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정 이정직 괴석도(怪石圖)의 조형적 특성
[표제면] (p.44-45)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 1841-1910)은 조선 말기와 근대 초기를 살았던 인물로서 호남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예술가이다.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 해학 이기(海鶴 李沂, 1848-1909) '호남의 3걸' 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그는 유학은 물론 예학(藝學)과 사상, 성력(星曆), 의학, 풍수, 도서, 명물기수지학(名物器數之學)등 생활과 관련된 많은 학문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석정 이정직 괴석도(怪石圖)의 조형적 특성
글 박지예 (전북회화회 회원, 전북대학교 박사)
본문
석정(石亭) 이정직은(李定稷, 1841-1910)은 조선 말기와 근대 초기를 살았던 인물로서 호남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예술가이다. 매천 황현(梅泉 黃玹1855-1910), 해학 이기(海鶴 李沂:1848-1909) '호남의 3걸' 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그는 유학은 물론 예학(藝學)과 사상, 성력(星曆), 의학, 풍수, 도서, 명물기수지학(名物器數之學) 등 생활과 관련된 많은 학문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28세에 연경(燕京)으로 유학을 다녀 온 뒤 성리학을 기반으로 서양 철학 사상을 익혀 심도 있는 철학세계를 구축한 결과 『연석산방미정고(燕石山房未定藁)』를 비롯한 여러 문집을 저술하였다. 석정은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에 근거하여 철학자 칸트와 베이컨을 그의 저서에 『연석산방미정고』 소개하면서 유학사상과 비교 설명하였다. 이러한 점을 들어 그가 폭넓은 분야의 학문을 섭렵하였음을 잘 알 수 있다. 한편 그가 남긴 회화작품을 통해서는 시·서·화 삼절에 능한 문인 화가였음을 잘 알 수 있다. 이정직에 대한 연구는 2001년 『연석산방미정고』 가 국역되면서 그의 철학사상과 문학 등 여러 방면에서 연구가 진행되어지고 있다. 한편으로 2004년 김제시에서 열린 석정 이정직 특별전(石亭 李定稷 特別展)과 학술대회는 이정직의 서예와 문인화가로서의 예술세계가 처음으로 조명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전시를 통해 그의 작품이 매우 수준 높은 경지이며 또한 그가 전북 근·현대화단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제자들이 활발히 활동하며 실상 근·현대 전북화단의 맥을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이정직 연구는 이러한 측면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믿어진다. 이정직은 그가 남긴 유묵에서 볼 수 있듯이 괴석도를 중심으로 화훼, 사군자 등에서 독자적인 회화세계를 펼쳤다. 그는 동시대의 문인화가들과는 다르게 독특한 소재를 선택하였고 그 구성에 있어서 웅장하며 대담하였고 그 형태가 단순하였다. 또한 묵법의 운용에 있어서는 기운생동이 넘치며 사의적인 문인화풍을 지향하였다. 또한 괴석을 즐겨 그린 이유에서 그의 회화세계 및 철학적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는 고법을 충분히 연마할 때 창신(創新)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으로 산수화를 거의 그리지 않은 이유도 산석이 산수의 기본이 되니 이를 먼저 충분히 연마하고자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괴석도 작품으로 연결됨을 알 수 있다. 또한 石을 단순한 자연물로 보지 않고 선비들이 겸비해야할 인격체로서 지성과 지혜의 상징으로 보았다. 이정직의 괴석도는 매우 단순화된 형식과 내면의 본질이 일체화되어있어 담박하고 고상하여 전형적인 선비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이정직 역시 특별한 돌을 애호하고 찬미해 왔던 옛 선비들의 문인풍류를 따라 이를 소재로 많은 시문과 작품을 남긴 것이다. 이렇듯 한국 근대기에 돌을 통해 독자적인 세계를 펼친 이정직의 회화세계가 그동안 연구되지 못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정직의 괴석은 실상 전통적 인식의 괴석이라기보다 인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돌들을 관찰하고 회화한 측면이라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관념적이지 않고 실사를 통해 매우 한국적 화풍을 이룩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본 논문에서 이정직의 출중한 괴석도를 연구하고 이를 통해 한국 근대기에 독자적인 행보를 보인 대표적인 문인화가로서의 그의 위상을 찾아보고자 한다. 