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전북 화단의 형성에 관한 연구
글 박성수 (전북대학교대학원 미술학과)
목차 (지면 표기)
전북 근대 화단의 형성 배경
- 전북의 지리적 여건
- 근대의 정치적 상황과 전북 화단
- 조선시대 완상문화와 향유층의 확대
● 전북 근대 화단의 형성 배경
전북 지역은 드넓은 호남평야를 끼고 있어 물산(物産)이 풍부하였다. 안정적인 지역 환경은 많은 선비들이 모여 살게 된 이유가 되었고 그러한 배경으로 이 지역에서는 특히 문인화가 근대에 들어 성행하게 된다. 근대 전북 화단의 대표적인 선비화가로는 이정직(李定稷 1841-1910)이 있으며 그의 고매한 선비 정신을 이어 받은 제자로 조주승(趙周昇 1854-1903)과 송기면(宋基冕 1881-1954) 등이 있다. 이러한 사승관계에서 비롯된 선비화가들은 근대 전북 화단의 중추적 역할을 했으며 그들의 선비정신이 그윽한 전통 문인화는 호남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한편 근대시기에는 그림에 대한 향유층이 확대되고 다양화 되었다. 그에 따른 수요의 증가는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직업화가들에게 좋은 토대가 되었다. 이에 따라 특히 근대 전북 화단에서 직업화가로 왕성한 활동을 벌인 대표적인 작가들로는 채용신(蔡龍臣, 1850-1941)과 황종하(黃宗河) 형제 들이 있다.
이렇듯 근대 전북 화단의 작가들은 일제강점기와 같은 열악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게 된다. 더 나아가 그들의 작품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사랑받고 전승되어 현대에까지 이르게 되지만 실상 그에 대한 연구는 미미한 상태이다. 이에 필자는 근대 전북 화단의 형성 배경을 연구해 보고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전북화단의 특성을 연구해 보고자 한다.
● 전북의 지리적 여건
전북은 예로부터 예향의 도시라 불려왔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는 전라북도의 지리적 특성이 크게 작용하였다. 전북의 회화뿐만이 아니라 판소리와, 음식에 이르는 전통문화 · 예술 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쳤을 전라북도의 지리적 환경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전라라는 말은 북도의 전주와 남도의 나주에서 그 첫 자를 빌어 만든 말이다. 따라서 "온(全)고을에 비단(羅)을 깔아 놓은 듯 아름답다"는 뜻으로, 이는 수려한 산수와 누런 황금 벌판의 자연경관을 비유한 것이다. 전라지역은 조선시대부터 호남(湖南)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도 불리어 왔다.¹⁾
호남지방의 지리는 소백산맥이 남서로 가로지르는데 노령산맥이 파생하여 2대 산맥을 이루며, 여기서 크고 작은 산줄기들이 복잡하게 늘어져 있다. 또 지역상으로는 전라북도와 금강 줄기로 갈라지는 충청남도의 남부지역이 여기에 속한다. 또한 금강, 만경강, 영산강, 동진강 및 섬진강 등이 북동지역에서 서남지역으로 흘러 한국 제일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와 전남평야의 원천을 이루며 농업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²⁾
호남평야와 같은 지리적 특성은 바로 농사와 관련이 있다.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쌀을 주생산물로 하는 농업국이었다. 그리고 벼농사의 역사는 약 3,0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단군신화 속에서도 풍백 · 우사 · 운사 · 주곡 등 농경신의 이야기가 나오고, 농경신을 섬기면서 농작물의 풍작을 기원하는 종교의식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은 고대사회에 있어서 농업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고대사회뿐만 아니라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일상생활은 물론 국가의 경영도 쌀 생산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 즉 정치, 경제, 사회, 예술, 그리고 종교와 의례 등이 쌀의 경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³⁾ 이렇듯 인간 활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쌀은 전북지역의 주된 생산품이었으며 그로인해 문화 전반에 걸쳐 풍부한 자산을 이룩할 수 있었다. 높고 낮은 산과 비옥하고 너른 평야, 그리고 긴 해안선과 바다를 함께 끼고 있어 풍성하게 산출되는 갖가지 산물을 바탕으로 하여 일찍부터 풍류와 멋을 아는 예술의 고장이자 맛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풍족한 삶은 바로 다양한 예술을 잉태 할 수 있는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또 수려한 자연경관과 온화한 기후환경 그리고 다채로운 삶의 양식을 보여주는 전라(全羅)지역은 역사적으로 본래 마한의 땅으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의 옛 영토에 속했으며, 후삼국 시대에 견훤(甄萱)이 후백제를 창건한 지역이기도 하다. 더불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기도 하다. 멀리는 고려시대로부터 가깝게는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민족과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수많은 우국 열사들이 분연히 일어나 국난 극복에 앞장선 의기의 고장이다.
