보면서 나는 다음 전시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다음 전시실은 정말로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첫 번째 전시실 역시 멋진 작품들이 가득했지만, 나는 내심 한문이나 한시, 한문 서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감상문을 써야 할 지 막막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두번째 전시실에 가득 걸린 벽천 나상목 선생님의 그림들은 주로 맑은 산수화들이었다. 정말로 청명하고 깨끗한 그 그림들을 보면서 한시름 덜기도 했지만, 처음으로 제대로 한국화를 접한다는 생각에 한껏 들떴던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만큼 그림들은 고요하고, 조용했으며, 고아했다. 남정 최정균 선생님의 작품들이 양반들이 썼을 법 한 시서화가 한데 어우러진 옛날 선비들의 재현작이었다면 나상목 선생님의 작품들은 옛 조선시대의 화가들이 그렸었던 아름다운 강산의 모습을 그대로 화폭에 담고 있었다. 어떻게 먹의 농담만으로 이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 신비로운 안개에 한번 감싸인 그림들 안의 산에는 터럭이 흰 신선이 하나씩은 꼭 살고 있을 법 했다.
서양화처럼 복잡한 색채를 쓴 것이 아니다. 화면을 답답할 정도로 꽉 채우지도 않았다. 공백이 있기에 그 곳에 공간이 존재한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것을 화폭에 채워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마 우리나라의 화가들이 유일하지 않을까. 흔히들 여백의 미, 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냥 하얗게 비워둔 종이를 보고 여백의 미라고 하진 않는다. 적절한 곳에 적절한 양으로 펼쳐진 흰 공백은 그림에 순수함과 담백함을 더해주며 동시에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표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나는 나상목 선생님의 그림에서 보일 듯 말듯한 바위와 산들을 보고, 느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이 있는 것 처럼, 그리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이 있는 것이다. 아니, 그리지 않아야만 전해지는 것이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전시실. 석전 황욱 선생님의 글씨. 처음 전시실에 들어와서 첫 작품을 마주했을 때는 이게 대체 뭐지, 하고 어이없어 했다. 나는 한자를 잘 아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학교에서 수업을 받는 만큼 몇몇 자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글씨에서는 내가 아는 한자를 하나도 찾을 수 가 없었다. 아니, 알아볼 수 가 없었다. 악필법이라고 소개된 이 서체는 단구법, 쌍구법처럼 우아하게 붓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온 힘을 다해 붓을 주먹으로 꽉 움켜쥐고 글을 쓰는 독특한 서체다. 그래서일까, 앞서 본 작품들과는 달리 황욱 선생님의 작품들은 투박하고 두꺼우면서 거칠었다. 예쁘고 유려하고, 갈대처럼 낭창낭창 유연한 글씨들만 보아 온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마치 바위산을 보는 느낌을 받은 것은, 괜히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이 서체들이 보면 볼수록 정겨워지고 인물도 없는 작품에 감정이입을 하게 되었다. 마치 목이 말라 물을 찾는 것처럼, 나는 다른 어느 전시관들보다도 더 열심히 이곳의 작품 제목들과 설명들을 읽었다. 90살이 넘은 선생님이 깡마른 손으로 어쩌면 손가락보다 더 두꺼울지 모르는 붓을 꽉 움켜잡고, 떨리는 손으로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을 이 작품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마치 돌을 깎아 그 안에서 형태를 꺼내는 오랜 작업을 하는 것처럼, 단단한 인내심과 끈기로 써 내려갔을 글들은 강하게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실로 노익장이었다. 곧지 않은 획, 그리고 떼지 않고 한 번에 써 내려간 글자 하나하나가 눈길을 잡아 끌었다. 나는 어쩌면 이 글씨들을 오래오래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마지막의 커다란 전시실에는 강암 송성용 선생님의 작품들이 있었다. 첫 번째 전시실에 들어가기 전에 앞서 본 짤막한 영상에서, 강암 송성용 선생님은 완전히 진하지 않은 농담으로 곧은 대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영상처럼 전시실의 한쪽 벽에는 온통 대나무들이 가득했다. 사군자중에서 절개와 강직함을 상징하는 대나무는, 그렇기에 수많은 선비들의 벗이 되었고 스승이 되었다. 그 대나무들이 그림 속에서 더욱 단단하면서도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송성용 선생님의 글씨는 깔끔하고 또박또박 씌인 서체가 있는가 하면 그 나름대로의 유연함으로 신비로울 정도였다. 여기에도 한국화가 있었는데, 벽천 나상목 선생님의 그림과는 조금 달리 부드럽다고 할까, 포근한 느낌의 그림들이었다. 특히 병풍에 그려진 사계절이 인상 깊게 남았다.
마지막 전시실까지 모두 돌아보고, 사진작가 분에게 부탁해서 특히 인상에 깊게 남은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해독할 수는 없지만 서화는 보는 것만으로도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할 것 같은, 준엄한 기운이 있었다. 특히 석전 황욱 선생님의 서체와 벽천 나상목 선생님의 산수화를 몇 장 더 찍었다. 우연히 기회가 닿아 감상하게 된 한국의 우아한 그림들. 문을 나서면서 나는 조금 후회했다. 진작에 한국화에 관심을 둬서 이곳에 오기 전에 조금 더 많이, 깊이 알고 와서 봤으면 조금 더 나은 감상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면 좀 더 잘 느끼고 잘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지만 평소 같았으면 나른하고 졸려했을 일요일에 만난 한국화는 나에게 호수에 작은 조약돌이 만든 잔잔한 파동처럼, 혹은 화선지에 떨어진 먹물 한 방울처럼 마음에 퍼졌다. 다음에 또 서화를 감상할 기회가 찾아온다면, 지금 가슴 속에 퍼진 파동을 간직해뒀다가 그 때 다시 한 번 꺼내보려고 한다. 어떤 강렬한 점은 없지만 수수하고 담백함으로써 멋을 자랑하기에, 오히려 단순하기에 더욱 아름다운 것이 있는 법이다.
원 게재: 미술감상 / 회화지 17호(2010) 78–81쪽 · 원본 PDF 78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