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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좀 게으른 자의 반 미친 이야기

이구학(수필가)

내가 나를 보았을 때에 세 가지 특질이 있다. 좀 게으른 편이고, 가끔 미치길 좋아한다. 그런 까닭에 무슨 일이든지 단순화하길 좋아한다.

이런 특질은 아내를 만났을 때에도 그대로 발휘되고 만다. 좀 게을렀기에 이 여자 저 여자 뒤를 쫓아 다닐 수 없었으며, 미치길 좋아하고 단순화하길 좋아하니 이"한 여자"꽁무니만 따라다닐 수 밖에…. 그녀를 만나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자 나는 적당히 게으름을 피우면서 이 "한 여자"에게 미치기 시작했다. 만나는 여자도 이 한 사람으로 단순화하면서…. 그래 첫사랑은 맺어지지 어렵다는 세간의 통설(?)을 뛰어 넘어 장장 7년여의 교재 끝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시방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두고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어찌어찌 하여 집에 PC를 들여놓은 다음에도 이런 특성은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 사랑하는 아내는 침실에 혼자 두고 2층 서재에서 창문이 훤 해오도록 밤샘을 부지기수로 하던 중 아, 이 무슨 불행인가. "부전자전""부전여전"이런가. 애들과 PC앞 자리다툼을 하게 된다. 이 녀석들도 지 애비를 닮아 좀 게으르고 미치길 좋아하며 단순화하길 좋아한단 말인가? 별 수 없지. 지들이라고 별 수 있겠는가? 지 애비를 닮을 수밖에….

PC를 장만할 당시, "애들에게 컴퓨터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려면 3개월쯤은 게임이든 뭣이든 저희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둬라"는 H대학교 전산학과장의 말을 믿고, 학교공부가 어찌되든 상관하지 않고 꾹꾹 눌러 참을 수밖에…. 그런데 이건 또 뭔가. 하루가 멀다하지 않고 키보드를 박살내곤 하는 것이었다. 80년대 초였으니까 집에 PC가 있는 집은 드물었기에 PC를 들여 놓았다고 하니 이 녀석들 친구들이 몰려올 수밖에…. 결국 친구들과 함께 두드려대니 키보드도 지칠만했다. 방법을 연구해야만했다. 당시 PC는 8비트에서 286으로 막 넘어오던 시점이라 지금의 튼튼한 키보드와는 품질이 근본적으로 달라 조금만 험하게 다루면 자판이 먹히질 않곤 했다. 몇 번을 고쳐다 주곤 했으나 이틀을 견디지 못했다. 결국 이 녀석들의 불똥은 PC판매점으로 옮겨 붙게 된다. 한 열흘쯤 왔다 갔다 하자 판매점 사장도 지쳤는지 묘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가. 가지고 간 키보드를 고쳐주더니 여벌로 두개를 더 주면서 두개가 고장 나면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일주일에 한번정도만 가게 되었다.