더불어 선사시대부터 고려시대에 걸쳐 고대의 바닷길을 통해 중국이나 일본을 연결하는 대외 교역로로 자리 잡고 있어 한반도에서 선진 문물의 유입통로이자 문화의 선도 지역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고대 시대의 개방성과 선진성은 대외적으로 전라지역이 북으로는 동북아시아의 해류에 이어져 있고, 서쪽으로는 중국과 남동쪽으로는 제주도를 넘어 일본과 접할 수 있는 천혜의 요충적 입지에 힘입은 바 컸다.
이처럼 지리적 요인과 역사적 요인이 결합된 특수한 여건은 전북이 문화의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특히 안정적인 지역 환경으로 인해 지주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양반계층 또한 이 지역에 많이 분포하게 되었고 그 들의 학문과 서 · 화 또한 발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지방의 경제가 활성화 되는 20세기에 들어 전북 화단의 움직임도 더욱 활발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후 국가의 도읍이 한양에 굳건히 자리 잡은 후, 이지역의 사회와 경제, 문화, 인간생활이 여러 측면에서 적잖은 제약을 받게 되는데, 이러한 점은 지리적 위치성, 다시 말해 상대적 원격성(遠隔性)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상대적 원격성이란 역사적으로 중앙정부가 있는 왕도와 멀리 떨어져 위치하고, 중앙과 격리되어 있었다는 것을 일컫는다. 반드시 중앙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전통시대에서는 중앙의 각종 파문(波紋)과 정보, 새로운 혁신적 아이디어 등이 이 지역에 도달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거리 조락의 효과가 크게 작용하여, 많은 경우 중심부에서 벗어난 주변적 위상을 상대적으로 면치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원격성은 다른 한편에서 전라지역에 문화적으로 독특한 성격을 부여해 왔다. 전라지역의 언어, 민요, 민속, 민예, 민가 등에서 국토공간의 타 지역에 비해 그 특색이 뚜렷하고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동시에, 그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따라서 전라지역은 대외적으로 타 지역과 구별되는 하나의 총체적인 문화공동체이자 대내적으로 굳건한 정체성을 견지하고 있는 개성 있는 생활공간이자 인문적 실체임에 틀림없다.⁴⁾
이렇듯 근대 전북지역 화단의 형성은 풍부한 물산이 원동력이 되었으며 중앙과의 상대적 원격성은 다른 지역과 차별되는 독자적인 문화풍토를 영위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 근대의 정치적 상황과 전북 화단
근대 국내의 정치적 상황은 전북 지역 문인화가들이 작품 창작에 몰두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1910년은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강제로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한 해이다. 이 무렵 호남에서는 평소 어지러운 국내의 정세를 서로 토론하고 의지하던 문우(文友)이자 당대의 학자였던 해학(海鶴) 이기(李沂, 1848-1909),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 1841-1910)을 모두 잃는 비운에 맞는다. 이기는 한일합방이 이루어지기 1년 전에, 그리고 한일합방이 이루어지던 그해에 황현은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하며, 이정직 또한 울분과 화를 못이겨 그해에 서거하게 된다.⁵⁾
황현은〈자식들에게 남기는 글〉에서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국가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러 왔는데, 나라가 망할 때에 국난을 당하여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어찌 원통치 않은가? 나는 위로는 황천(皇天)이 상도(常道)를 굳게 지키는 아름다움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글을 저버리지 않는다" 는 글을 남기고 음독 자결 하였던 것이다.
