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와 게르니카전"에 다녀와서
광장에 쏟아지는 가을 햇빛은 눈이 부셨다. 두 아이와 함께 찾아간 빙상 경기장의 광장엔 따스한 가을 햇살과 함께 메마른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는 바람이 토요일 오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 어두운 긴 통로를 지나는 기분은 방금전 여유롭게 거닐던 느낌과는 다르게 손을 꼭 잡고 옆에 붙어서 걷고 있는 아이들과 나에게 아직 보지 않은 "피카소전"에 대한 기대감과 긴장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 동안 적으나마 미술서적이나 말로만 듣고 알고 있었던 피카소에 대한 "앎"이, 이 전시를 통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와 주길 기대 하면서 전시장을 들어섰다.
"파블로 피카소" 그의 명성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하고도 천재적인 거장"이라는 수 없는 찬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초등학교 4학년 정도 되는 학생들에게 피카소를 물어본다면 그의 이름을 금방 아는 체를 하는 걸로 보아 그가 얼마나 큰 업적을 남기고 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림에 관심이 없이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나 나처럼 미대를 졸업한 사람에게도 그가 20세기에 그림에 있어서 획기적인 획을 그어놓은 사람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피카소와 게르니카라는 타이틀을 내 건 전시로서 다른 많은 작품들이 피카소의 자서전적인 그림인데 반해, 조국 스페인의 아픔을 다룬 내용이지만 게르니카 만큼은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다룬 작품이라고 한다.
전시장은 네 가지 주제로 꾸며져 있었다. 제 1 관은 피카소에 대한 전반적인 생애를 12시대로 나누어 보여주고 있는 '피카소의 생애관' 제 2 관은 '게르니카관' 제 3 관은 피카소의 영상관, 제 4 관은 피카소의 드로잉 작품들이 전시된 '볼라드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 외에 문화 상품관이 꾸며져 있어 피카소 그림 그리기, 드로잉 색칠하기 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제 1전시관의 초기시대(1881-1901), 피카소는 미술공예 학교의 교사였던 아버지의 관심으로 천부적인 재능을 일찍부터 발휘하게 된다. 16살이 되던 해에 마드리드의 산페르난도 왕립 미술학교에 입학하고 그해에 아버지를 모델로 그린 〈과학과 자비〉라는 그림이 마드리드 미술 전람회에서 가작 상을 받으며 18살 되던 해에는 스페인을 대표해 〈마지막 순간〉이라는 작품으로 만국박람회 회고전에 출품하기도 한다. 인쇄물로 된 〈과학과 자비〉라는 작품 앞에서 16살짜리의 피카소의 뎃생력에 감탄해 하고 있는 동안 아이들은 벌써 영상관을 갔다와서 흥분하여 나를 부르고 있다. 청색시대(1901-1904) 1901년 피카소와 함께 바로셀로나에서 파리로 함께 떠나온 친구 카사게마스의 죽음으로 피카소의 그림에는 색채의 변화와 함께 삶의 고뇌와 가난 우울등을 청색으로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로 나타내게 된다. 그리고 이 기간에 피카소는 매우 가난하고 힘든 생활을 하게 된다. 그 고된 삶은 그에 그림에 말없이 경직된 인물들과 알 수 없는 텅 빈 배경들이 말해주고 있다. 장미빛 시대(분홍빛 시대, 1904-1906) 1904년 피카소는 올리비에 페르낭드라는 여인을 만나 그녀를 모델로 많은 작품을 남기게 된다. 우울하고 고독한 청색시대가 막을 내리고 작품에는 갈색, 붉은 청갈색, 장미색으로 밝아진 생활이 반영되기 시작한다. 전기 입체주의(니그로 시대, 1907-1909) 아프리카 예술과 고대 이베리아 조각을 접하게 되면서 그 즈음 세잔의 작품에서 받은 영향과 함께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파격적인 변화의 시기를 맞게 된다. 