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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이론

프란치스코 고야의 추의 미학에 대하여

최진희

예술은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추함도 함께 포함되며 추함은 미적 가치 안에서 아름다움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것으로 미의 개념을 추출하기 위해서 부정적 의미를 갖는 상대주의적 속성이다.

글 최진희(전북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전공)

미의 역사와 추의 역사를 분리하지 않듯이 고대부터 많은 예술가들은 미와 추의 조화를 통해 유희의 잔인성을 고발하며 비극을 표현하고 있다. 근대에는 바로크, 사실주의, 낭만주의의 문학과 음악, 미술에서 보여 지는 것처럼 추가 예술의 세계에 자리매김하게 된다. 특히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는 죄수, 병자, 광인, 걸인, 매춘이라는 사회 하층민을 주목하며 비이성적인 존재 인간의 도덕적 타락과 거짓, 위선에 대해 우스꽝스러운, 혐오스러운, 그로테스크 미학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고야의 작품은 추의 미학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고야는 스페인 궁정화가였으나 자유주의자로 솔직하고 계몽적인 예술적 삶을 지향했으며 폭발적인 상상의 창조력으로 화풍을 정의할 수 없는 경지까지 끌어올린 화가이다. 독창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자신의 예술관을 통해 700여점의 회화, 900여점의 드로잉, 300여점의 판화작품을 빼어난 기법으로 제작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유화를 비롯한 수채화, 소묘 및 종교화, 역사화, 전쟁화, 생활화, 정물화, 태피스트리 밑그림과 프레스코화에 걸쳐 광범위한 역량을 발휘한 위대한 화가라 할 만하다.

그의 작품에는 인간의 본성을 탐구한 작품이 많으며 "추"의 특성 중 야기되기 어렵고 망설여지는 주제를 후반기로 갈수록 악마적이라 할 만큼 투철한 리얼리즘으로 병든 세태를 신랄하게 풍자했다. 이런 진보적 정신은 근대 세계에서 요구되는 근대적 태도이며 정신분석학이나 초현실주의 작가 또는 표현주의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세기 말 샤를 보들레르는 '악의 꽃'에서 고야가 "실체가 없는 무형의 것에 대한 애호, 어떤 상황에서 동물적으로 돌변하는 인간의 야릇한 생김새를 그려냈다"고 찬미하였다. 실상 고야만큼 현실 세계의 고통과 슬픔을 꾸준하고 다양하게 그려낸 작가도 드물 것이다. 공포로 채워진 스팩터클, 우울한 만족이나 무시무시한 즐거움을 생산해 내는 것에 대해 매료된다는 것은 추 개념의 핵심적으로 미적 효과를 주는 역할을 한다. 고야의 작품에 담겨진 우스꽝스럽고 추악하고 비뚤어진 형상들과 등장하는 동물들 또한 눈길을 가는데 기괴한 모습과 행위들은 우리를 조롱하는 것도 같고 인간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어떠한 감정을 함께 나누는 것 같기도 하다. 빛과 어두움만으로 표현된 흑백의 극대화와 다의적 의미를 지닌 작품의 주제들을 미루어 보아 예술의 아름다움보다는 "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미는 근원적이며 순수한 시초를 가지고 있지않다. 추 판단은 주관적인 것으로 추에 다가서기란 쉬운 것이 아니다. 그 학문적 연구 역사가 짧고 이론가도 많지 않을 뿐더러 시대나 역사적 시기마다 상대적으로 다양하게 해석되기 쉬우며 그 가치의 전도의 범주가 많기 때문에 그 범주를 정하거나 형태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학문적으로 처음 추의 개념을 정리한 학자는 칼 로제 크란츠(Karl Rosenkranz 1805-1879)로 그의 추의 형태를 가장 체계적으로 설명되었다고 본다. 당시 로젠 크란츠는 추를 미에 예속된 개념으로 보았으나 니체는 "미 판단과 추 판단은 전적으로 주관적이며, 아름다움은 대상의 속성일 수 없다. 미 그 자체도 있을 수 없다"며 추와 미를 독립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런가 하면 미는 한 때 두렵게 여겨진 것에 대한 거부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철학자 아도르노(T. Adorno 1903-1969)는 말하며 미에서 추가 나왔다기보다는 추에서 미가 나온 것이 더 적절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추의 개념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가변적인 것이 된다.