석정이 남긴 작품은 돌로만 이루어진 괴석도 8폭과 10폭으로 된 병풍과 함께 사군자, 화훼 병풍 중에 포함된 2점과 낱폭으로 전하는 4점이 있다. 또한 지금까지 조사된 괴석도 작품은 도판1 《석정가묵》 첩에 포함된 6점, 이외 사군자 또는 수목의 배경으로 그려진 것 등 30여점이 전해진다. 그리고 《석정가묵》은 이정직이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하였던 연원을 파악할 수 있는 실물 자료로서 의의를 갖으며 또한 『개자원화전』의 수용과 유통이라는 측면에서도 주목되는 작품이다. 그리고 스스로 뛰어난 문인화 능력을 갖고도 이에 만족하지 않고 오원 장승업의 작품을 임모한 ≪오원재현첩≫, 소치 허유의 작품을 임모한 ≪소치모란법첩≫ 등도 남겼다. 또한 중국역대 유명한 화가들의 화법을 터득하여 그림에서 실제 응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상 그의 남아있는 유품은 그리 많지가 않다. 이는 안타깝게도 그의 나이 54세 때인 1894년 동학혁명으로 동학군들이 전주성에 진입할 때 모두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남아있는 유묵들은 모두 그의 말년에 해당되는 작품들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회화세계를 연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아쉬움이 있다. 이에 따라 본 논문에서는 그의 회화세계 전반을 다루기보다 괴석도를 중심으로 조형적 특성을 연구하며 사군자와 기타 화훼 등을 살펴 이정직의 면모를 정리해보기로 하였다. 본 논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먼저 Ⅱ장과 Ⅲ장에서는 석정이 활동하였던 구한말의 시대적 상황을 점검하고 본 논문에서 연구될 이정직 괴석도의 연원을 파악하기위해 괴석의 역사적 흐름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였다. 나아가 이정직의 생애와 회화세계에 대해 조사하고자 하였다. Ⅲ장에서는 괴석도 이외에 다양한 그의 회화의 형성과 작품의 내용을 살펴 보기위해 그의 문인화에 대한 연원을 추적하고 사군자와 기타 작품들의 화풍을 분석해보자 한다. 그리고 본 논문의 중심연구인 석정의 독창적인 괴석도 작품을 분석하고자 본 장에서는 돌에 대한 역사적인 인식과 정신에 대해 조사하고 그를 바탕으로 동양에서 어떻게 회화로 발전하였는가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하였다. 특히 산수화 속에서 돌에 대한 인식과 함께 산수화 속에 담겨진 돌의 정신이 문인화와 민화로 전개되는 과정과 함께 괴석도가 독자적 화풍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Ⅳ장에서는 본 논문의 주 연구대상인 이정직의 괴석도를 형식과 조형적 특징으로 분석하여 괴석을 표현하는 필묵에 대해 이정직 특유의 묘법을 해석하려 하였다. 이러한 작품 분석에 도움을 얻고자 돌에 대한 인식들을 정리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림에 남긴 시제(詩題)를 통해 그 형성 과정과 흐름을 정리하고자 하였다. 특히 한국적인 독자성을 성취한 이정직 고유의 괴석도를 분석하는데 중점을 두고 연구하였다. Ⅴ장에서는 이정직 회화가 그의 제자들을 통해 어떻게 계승 발전되고 있는지를 간단히 정리하였다. 그리고 그의 회화세계를 밝히기 위해 그의 학문세계와 철학사상, 특히 그의 성리학과 그가 새롭게 받아들인 서양철학에 대해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조사하였다. 이에 대한 연구는 번역된 그의 문고와 그동안 발표된 몇몇 논문들을 참고하였으며, 더불어 그의 문장론을 통해 회화사상의 근원을 찾아보려 노력하였다. 그리고 돌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과 그것이 어떻게 회화에 반영되고 있었는지 간단히 정리하고자 하였다. 특히 조선시대 괴석도가 어떻게 변화하며 근대초기 이정직이 어떻게 한국적 회화로 꽃을 피웠는지가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 생각하였다. 이를 통해 이정직의 괴석도가 한국화단에서 얼마나 의미 있는 작업이었는지 평가해 보는데 본 논문의 주안점을 두었다.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가장 한국적인 감성을 이끌어낸 괴석도를 현대적 조형어법을 통해 표현하여 독창적인 괴석도를 완성하였다. 이정직은 사실 학문과 문장, 그리고 서화의 세계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문인화가라는데 손색이 없다. 본 논문의 연구내용인 그의 그림 세계가 무엇보다 매우 깊을 뿐만 아니라 표현력에 있어서도 조선 말기의 가장 출중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사군자나 기타 화훼 그리고 특히 괴석도에 있어서는 조선후기 강세황이나 김정희 등에 버금가는 뛰어난 화가라고 생각된다. 다만 이러한 삶과 예술이 고난의 시대에 작가를 시골에 파 묻혀 홀로 유유자적하게 하였다. 그래서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아쉬움이 크다.


