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동에 깃드는 예술인들
지금 내가 존재하는 곳, 현재 머물고 있는 공간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 환경과 배경이 곧 정서의 텃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과 일터는 행복과 불행을 가름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일상을 지배하는 '집' 이야말로 더 말할 필요가 있으랴. 예술가에게 집은 쉼터이며 일터이다. 먹고 자고 쉬는 실용적인 공간으로 그치지 않는다. 전업작가는 물론, 생계를 위해 직업을 가지고 있는 작가들에게 집 혹은 작업실은 창작의 산실이기도 하다.
전주의 서학동에 예술가 몇 사람이 깃들어 살기 시작했다. 화가 이경태·진창윤·한숙·정하영, 거문고 연주자 안은정, 작곡을 하고 연주를 하는 이형로, 그의 아내인 글쟁이 김저운(필자), 그리고 몇 주 전 귀향한 연극배우 이경은과 그의 남편으로 시인의 꿈을 가슴에 묻어둔 채 술을 연구하고 빚어내는 술 연구가 유상우….
불과 1~2년 사이에 앞집, 옆집, 혹은 10~20미터를 사이에 두고 예술가들이 모여 살게 된 것은, 우연이지만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운명이라면 너무 거창할까? 아니, 이 서학동이 우리를 찜해 놓고 있다가 불렀는지도 모른다.
이 대대적인 역사를, 이곳에 먼저 발을 디딘 순서대로 엮어볼까 한다.
아무래도 이사를 해야겠다고 벼르며 오가던 무렵, 이상하게도 서학동이 마음속에 들어왔다. 내게 온 첫 이미지는 '동네' 라는 것이었다. 높고 화려한 건물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적한 골목길 따라 따닥따닥 붙은 나지막한 집들. 무 배추 호박이 싱싱하게 자라는 담벼락 사이사이 손바닥만 한 텃밭, 그 가장자리를 정겹게 둘러싼 과꽃…. 노인 몇 분이 길가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한담을 나누는 모습도 평온해 보였다. 어느 집에서나 문만 열면 하늘이 보일 것 같았다. '서학동棲鶴洞' 이란 지명도 운치를 더했다.
전주 지역의 문화가 1번지라고 할 수 있는 교동이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있어 남천교만 건너면 되니, 걸어서 불과 5~6분. 게다가 땅 값이 쌌다. 그 사이 여기저기 알아보았는데,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낑낑대며 한참 올라가는 곳도, 도심과 인접한 변두리도, 재개발지역이니 뭐니 해서 땅값이 턱없이 비쌌다. 이렇게 모두 한곳으로 몰려가는 사이, 이 동네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통에 소박한 옛 모습 그대로를 묵묵히 지녀왔던 것이다. 그야말로 문화의 사각지대였다. 우리 부부는 이 동네에서 한옥 한 채를 샀다. 낡았지만 비교적 땅이 넓어 큰 마당을 가질 수 있게 된 게 가장 기뻤다. 처마 밑까지 우거진 철쭉이며 향나무 같은 것들을 모두 쳐내니 마당이 훤해졌다. 비틀어지고 썩어가는 기둥들을 튼튼한 목재로 바꾸고 기와도 새로 얹었으며 흙으로 벽을 쌓았다. 공사를 하는 여덟 달 동안 행랑채에서 임시로 살았다. 공사 현장에 거주한다는 게 내게는 무엇보다 힘들었다. 그러나, 일이 끝난 저녁 마당에서 삼겹살을 구워먹고 막걸리 한 잔 하던 일, 머리 위 빨래줄에 주렁주렁 빨래가 널려 있는데 그 아래 밥상 하나 놓고 대여섯이 모여 밥 먹던 일들이 되레 재미있었다고들 말한다.
작업실까지 갖추어놓는 데 거의 일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옮겨 심은 감나무며 모란이 잘 자라 내년에 잎이 나야 일은 끝나는 셈일 게다. 우리가 집짓기를 시작했을 때, 이경태 화백도 근처에 집을 하나 샀다. 모악산 화실을 오래 지켜왔는데 너무 멀고 비워야 할 때가 되어 고민하던 중이었다. 우리 '예술가 경제' 로는 집을 산다는 게 버겁기 마련이나, 역시 다른 곳에 비해 값이 싸서 다행이었다.
그의 감각과 안목으로, 길가에 방치돼 있던 음습한 공간은 멋진 아틀리에로 변신했다. 집의 바깥이며 내부는 온통 하얗게 칠했다.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지중해와 그리스 식의 느낌을 살려내고 싶었다' 고 한다. 나는 '서학동 백악관' 이라 놀려대고….
'적요寂寥'. 이는 이 화백이 최근 쓰고 있는 이름이다. 아직도 내겐 '경태 선생님' 이 친근한데, 그는 은근히 강요하는 눈치다. 이경태, 아니 적요 화백은, 온통 하얀 이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다.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고, 커피를 마시며 사는 모습은 외로움도 화려해 보인다. 날씨, 계절, 세상의 모든 일에 민감한 사람. 기쁨도 우울도 그에게 가면 치명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인지 이 공간에서 마시는 커피는 '전설 바다의 밤 물결' 처럼 가슴 속으로 흘러든다.