평소 황현과 친분이 두터웠던 이정직 또한 선비의 고매한 인격과 애국심을 가지고 있던 인물로 근대 전북 화단의 토대를 만든 장본인이다. 근대 전북 서화계를 이끌었던 벽하 조주승, 유재 송기면, 설송 최규상, 오당 강동희, 학현 최승현, 유하 유영완등이 바로 이정직의 제자들이다. 이들 또한 이정직에게 고매한 인격과 학문에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선비집안의 내력을 가지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근대화시기에 전북의 선비화가들은 짐짓 일제의 강압에 의한 식민 사대주의로부터 큰 거부감이 있었을 것이다.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벼슬길도 여의치 못한 상황은 평소 여기(餘技)로 삼던 문인화를 통해 민족정신을 드러내고자 하였으며 서화에 몰두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는 조선 말기부터 이어져온 남종화의 유행에 의해 사군자(四君子)가 많이 그려지던 시기였기도 하지만 유독 전북 근대 화단에서 사군자, 그중에서도 지조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대나무가 많이 그려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경향은 중국 남송 말기부터 원대(元代) 초기에 몽고족의 지배하에 나라를 잃고도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은둔 생활을 한 문인들 사이에 대나무가 많이 그려졌던 상황과 비슷하다.
우리의 주권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침탈되던 시기에 전북의 이정직과 그의 제자, 그리고 전북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많은 선비들이 세속과 타협하지 않고 은거하며 무언(無言)의 저항 수단으로 서화에 몰두하였던 것이 전북 근대 화단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조선시대 완상문화와 향유층의 확대
조선시대 후기부터 이루어진 서화문화의 인식 변화는 근대 중앙화단은 물론이고 지방 화단의 활성화에도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서화문화의 인식변화는 조선시대 후기 완상문화로부터 갑오개혁이후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극대화 되었다. 조선시대의 완상문화는 다음과 같다.
사대부 서화가들은 교양의 하나로, 또 자기표현 방식의 하나로 서화를 제작했으며, 이것은 정치를 본령으로 삼는 사대부들에게 대체로 여기로 인식되었다. 조선시대에 서화는 사대부들에게 중요한 것이지만, 집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따라서 종종 완물상지(玩物喪志)⁶⁾로 경계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 때부터 사대부사회에서도 완물상지의 담론을 넘어 서화의 제작과 비평, 소장에 탐닉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특히 경화세족(京華世族)⁷⁾을 중심으로 서화취미가 대대적으로 유행하여 서화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던 바, 화원과 민간화가, 사대부 서화가들의 서화 생산이 급격히 증가했던 것이다. 그 징후로 서화가 일반 서민들의 집에 장식되기 시작하였다.
"벽에는 종규가 귀신을 잡는 그림과 신선이 사슴을 탄 그림을 건다. 병풍으로는 금강산 1만2천봉이나 관동팔경을 그리고, 작은 병풍에는 꽃 · 새 · 나비등을 그린다. 혼인에 쓰는 병풍에는 백자도나 행락도나 곽분양의 행락도나 요지연고를 그린다. 그리고 공적인 잔치 때는 제용감에서 모란을 그린 큰 병풍을 이용한다. 또 문벌이 높은 집안의 혼인 때에도 이를 빌어다 쓴다.⁸⁾
위 인용문은 서울에 사는 일반 서민들의 생활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화가 서민들의 집에 장식되고, 그들의 생활에 활용된다는 점이다. 물론 그림의 내용은 사대부들이 즐기던 소재이다. 서화취미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하나의 문화풍조가 되었고, 예술취미로 인정하는 쪽이었다. 박제가는 서화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푸른 산이나 흰 구름이 먹지는 못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것처럼 서화가 민생에 무관하다 하여 쓸모없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였다. 완물상지를 넘어 서화예술의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이처럼 예술의 심미적 속성은 실용성을 넘어선 또 다른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이 시기 널리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처럼 서화취미가 경화세족을 넘어 중인과 서민 대중에게로 유행되고 일반화되었던 것은 상층계급으로서 사대부들이 즐기던 서화취미에 대한 추수(追隨)와 신분상승의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라 판단된다.