어쨌든 이런 우여곡절을 거친 결과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아들 녀석은 컴퓨터공학과를 다니다 지금 군복무 중이고, 큰 딸애는 애니메이션 계통회사에 다니고 있으며 작은 딸애도 노트북을 가지고 다니며 일을 할 정도가 되었다. 물론 나도 차를 탈 때이면 노트북을 조수석에 안전벨트로 정성껏 모시고 다닐 정도이니까 이 노트북이 내 전용비서인 셈이다. 물론 옆에 없으면 일을 못할 정도이고… 각설하고,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하자. 지천명의 강을 중간쯤 건너던 어느 봄, 주말이었다. 고향 선배이자 소설가이신 K형과 우연히 점심을 같이 하게 되었다. 반주도 곁들여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는 대뜸 "형! 요즘 무슨 재미로 살아?"라는 질문을 던졌다. "왜, 자네가 요즘 별 재미가 없는 모양이지?"하시며 그분이 회장으로 이끌고 있는 "삶과 문학"이란 문학동인에 가입하라고 권했고, 그 모임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민이었다. 일단 문학동인에 가입한 이상, 어떤 한 장르에 관심을 가져야 된다는 의무가 내게 주어졌으니 말이다. 가끔 신문의 시론이나 칼럼을 썼던 적이 있어 "수필"공부를 해볼까 생각하다가 매월 J일보에 나왔던 시조를 관심 있게 읽었던 기억이 났고, 마침 "삶과 문학"동인에 시조시인인 P씨가 있어 시조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시조와 연을 맺은 나는 시조공부를 시작하면서도 앞의 세 가지 특질을 그대로 발휘하고 만다. 광주 시내 서점과 J, H대학교의 도서관을 뒤지며 관련 서적을 찾아보았으나 읽을 만한 책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시조를 취급하는 중앙일보, 샘터, 금호문화, 열린시조 등의 작품 평들 중 중요내용들을 메모해가면서, 다시 대학교의 도서관을 뒤져 시조 관련 논문을 찾아 복사하여 읽어대며 거기에 보태가는 한편, 우리말 공부를 하기위해서 국어사전의 ㄱ부터 ㅎ의 끝까지 읽어가며 그 가운데에 순 우리말 중 내게 낯선 낱말들을 노트북의 엑셀 프로그램으로 단어를 새벽까지 정리하기도 했다. 그것이 지금은 1만 6천여 단어로 정리되어 한권의 우리말"사전"이 되어 있고, 시조공부를 위해 메모를 해갔던 것들은 "처음 시조를 시작하는 분들을 위하여…"란 제목으로 여러 시조관련 인터넷사이트와 내가 그 후 또 한번 폭 빠져서 만든 "시조동산"이란 사이트에서 상당히 사랑을 받고 있다.

물론 시조습작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되지도 않은 습작을 가지고서 P시인만 괴롭혔다. 주말이면 내 사무실에서 만나자고 할 때 순한 P시인은 거절하지 못하고 나오곤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나이는 20년 이상 차이가 나지, 알고 보니 내 고교 동기동창의 제자가 아닌가. 그런데도 "소사부(小師父)! 소사부"하며 졸라대니 할 수 없었으리라. 처음 미팅 때에는 말한 마디 없이 그저 멍하니 내 얼굴만 쳐다보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 후 매주 주말이면 만나서 지도를 받곤 했다. 당시 소사부께서는 미혼이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물론 소사부 말고도 그 밖의 여러 시인들께도 무수히 누를 끼치기도 했고?. 이런 우여곡절 끝에 샘터시조상 장원도 하게 되었고 열린시조를 통하여 문단의 말석에 발을 딛게도 되었다. 샘터상 수상소감과 열린시조 당선소감에서 그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뜻에서 P시인의 실명을 쓰면서까지 "소사부(小師父)"께 감사를 표현했고 지금도 사부로 깍듯이 모시고 있다. 그 후에 만나는 시조시인들은 억울하리라. 전라도 정서상 문단 선배이더라도 학교직계 선후배사이이거나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옆의 사람들과의 관계 등으로 여지없이 말을 낮출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내 소사부께서는 그 후 결혼을 하게 되었고 내겐 사모님까지 생겼다. 앞으로 내가 내 허물을 벗을 때까지 영원히 "소사부""소사모"로 계실 것이다.

공자 왈(孔子曰) 지지자 불여호지자(知之者 不如好之者)요, 호지자 불여락지자(好之者 不如樂之者)라 하셨다. 즉,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는 말씀이다. 필자는 여기에 하나 더 붙이고 싶다. 락지자 불여광지자(樂之者 不如狂之者)라고. 즉, "즐기는 자는 미치는 자만 못하다는…"


이 구 학

전북 순창출신. 제26회 샘터시조상 장원, 〈계간 열린시학〉 시조 등단.〈계간 문학춘추〉 수필로 등단했다. 현재 '현대시조포럼' 전문위원, '시조월드' 편집위원, '서은문학회' 및 '광주전남시조시인협회' 부회장, '오늘의 시조학회', '한국동시문학회', '광주수필문학회', '한국문협', '광주문협' '순창문협'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형시집「가면의 나라」(도서출판 고요아침) 가 있다. 인터넷 시조동산 'http://user.chol.com/~vvkab085/'를 운영하고 있다. 조선대와 호남대 교수를 역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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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게재: 수필 / 회화지 18호(2011) 26–27쪽 · 원본 PDF 2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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