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고흐의 그림을 좋아하는 것일까?

○ 지난 여름 방학에 몇몇 고등학교 친구 부부들과 함께 몇 년 동안 준비해온 남프랑스 여행을 다녀왔다. 우리 일행은 세잔이 살았던 액상 프로방스와 고호가 살았던 아르르를 방문했다. 고흐가 마지막 생을 보냈던 정신병원에 걸려있는 고흐의 자화상을 보면서 한 친구의 남편이 고흐의 자화상이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고 말하자, 난 속으로 깜짝 놀랐다. 똑같은 그림도 보는 이에 따라 상당히 다를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다른 한 친구는 고흐의 자화상에 그려 진 절대고독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냐고 나에게 말했다. 나 역시 고흐의 자화상에서 극한적 상황 속에서도 자기를 잃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려는 의지 같은 것을 읽으면서 고흐에게 진한 연민을 느끼고, 또 그의 강인한 자의식과 의지력에 찬탄을 보내고 싶었다.
한국에 돌아오니 예술의 전당에선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타이틀로 한 유럽 명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전시회 명칭으로 내건 걸 보니 적어도 우리나라사람들 중에 고흐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적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면 그 처연한 눈빛, 어떤 이들에게는 신경쇠약 증세를 발견하게 만들기도 하고, 결코 편한 마음으로 감상하기 힘들게 만드는 그 눈빛의 주인공의 그림을 우리는 왜 좋아하는 것일까? 물론 거기에 대한 대답을 그만이 우리에게 선사한, 아무나 감히 흉내 내기 어려운 황홀한 파랑과 노랑의 배합이나 사물의 형태를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드러나게 해주는 그만의 곡선들이 제공해주기는 한다. 그러나 그런 형식미적인 면만을 이야기한다면 고흐의 그림이 갖는 대중에 대한 호소력과 흡인력을 충분히 이야기하기 힘들지 않을까 한다. 물론 이런 형식미가 고흐라는 예술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내면적 이야기와 결코 분리된 것은 아닐지언정.
고흐는 그의 편지를 통해 잘 알려져 있듯이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변변한 벌이도 갖지 못한 채 사랑했던 여자들에게서 버림받았으며, 나중에는 고갱과도 결별한 채 거의 절대적인 고독 속에서 삶을 살았다. 물론 유일한 정신적, 경제적 후원자인 동생 테오만이 예외라고 할 수 있지만,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심지어는 자기가 몸담고 있는 예술세계에서도 소외된 채 가난과 고독 속에서의 삶을 산 고흐.
그런데 그토록 비참한 현실 속에서 그가 보여준 세상은 결코 비참하지가 않다. 아니 비참하기는 커녕 매혹적 색채와 생명력에 충만한 무수한 곡선들의 절묘한 하모니는 그 누구도 함부로 흉내 내기 힘들다. 고흐가 처해 있는 상황을 한번 되돌려보면, 그가 자괴감과 절망감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자기 파괴적인 감정에 빠져 자아를 잃어버리고, 세상에 대한 환멸이나 증오심으로 기나긴 세월을 날려버렸다면, 그토록 아름답고 삶을 찬양하는 그림들이 결코 탄생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루하루 끝없이 반복되는 돈벌이의 지겨움, 한푼 두푼을 계산하며 살아가야 하는 치졸하고 각박하기만 한 일상, 어찌 보면 더없이 지루하게 보일 수 있는 시골 풍경과 구질구질한 일상의 단면들이 그의 붓놀림에 의해 생명력 넘치는 아름다운 세상으로 다시 태어난다. 살아있는 자의 모든 고통을 온 몸에 다 부여받으면서도, 아니 어쩌면 그러한 자이기에 역설적으로 생명이 갖고 있는 근원적인 아름다움과 힘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일까.
그의 그림 속에는 비단 생명을 갖고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나 올리브 나무, 붓꽃과 밀밭만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밤하늘에 빛나는 초롱초롱한 별은 물론이거니와 별을 둘러싼 구름들, 그리고 그것들을 지탱해주는 대기, 심지어 길과 건물 같은 무생물들마저도 생명에 차 쉼 없이 흔들거리며 춤추고, 궁극적으로 생명의 환희를 노래 부르고 있다. 물론 이러한 곡선들이 그의 광적인 정신 상태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극단적인 고독과 고행을 역동적인 삶의 아름다움에 대한 끝없는 경배와 찬양으로 극복하려는 그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으랴.
그의 그림 속에는 비단 생명을 갖고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나
올리브 나무, 붓꽃과 밀밭만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밤하늘에 빛나는 초롱초롱한 별은 물론이거니와 별을 둘러싼 구름들,
그리고 그것들을 지탱해주는 대기, 심지어 길과 건물 같은
무생물들마저도 생명에 차 쉼 없이 흔들거리며 춤추고,
궁극적으로 생명의 환희를
노래 부르고 있다.
'또 돌아와서 작업에 들어간다. 그러나 손에서 붓이 떨어지려고 한다. 나는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다시 3점의 대작을 완성한다. 그것은 폭풍의 하늘에 휘감긴 보리밭의 전경을 그린 것으로 나는 충분한 슬픔과 극도의 고독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오베르의 종말기에 그는 옆으로 길게 된, 그에게 있어 새로운 규격의 그림을 시도했다. 지평선에의 넓은 전망에 대한 그의 잠재의식이 예견한 종말의 의식과 함께, 대지가 폭풍 속에서 바다처럼 사납게 일렁이는 거기에 까마귀가 활개치며 나르는 불안한 화면을 통하여 그는 영혼의 고독과 슬픔을 절규하고 있다. '앞날의 예감도 어둡다. 나는 미래를 행복한 빛 속에서 보는 것은 전혀 되지 않는다.' 절망감은 그를 못견디게 하고 있다.




원 게재: 회화이론 / 회화지 18호(2011) 56–59쪽 · 원본 PDF 56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