추하다의 의미는 일상적으로 아름답다. 예쁘다, 매력있다에 반대되는 것으로 굉장한, 장려하는, 숭고, 희극적, 표현적이다와 같은 가치의 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다. 역사적으로 비교적 오래된 것이기는 하지만 아름다움과 추함의 의미가 위험스럽게도 이중적이고 모호하다는 사실은 밝혀지며 어떤 철학자들은 미학에서 이러한 용어들을 제거하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떻든 여러 학자들의 추에 대한 개념이 분분하기는 하지만 추는 미와 대립되는 독자적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야의 작품에서 그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스페인의 대표 화가인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Francisco Jose De Goya 1746-1828)는 18세기에서 19세기를 풍미한 여러 예술사조에 속하는 회화사에 두드러진 예술사조에 속한다기 보다 오히려 다양한 사조에 걸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초현실주의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계몽적 현실 비판의 정신은 우리에게 삶과 예술의 밀접성과 인간이 가지는 한계성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그는 1746년 소 귀족 출신의 어머니와 도금장인 아버지에게서 출생했다. 그리고 어린시절 고야는 "나의 스승은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 그리고 자연이다."라고 했으며 벨라스케스의 예술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그는 20대부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였는데 1785년 왕립 아카데미 회화부 부감독에 선출되며 사실상 스페인의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그의 독자적인 상상력일 발휘되기 시작한다. 1788년 발렌시아 대성당을 위해 제작한 배경에서 어두운 존재들이 등장하면서 고야의 색채가 시작되고 있었다. 다시 1789년 궁정화가로 임명되었으나 이는 오히려 고야에게 정치적 시련을 가져오는 불행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당시 스페인 왕정의 정치적 불행과 함께 개인적으로도 큰 불운이 시작되었는데 1792년 나이 46세 젊은 나이에 병명을 알 수 없는 질환을 앓게 되었고 이로 인해 청력까지 잃었다. 이는 오히려 고야만의 작품 특성을 이루는 시기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주문받은 그림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 동기에 따라 일련의 작은 그림들을 그린다. 작품에 중대한 변화가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데 있어서 두 개의 영혼으로 풍자적이고 때로 잔혹하기도 한 고야 자신만이 즐거움을 위해 제작한 독특한 작품들이 제작된다. 청각상실이라는 핸디켑은 외부와 단절된 채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에 전념하게 되는 창조적 열정의 자원이 된 것이다. 특히 1808년 발생한 프랑스와 5년간의 긴 전쟁으로 인한 민중들의 처참하고 힘든 삶들을 작품에 담는 일을 지속하였다. "산적 엘 마라가토의 체포" 등을 제작하였는데 자연스럽고 역동적인 인물표현과 역사적 감동이 생생히 담긴 이들 작품은 고야의 새로운 작품세계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된다. 또한 1808년에는 민중봉기가 일어나 프랑스 군대는 저항하는 스페인 민중을 진압하며 스페인 민중을 처형한다. 그는 6년 후인 1814년에 〈맘루크의 돌격〉이라고도 불리는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이라는 명제가 붙은 그림을 제작하였다. 스페인의 이와 같은 정치적 혼란기를 살면서 지속적인 사회적 내용을 담는 작품을 지속하였으며 1819년에는 "귀머거리의 집"을 구매하여 은둔하기 시작하다 1824년에는 프랑스로 이주하여 최후의 4년을 보르도에서 살면서 많은 데생과 석판화 등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82세의 나이로 1828년에 이곳에서 사망한다.

그의 추의 의식은 그가 살았던 19세기 초반의 스페인 역사상 가장 혹독한 혼란기를 살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내외적 상황과 더불어 그의 내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연적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신념과 상반되는 현실의 인간세계의 암울함과 미래에 대한 환멸과 회의 속에서 지옥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들여다 보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환상적인 괴물과 악마를 폭력과 공포 속에서 불러냈다 조국의 미래를 염려하고 사상가로서 비전을 제시하고자 하며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예감하고 새로운 계획을 착수하여 〈검은 그림〉들을 제작하게 된다. 검은 그림에서 그의 추에 대한 미학을 들여다 볼 수 있는데 붓놀림이나 색채도 묵직하고 원시적이다. 숭고함보다는 천박함을, 광명보다는 죽어있는 공허함을 비언어적인 불확실성을 나타냈다.