화가 진창윤 씨를 만난 자리에서 이 동네로 이사 온 내력을 얘기했더니, 그도 삼례 아파트를 팔고 오겠다고 했다. 마침 골목 안에 숨어든 한옥 한 채가 나왔던 터였다. 그는 담백한 성미대로 정말 쉽게 정했다.
그때부터 그의 노동이 시작되었다. 며칠 큰 공사만 인부를 사서 해 놓더니, 대부분의 일들은 혼자 해결해 나갔다. 벽을 털고 바르고, 천정 한쪽엔 하늘이 보이도록 창을 내고, 화장실엔 타일 조각들을 모아 모자이크 하고, 문을 고치고, 페인트를 칠하고…. 일을 하다가 민예총 일이 있으면 중단하고 나갔다. 벽에 바람이 씽씽 불든 비가 새든. 일요일마다 고백교회에 나가 예배 보고, 전시회도 열었다. 그리고 또 집일을 했다. 이사한 지 일년이 다 돼가건만, 아직도 손 보아야 할 곳이 많다고 한다. 이 일들이 다 끝나야 노총각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화가 한숙은 우리 집 길 건너 커다란 한옥 한 채를 구입해 들어왔다. 본채 옆 가게 자리였음직한 사랑채가 있어 작업실로 쓰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어릴 적 한옥에서 자랐다는 한숙은, 거리낌이 없는 듯했으나, 그녀의 남편 재윤 씨는 처음엔 몹시 망설이는 눈치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도 매우 흡족해 하는 모양이다.
얼마 전에 우리가 키우는 진돗개 쇼팽과 왈츠 사이에서 새끼 다섯 마리를 얻었는데, 그 중 한 마리를 그 집에 주었다. 그놈은 어느 덧 제법 자라서 어쩌다 내가 가면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고 뒹군다. 그러니, 우리는 그 집 개의 친정이 된 셈이랄까?
거문고 연주자인 안은정도 이 거리의 주민이 되었다. 차를 타고 가다가 길가에서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집을 구하러 다닌다고 했다. 왜 이곳을 택하려느냐 물었더니, "다른 데보다 싸니까요." 했다. 우리는 길가에 서서 한바탕 크게 웃었다.
술 잘 마시고, 유난히 크게 잘 웃는 안은정은 주말마다 시댁이 있는 목포에 가느라 자주 보진 못한다. 그러나 언제든지 지나가다가 담 너머로 고개를 빼고 "선생니임~" 하고 불러댄다.
한 달 전, 이경은 유상우 부부도 이 거리 끝의 이층집으로 이사했다. 경기도 고양에서 5~6년 살았는데, "언니, 우린 다시 전주로 갈 거야." 하면 난 콧방귀를 꾸었다. 모두 말로만 그러는 것이려니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약속을 지켰다. 이제 유상우는 더 좋은 술을 연구하고 빚어내기를, 이경은은 다시 연극 무대에 서기를 고대해 본다.
서학동. 남고사와 초록바위 사이의 이 마을에 우리가 조심스레 비집고 들어왔을 때 이웃 사람들은 넉넉하고 따순 품으로 품어주었다. 생각할수록 고마운 일이다. 우리는 각자 자기 일에 열중하다가, 시간이 나면 서로를 찾는다. 연장이 필요하면 빌리고, 무거운 물건을 옮겨야 하면 도움을 청한다. 맛있는 게 있으면 나눠먹는다. 커피는 이경태 화백의 아틀리에에서 마실 때가 가장 풍부하고 맛있다. 주말이면 모여서 술 한 잔 나누는데, 어김없이 노래판이 벌어진다. 노래 한 자락 가슴에 품고 돌아가다가 그래도 열정이 남으면 교육대학 근처 생맥주집에 가서 다시 목을 축이기도 한다.
가끔 음모를 꾸미기도 한다. 이 동네에 더 많은 예술인들이 모였으면 좋겠다, 길가의 건물이며 담벼락을 모두 그림이나 조각으로 바꾸면 어떨까? 골목음악회나 거리 전시회를 열어보자, 그래서 동네 사람들 모두 길거리로 나와서 노래하고 춤추는 작은 축제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 아직은 제각기 집안 정리며 할 일에 바쁘니 내년부터는 뭔가…. 그런 말이 나올라치면, 아! 나부터 머쓱해진다. ■
\* 필자 김저운은 전북 부안 출생으로 전북작가회의 회원이며, 전주영상미디어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 산문집 〈그대에게 가는 길엔 언제나 바람이 불고〉 등이 있다.
원 게재: 작업실 탐방 / 회화지 18호(2011) 22–25쪽 · 원본 PDF 22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