그동안 그에 대한 연구는 유학을 비롯한 철학사상과 서예에서 다소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의 회화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연구된 바가 없었다. 이정직 회화의 조형적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정직 회화의 조형적 특징
● 첫째로 그가 철저하게 古法에 대해 공부하고 분석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사군자를 비롯하여 여러 문인화 소재들을 공부한 자료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그가 古法을 매우 중요시 한 데는 그의 학문 즉 성리학적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특히 그의 사군자 작품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사군자는 문인화의 중심테마였기 때문으로 보여지며 이정직의 사군자는 古法에 의한 필법과 묘법을 완벽하게 따르고 있다 그러나 古法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해석하고 연구하였음을 『석정가묵』을 통해 확인하였다.
● 둘째, 그가 이처럼 사군자를 통해 古法을 충실하게 연마한 이후 주변의 여러 草木들을 세심하게 관찰하며 사실적 묘사를 하였다는 점이다. 즉 모란, 소나무 등 여러 주요 소재들을 담채를 활용하며 실감나게 표현해 냈다는 점에서 그가 실학정신에 바탕을 둔 실사구시 학문을 하여야 한다는 그의 학문 태도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와 같은 현실의 삶에 바탕을 두고 학문을 하여야 진정한 성리학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였는데 실제로 그의 학문의 폭이 매우 넓었다. 그가 농기구를 비롯하여 여러 생활용구들을 만들고 수리하였다 하며 또한 포탄제조 방법까지 기록해 놓은 자료가 남아있는 점에서 알 수 있다.
● 셋째, 이러한 그의 실학에 바탕을 둔 창작의 세계는 결국 그가 한국적 괴석도를 완성하는데 밑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가 초기 괴석을 연구할 때는 옛 사람들의 묘법에 충실하며 널리 유행하였던 중국식 태호석을 공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자원화전』을 통해 돌의 준법을 연구하며 자신의 세계를 정리하였다.
● 넷째, 둥글고 구멍이 많아 신비감을 자아내는 태호석 외에 정학교를 비롯한 구한말에 주로 그려지던 날카롭고 양식화된 괴석도를 공부한 듯하나 따르지는 않았다. 오직 실제에 바탕을 두고 돌을 관찰하며 필묵의 묘미를 잘 드러낼 수 있는 독자적 양식을 개발해 내었다.
작품 분석
석정 이정직의 작품중 괴석만을 표현하여 선비의 정신세계로 승화시킨 감각적인 현대회화의 모더니즘 형식을 보인다.(도판2) 천년이상의 세월에서도 바위는 버티고 당당한 기세를 보여준다. 그런 괴석을 특히 즐겨 그렸음은 이정직에겐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그는 괴석을 마음으로 알고 이해하는 가운데에 본질적인 특징을 형상에 담아내어 석(石)을 자연의 일부분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인격체로서 지성과 지혜로 선비들이 지향해야 할 지덕의 상징으로 바라보았다.
아래 글은 돌을 지혜와 관련지어 절대적 관점에서 비교한 글이다. 그리고 움직임과 고요함, 통함과 막힘, 민첩함과 둔함 등은 돌과 지혜를 서로 비교하고 그 이유를 살펴 봄으로써 이를 통해 상호 호응적 관계로 승화시켜 설명하였다. 이정직의 다음 글에서도 그 뜻을 확인 할 수 있다.