〈검은 그림〉들은 전체적으로 사회상을 비판하며 정치인의 타락과 종교인의 부패 그리고 대중들의 의지할 곳 없이 증발해버릴 것 같은 무기력증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들이다. 색이 어둡고 차가우며 침침한 분위기를 자아낼 뿐만 아니라 기괴하고 추한 이미지의 주제가 가진 상징성에서 〈검은 그림〉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이는 새로운 회화나 양식의 시작이 되는 것으로 어떠한 규준도 유용하지 않았다. 이런 화법이 나올 수 있었던 데에는 무의식적 내면 깊은 곳의 성찰과 인간의 이성마저 상실된 시대에 진리는 죽고 미의 가치는 추락해버린 결과로 자신을 끊임없이 되돌아보는 과제의 수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일 이 음산한 검은 그림들을 본 앙드레 말로(1901-1976)가 "현대미술의 인상주의와 표현주의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했다"고 평할 만큼의 시대를 뛰어넘는 비관습적 표현, 인간의 복잡하게 뒤틀린 내면심리를 섬뜩하게 묘사했었다. "추"에 대한 찬미라고 불려질 만큼 고야는 새로운 영역을 열었던 작가였다.


고야, 참회하는 성 베드로(St. Peter Repentant), 1823-25년경, 캔버스에 유채, 29×25.5cm
고야, 참회하는 성 베드로(St. Peter Repentant), 1823-25년경, 캔버스에 유채, 29×25.5cm
고야, 친촌 백작부인, 1800, 캔버스에 유채, 216×144cm
고야, 친촌 백작부인, 1800, 캔버스에 유채, 216×144cm
① 고야, 옷입은 마야, 1802-5, 캔버스에 유화
① 고야, 옷입은 마야, 1802-5, 캔버스에 유화
② 고야, The Quail Shoot, 1775, 캔버스에 유채, 290×226cm
② 고야, The Quail Shoot, 1775, 캔버스에 유채, 290×226cm
③ 고야,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1819-23, 회반죽을 바른 캔버스에 유채, 146×83cm
③ 고야,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1819-23, 회반죽을 바른 캔버스에 유채, 146×83cm
④ 고야, 1808년 5월 3일, 1814, 캔버스에 유화, 266×345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④ 고야, 1808년 5월 3일, 1814, 캔버스에 유화, 266×345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⑤ 고야, 모래 늪의 개, 1819-1823, 회반죽을 바른 캔버스에 유채, 134×80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⑤ 고야, 모래 늪의 개, 1819-1823, 회반죽을 바른 캔버스에 유채, 134×80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⑥ 고야, 마귀의 잔치, 1820-23, 캔버스에 유화, 140×438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⑥ 고야, 마귀의 잔치, 1820-23, 캔버스에 유화, 140×438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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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게재: 회화이론 / 회화지 22호(2015) 28–33쪽 · 원본 PDF 28쪽 ↗

이 지면의 도판

고야, 참회하는 성 베드로(St. Peter Repentant), 1823-25년경, 캔버스에 유채, 29×25.5cm프란치스코 고야의 추의 미학에 대하여고야, 참회하는 성 베드로(St. Peter Repentant), 1823-25년경, 캔버스에 유채, 29×25.5cm
고야, 친촌 백작부인, 1800, 캔버스에 유채, 216×144cm프란치스코 고야의 추의 미학에 대하여고야, 친촌 백작부인, 1800, 캔버스에 유채, 216×144cm
① 고야, 옷입은 마야, 1802-5, 캔버스에 유화프란치스코 고야의 추의 미학에 대하여① 고야, 옷입은 마야, 1802-5, 캔버스에 유화
② 고야, The Quail Shoot, 1775, 캔버스에 유채, 290×226cm프란치스코 고야의 추의 미학에 대하여② 고야, The Quail Shoot, 1775, 캔버스에 유채, 290×226cm
③ 고야,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1819-23, 회반죽을 바른 캔버스에 유채, 146×83cm프란치스코 고야의 추의 미학에 대하여③ 고야,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1819-23, 회반죽을 바른 캔버스에 유채, 146×83cm
④ 고야, 1808년 5월 3일, 1814, 캔버스에 유화, 266×345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프란치스코 고야의 추의 미학에 대하여④ 고야, 1808년 5월 3일, 1814, 캔버스에 유화, 266×345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⑤ 고야, 모래 늪의 개, 1819-1823, 회반죽을 바른 캔버스에 유채, 134×80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프란치스코 고야의 추의 미학에 대하여⑤ 고야, 모래 늪의 개, 1819-1823, 회반죽을 바른 캔버스에 유채, 134×80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⑥ 고야, 마귀의 잔치, 1820-23, 캔버스에 유화, 140×438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프란치스코 고야의 추의 미학에 대하여⑥ 고야, 마귀의 잔치, 1820-23, 캔버스에 유화, 140×438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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