조선후기 경화세족으로부터 발생한 서화취미가 중인과 서민 대중에게로 확산되자, 자연히 서화의 수요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개인은 서화가에게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서화를 주문했으며, 도화서 화원은 여기에 응하여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 외에도 조선전기에 그 활동의 구체적 모습을 확인하기 어려웠던 민간화가가 출현하여 작품을 제작해서 판매하는가 하면, 작품의 거래를 중개하는 중개인과 개방된 공간이나 점포에서 서화를 판매하는 서화포도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⁹⁾
이렇게 조선후기에 와서 양반사회를 넘어 중인과 서민들까지도 서화를 즐기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여러 모로 제한적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서화가의 절대 다수는 여전히 관에 매여 있는 도화서 소속의 서화가 이거나 사대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오개혁으로 인해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사대부 문화의 하나로 존재했던 사대부의 서화 제작도 무의미한 것이 되었고 도화서 역시 없어지게 된다. 이는 과거 국가나 관의 요구에 응하거나, 혹은 사대부의 취미로 존재했던 서화제작이 갑오개혁이후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서화제작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서화의 감상 또한 신분에 관계없이 많은 대중과 접촉할 가능성을 더욱 높이게 된 것이다. 이렇게 조선 후기 완상문화로부터 이어진 서화의 취미는 근대화시기에 이르러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서화의 생산자나 수요자 둘 모두로부터 더욱 대중화될 수 있었다. ▣
각주
1) 국토지리정보원 편 『한국지리지-전라제 · 주편』, 국토지리정보원, 2004, p.25. 2) 장미야, 「1920~60년대 전북 서양화단의 표현경향 연구」, 원광대학교 일반대학원 조형미술학과 박사학위논문, 2011, p.19. 3) 함한희 『열린전북』, 열린전북, 28호, 2011, pp.125~126. 4) 국토지리정보원 편 앞의 책, p.35. 5) 이용엽, 「전북미술약사」, 전북문화역사학회, 2007, p.141. 6) 완물상지(玩物喪志)는 물건에 대한 집착으로 큰 뜻을 잃는 다는 말로 『서경』의 여오(旅獒)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중국 은(殷)나라의 마지막 군주가 성격이 포악하고 백성들에게 재화와 보물들을 거두어들여 호화로운 궁전을 세우고 유흥에 빠져 백성들의 원망이 높았다. 이에 주(周)나라의 무왕이 은의 수도를 목표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미 민심을 잃은 주왕은 궁전에 스스로 불을 지르고 죽었다. 주나라를 세운 무왕은 건국의 공신들에게 각지에 제후로 봉하고 더불어 먼 나라에도 사신을 보내어 자기의 문덕과 무공을 전하고 신하로서 자신을 왕으로 섬길 것을 요구했다. 어느 날 서방의 먼 곳에 자리잡은 사신이 와서 큰개 한 마리를 헌상했고 무왕은 이 진기한 선물을 기쁘게 받고 사자에게 큰 선물을 내렸다. 이것을 본 소공(召公)이 글을 올려 간언하자 무왕은 은나라의 멸망을 교훈삼아 큰 개는 물론 헌상품을 모조리 제후와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고 정치에 전념했다. 두산백과, www.doopedia.co.kr 7) 경화세족(京華世族), 서울에 살면서 권력과 벼슬을 독점하던 세력 8) 유득공 저, 李錫浩 譯, 『京都雜志』, 『朝鮮歲時記』, 東文選, 1991, pp.198~200 ; 김취정 「개화기 화단의 후원과 회화 활동」, 고려대학교 대학원문화재학협동과정 미술사학전공, 2007, p.148 재인용 9) 조선후기에서부터 근대 전환기 까지의 완상문화와 서화 문화의 인식 변화는 이성혜, 「근대전환기 성화의 생산과 유통에 관한 연구」, 부산대학교 대학원 한문학과 박사학위논문, 2010 pp. 7~25참조.
- 판독 참고: 52쪽 우측 단의 소제목이 '고림도(枯林圖)'로 인쇄되어 있으나 내용상 '전북의 지리적 여건'이며, 앞 기사(추사 논문)의 제목이 잘못 조판된 것으로 보입니다.
- 판독 참고: 각주의 서지 표기 일부('전라제 · 주편', '성화의 생산과 유통' 등)는 활자가 흐려 판독이 불확실합니다.
- 이 지면에는 별도의 도판 없이 수묵 붓질 배경 이미지만 사용되었습니다.
원 게재: 회화이론(석사학위논문) / 회화지 20호(2013) 52–55쪽 · 원본 PDF 52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