"聖人은 학문에 있어서 文을 귀중하게 여기었다. 공자는 문왕이 이미 돌아가셨으니, 문(文)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라고 하였다. 참으로 문(文)이 귀중하다 하겠다. 비록 그렇지만 君子는 허문(虛文)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자는 문(文)이 질(質)을 앞서면 겉치레만 잘하는 것이다. 지금 三五(이지석의 호)는 바야흐로 행(行)에 힘써 오직 충신만을 급선무로 여기고 문(文)에 대해서는 반드시 "나는 거기에 겨를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문(文)도 또한 행(行)이니, 어찌 둘로 나눌 수가 있겠는가? 내가 살펴보기에 아름다운 돌은 반드시 채문(彩文)이 있는데 그 문채(文彩)는 본래 자연스러움에서 나온 것이어서 강제로 엄습하여 취한 것이 없이 자연스럽게 행할 뿐이다. 만약 그것을 강제로 행한다면 천착(舛錯)한 것이 된다. 나는 삼오(三五)에게 강요해서 문을 따라서 문(文)과 행(行)으로 하여금 서로 연유하야 생겨나는 것이 마치 지혜와 석의 천착(舛錯)하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또한 그 자연스러운 관계처럼 하고자 한 것 뿐이다.[주1]
옛 문인들이 그러하듯 이정직도 학문을 통하여 마음을 다스리고 품성을 수련하여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가고자 하였다. 이정직은 인간의 본성과 심령에서 우러나는 정감을 시와 그림으로 표현하고 감상해 왔으며 많은 작가들의 작품과 이론을 섭렵하고 그것을 조화, 절충하려 노력하였다.[주2]
이글에서 그는 돌에는 반드시 문채가 있다고 하였다. 문채는 학문을 통해 얻어지는 선비들이 교양과 태도를 말한다. 돌에는 이 처럼 도덕과 교양을 겸비하고 있는 선비와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러움에서 얻어지는 것이고 억지로 얻고자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정직이 돌의 무구한 생태적 특성에 비유하여 돌과 같은 자연스러운 덕성을 강조한 것이다. 즉 돌을 자신에 비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돌이 고매한 선비들에 비유된 것은 그 역사가 매우 길다고 할 수 있다. 이정직 역시 이러한 선비적 태도와 전통적 인식을 그대로 공유한 것이며 나아가 그 역사성을 누구보다 실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정직의 작품중 중첩과 반복으로 이루어진 대표작품(도판3)이다. 이 작품은 그의 그림 중에서도 직사각형모양의 반복된 형식은 이정직이 괴석을 공부하는데 많은 실험과 노력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돌의 형태에서 많은 변화와 함께 괴석의 색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어 보는 재미를 더해주며 한편으로 전형적인 괴석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그런가하면 석정의 강직한 성품과 그야말로 전통적인 괴석의 특색이 잘 드러난다.
말하자면 괴석은 괴기하고 어떤 특별한 상상력을 자아내는 모습이어야 한다는 개념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괴석의 형상이 여느 작가들과 차별화 된다.
직사각형의 6면체들을 겹겹이 쌓아 올려 돌이 반복적으로 중첩된 것으로, 기하학적 형태를 이루고 있는 돌이 사선으로 기울어져 있다. 돌이라기보다는 불안하게 쌓아 올려진 벽돌의 모습이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마치 어떤 변형화된 조형물처럼 느껴진다. 일반적으로 그동안 보아왔던 괴석들에 비해 한층 새롭고 창의적 형상이다.
이는 그동안 전통적인 문인화가들이 그렸던 작품들과는 매우 다른 형식이다. 마치 커다란 괴석이 작은 6면체로 분석될 수 있다는 입체파적 사고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 화면 하단의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사각모형의 블록 쌓기처럼 쌓아 올렸다. 실제 있을까 한 형태를 보이는 괴석의 모양이 독특할 뿐만 아니라 맨 윗부분은 우리나라 민화에서 흔히 나타나 듯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의 방향을 고려하여 역투시법을 이용한 것처럼 보인다. 작품의 맨 윗부분의 육면체도형이 이처럼 역투시로 보여줘 형태가 더욱 색다른 인상을 준다.

(도판4)은 반복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괴석은 비슷한 크기의 도형들이 반복적으로 이어지며 서로 엉겨 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비바람에 닳아 둥글둥글하게 뼈만 남은 바위에 몇 그루의 초목이 곁들여져 곳곳한 자태가 드러난다.
화면 오른쪽으로 바짝 세워 배치된 구도는 괴석의 오른쪽 방향으로 화면 밖의 모양이 연상되어 더 웅장하고 큰 형상을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왼쪽은 부분적인 여백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다른 작품이 괴석을 화면 중앙에 배치하였던 것과는 다른 형식을 보여 주고 있어 흥미롭다.
오른쪽 화면에서 마름모 모양의 괴석이 불규칙적으로 쌓아 올라가 마치 거북등처럼 보이는 단순한 모습이다. 이런 단순한 형태의 변화를 위해 왼쪽하단 밑 부분을 요철로 표현하였다. 작은 덩어리 하나하나에 마치 수염이 난 듯 잔풀들이 무성하여 괴석의 딱딱함은 사라지고 부드러운 감촉의 느낌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괴석도 에서 흔히 나타나는 묘법으로 짧고 간단한 작은 나무를 돌 사이사이에 곁들여 있어 거대한 괴석이 주는 단조로움을 풀어주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은 왼쪽하단의 볼록 들어 간 공간에서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한 2송이의 꽃은 괴석의 당당함과 미묘한 조화를 이루어 화면에 재미를 더해준다.
이 작품은 여타의 이정직 괴석도에서 보는 담대하고 침착한 운필과는 사뭇 다른 표현을 하고 있어 이채롭다. 즉 돌의 형태는 매우 육중하고 안정되어 있는데 여기에 난 잔 풀들은 매우 빠른 속도와 거친 붓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작은 덩어리를 그린 윤곽선에 농묵의 태점 과 풀을 그린 선들이 어우러져 다소 경직되고 둔탁한 느낌을 주고 있다. 반면에 바위 아래 꽃과 잎은 매우 담백하고 안정된 필치로 고요함마저 느껴지는 것이 색다른 대비를 느끼게 한다. 이정직이 다양한 표현 방식으로 실험하며 괴석을 그렸다는 생각이 든다.
화제에서 느껴지듯 세월의 깊은 흐름과 자연의 섭리에 대한 찬양을 시와 함께 필묵을 통해 표현해 내고 있다. 이 작품은 소박하면서도 웅장한 괴석이 주변의 잔풀들과 함께 어우러져 깊은 맛을 주는데 화면의 장식과 돌의 강한 면모를 보이기보다는 괴석을 습윤하고 부드러운 표현을 통해 노 선비의 진중하고 여유로운 삶을 상징하고 있는 듯하다.
하나의 주제가 여러 가지 모양과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되며 괴석을 사의적(思義的)으로 접근하는 작가 내면의 철학적인 성찰을 하고자하였다.
다음 작품은 마치 거북등처럼 보이는 형식에 부드러운 먹빛과 형태 표현으로 괴석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다양한 주변의 초목들과 조화를 이룬 (도판4)과 유사한 형식을 보인 또 다른 작품(도판5)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역시 마름모 형태가 반복적으로 이어지며 커다란 몸체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 두 작품은 바위를 표현하는 형식에서 매우 닮아 있다. 즉 마름모 모양의 작은 면들의 조합으로 마치 거북등처럼 엮어져 있는 공통점이 있다. 어쩌면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도판4)은 수직으로 묵직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돌의 양감이 크게 드러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묘법에서도 투박하고 매우 오래된 돌로서 마치 이끼가 닥지닥지 늘어 붙어있는 모습이다. 어찌 보면 시골의 투박하고 거친 농부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김제 시골에서 자주 마주치는 어떤 농부를 상상하며 그 표상을 그렸을 것 같다. 그러면서도 돌의 품안에 꽃을 그려 넣은 그의 재치가 인상적이다. 그에 비해 (도판5)는 필세가 가볍고 돌의 형태도 마치 가녀린 여인의 허리를 보는 것처럼 가볍다. 앞선 작품이 남성적이라면 이 작품은 매우 여성적인 부드러움이 강조되어 있다. 즉 이 작품은 형태의 절제된 표현과 담묵의 노련함이 돋보이는데 오른쪽 하단에서 왼쪽 상단으로 비스듬하게 향하는 형세이다. 마치 젊은 여인이 요염하게 허리를 틀고 걷는 형국이다. 돌의 머리는 마름모로 각진 모양으로 하늘을 향하게 하여 앞의 그림과 비슷한 끝 모양을 하고 있다. 볼록하게 불거진 마름모형태의 모양이 얇고 길쭉하게 그리고 때로는 작고 넓은 면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형태들이 서로 엇갈리며 교차되어 변화와 긴장을 더해 주고 있다. 허리가 잘록하여 날렵해 보이고 간결한 느낌이 강한 점이 특징이다.

돌의 피부는 밝고 하얗게 처리하였으나 윤곽선을 따라 가벼운 운필로 음영을 표현하였다. 또한 작은 풀들을 빠르고 곧은 담묵의 선으로 곁들였다. 이 그림에도 역시 간소한 형태의 작은 나무가 바위에서 자라난 모습을 그렸는데 그 비중은 매우 가볍게 하였다. 다만 하단 왼편의 삼각형 모양의 여백에 가볍고 부드러운 선과 담담히 찍은 점들이 엮여져 풀인 듯 나무인 듯 부끄럽게 고개를 숙이고 서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돌이나 풀들이 매우 부드러운 먹빛을 하고 있는데 다만 돌 허리를 타고 둥글게 혹은 날카롭고 짧은 선 모양의 태점 들이 장식적으로 다가온다.
전반적인 화면의 짜임새는 매우 간결한 것이 특징인데 괴석과 주변 엷은 잔가지가 하나의 뿌리를 둔 것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고, 괴석의 마름모 끝자리와 중간 중간 들어간 농묵의 태점과 잔풀은 흑백의 절묘한 대비로 장식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한층 세련된 필의 운용은 석정의 시와 함께 조화를 이루어 바위의 기이한 형상에 멋스럽고 단정한 괴석의 정취를 자아낸다. 다만 이 작품에서는 붓질이 빠르고 또한 날카로운 것이 두드러지는데 그래서 부드러우면서도 가까이 접근하기에는 어려운 날카로운 내면을 갖고 있는 여성처럼 느껴진다.

(도판6) 에서는 이정직의 괴석도 중 반복과 중첩의 형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매우 이색적이고 새로운 형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의 괴석의 표현은 참으로 다양하고 파격의 표현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그의 실험적 모습을 읽게 한다. 바위는 마치 신기루 바람이 일어나 듯 회오리치는 모습이다. 둥근 돌이 반복적으로 중첩해 쌓아 올려 괴기스럽고 요란한 돌의 형태가 주는 이미지는 매우 낯설고 강렬하다.
거세고 힘이 가득 실린 운필이 또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듯 읽혀진다. 화면 하단 왼쪽에서 피어오르는 형국인데 하단에 한 덩이의 커다란 돌이 받혀있고 마치 돌탑이 쌓아 올려 진 듯 둥근 회오리를 일으키며 상승하는 모습이다.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어떤 폭발이 일어나는 모습 같기도 하다. 실로 독특하고 재미있는 형상이 아닐 수 없다. 서있는 모습이 매우 불안한 모양으로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는 모양이다.
태호석의 특징인 구멍뚫인 모습도 보이는데 어떻든 그 형상은 어떤 축원을 위해 쌓아올린 탑 같은 모양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표현은 돌의 실제적 형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전통적 표현에 바탕한 독창적인 회화적 표현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괴석은 특히 아랫부분이 가늘고 왜소하며 머리 부분이 더욱 크고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어 더욱 그렇게 느껴지고 있다. 이정직의 여느 괴석도의 표현과는 매우 대조적인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괴이한 모습의 돌과는 다르게 화면 하단에 단아한 자태를 뽐내며 수줍은 모습의 국화가 괴석 뒤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다. 단정하고 사실감이 살아있는 국화의 모습이 괴기한 괴석의 위태로운 모양과 대비되어 오묘한 균형을 이룬다. 그가 문인화의 여러 초목들을 사생하듯 실감나게 그려낸 모습이 이 작품에서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이 특히 주목되는 것은 화면 중반의 둥근 바위는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힘이 강조되어 큰 형상을 이룬다. 상단의 회오리는 영락없이 태극(太極)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작품은 태극 모양으로 점차 변화되는 과정에서 불안전한 타원형의 돌들이 서로 엉키며 조화를 이루어 마침내는 새로운 기운을 불어 넣어준다.
"태극이 음양을 낳고, 음양이 교합하여 만물을 낳고, 음양이 교합하여 남녀를 낳게 된다."[주3]고 했던 동양의 철학을 화면으로 보여 주는 듯하다. 실제로 그는 생명의식과 심미적 문화의식의 뿌리가 되고 있다."[주4]고 말하고 있다.
이정직이 이처럼 자신이 가졌던 동양의 태극사상에 담겨있는 자연의 생명력을 드러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돌 허리 곳곳에서 자라고 있는 풀들이 마치 햇살이 퍼져나가는 듯한 장면을 연출하는 모습에서 그의 이러한 생각을 잘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음양의 충돌을 의미하는 태극모양의 괴석에서 새로운 자연이 피어나는 모습을 활짝 핀 꽃과 풀들로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주의 어떤 빅뱅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자연의 기운이 폭발하고 있는 의미를 그리고자 한 것일 것이다.
어쩌면 그는 외세에 의해 나라가 소멸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민족의 새로운 기운을 기원하는 모습의 자신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이정직은 구한말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혼란한 시기에 한국적 화풍을 정립한 가장 뛰어난 작가로 인식될 만큼 괴석도를 연구하고 집중하여 그렸는데, 아마도 이는 괴석에서 자신의 모습 혹은 자신의 처지를 발견하고 괴석과 자신을 일치시킨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정직의 괴석도는 그가 격랑의 시기를 외롭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면서 돌에 자신을 비유하고 또한 삶의 의미를 돌에 의탁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이정직의 학문과 서화는 그의 제자들 통해 전북 근.현대에 이어지고 있다. 그의 서화는 두 갈래로 이어졌는데, 특히 학문과 글씨는 제자 송기면과 그의 아들 송성룡으로 이어졌다. 한편 조주승, 박규환, 유영완등을 통해 괴석과 사군자가 이어지며 사실상 전북 근.현대 문인화가 꽃을 피웠다. 19세기 후반에 전북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인물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정직의 활동은 매우 큰 족적을 남겼다. 끝으로 이정직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괴석도를 통해 큰 교훈을 남겼다.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고 그것을 계승 발전하는 것은 시키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이러한 이정직의 유작과 자료를 검토해 보면 조선 말기 대표적인 문인화가의 한 사람으로서 새롭게 자리매김 되었어야 하며 그의 학문과 예술의 철학적 경지가 작품에 녹아내려 전북의 수준 높은 미술문화 발전에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20C 전북화단을 풍요롭게 다지는 계기를 마련하고 조선말기 문인화가의 한 사람으로 새로이 자리매김되고 있으나 더욱 많은 작품이 발굴되어 연구되길 바란다. (끝표지 기호)

각주
- [주1] "이정직,[연석산방문고] Ⅱ,p. 558.聖人之於學 貴乎文 子曰 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允矣哉 文之重也 雖然 君子不貴虛文焉 故曰文勝質則史 今三五 方施諸行 惟忠信之是急 其於文 必曰 我不暇焉 而文亦行也 何可二焉 吾觀石之美者必有文 其文固發於自然 非强襲之也 人之於智 亦然 行其所無事而已 强爲之則鑿矣 吾非强三五 以鑿乎文 要亦順其自然 使文與行 相因而生 如智之於石云.",「智石記」.
- [주2] 김도영, 「石定 李定稷 書畵의 文化財的 價値 硏究」, (전남대학교 대학원, 2014), p. 137 참고.
- [주3] "太極生陰陽, 陰陽之交生萬物, 陰陽之交生男女??,「繫辭傳 下」5章, 『周易』
- [주4] 김도영, 석정 이정직 서화의 문화재적 가치 연구, 전남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144p참고 및 주석 재인용 2014.
원 게재: 학위논문 / 회화지 22호(2015) 44–53쪽 · 원본 PDF 44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