피카소에게 새로운 걸작품들을 남기게 하는 시기가 시작된 것이다. 피카소는 이시기에 〈아비뇽의 아가씨〉를 남기고, 분석적 입체주의(1910-1912)와 종합적 입체주의(1913-1914)를 거치면서 대상들을 더 철저히 분석하고 고정된 시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화면에 시각적 요소를 회복시킴으로서 대상을 재구성하며 풍부한 색채를 도입하여 색 면에 의한 명쾌하고 단순한 화면구성을 보여준다. 전기변용의 시대(1915-1945) 이 시기에 피카소는 1961년 알게된 장 콕토리는 시인으로부터 발레극의 무대장식과 의상들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게 된다. 이 발레 극에서 피카소는 인물들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인체에 흥미를 느끼고 고전주의의 풍부한 양감에 깊이 매료된다. 역사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 피카소가 살던 파리는 예전처럼 활력을 되찾고 있었고, 이시기에 피카소는 올가 코홀로바와 결혼을 하여 아들 파울로가 태어난다. 피카소의 화폭에는 인간적이고 따스한 감정이 담긴 그림들이 그려지지만 세계대전으로 인한 고전주의로의 복귀의 의미로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는 신고전주의 경향과 순수한 큐비즘의 정물화가 병행하여 그려진다. 1925년 피카소는 고전적인 방식에서 벗어나기 시작 초현실주의라는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 시기에 마리 테레즈라는 소녀를 알게 되는데 그녀로부터 받는 영감들은 피카소의' 볼라드 연작'이라는 판화 작품들에 영향을 준다. 이 '볼라드 연작'은 전시공간에서 특히 나에게 감동을 주었던 제 4관의 볼라드관에 전시된 작품으로 피카소의 화상이었던 볼라드가 피카소에게 100점의 판화용 작품을 의뢰하여 1930년부터 1937년사이에 제작된 것들이었다. 그리스 신화에나 나옴직한 야수의 머리를 한 사람, 자유롭고 거침없는 선들, 나로서는 피카소의 이러한 작품은 처음 대하는 것이라 더 흥미가 있었던 것 같다. 전기 노한의 시기(1936-1945) 피카소는 이시기에 스페인 정부로부터 1937년 5월에 예정이었던 파리 국제 박람회에 커다란 벽화를 공식적으로 의뢰를 받는다. 박람회 한달 전까지만해도 구체적인 주제도 선택하지 못하고 있던 피카소는 스페인 내란으로 게르니카라는 마을이 폭격하게 된 사건에서 영감을 얻게 된다. 마을 인구의 5%가 학살당하고, 건물의 70%가 불과 몇 시간만에 파괴된 사건, 불 속에서 울부짖는 여인, 고통을 말하지 못하는 말의 비명, 부러진 칼을 쥔 채 죽어 가는 전사의 고통, 아이를 안고 통곡하는 어머니, 그 속에 파카소는 전쟁으로 인한 인간의 비극성을 광기, 절망, 좌절의 절규를 표현하고 흑색, 흰색, 회색의 대조로 암울하고 극적인 대조로 참혹한 상황을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런 게르니카 앞에서. 디지털 페인팅으로 재현한 실물크기 7.8×3.5m의 작품 앞에서 그 당시의 참상을 짐작 해 본다. 게르니카를 위한 습작들 앞에서 피카소의 엄청난 작품 구상력에 또 한번 놀라고 돌아섰다. 후기 변용의 시대 목가적 시기(1946-1973) 표절의 시기(1955-1960), 에로티시즘의 시기(1961-1973)를 거치면서 피카소는 평온한 가정생활과 안정된 생활로 92세가 될 때까지 끝없는 창조력과 열정으로 작품 제작에 열중하여 수없이 많은 작품들을 우리에게 남기고 1973년 4월 8일에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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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조용하다 싶어 찾았더니 벌써 영상관과 문화상품관을 왔다 갔다 하며 흥미로와한다. 1000원을 주고 드로잉 색칠하기를 사 주었더니 큰 아이가 너무 좋아하며 열중한다. 긴 통로를 빠져 나오는데 아직도 이해가 잘 안가는 엄마의 행로에 작은 아이가 묻는다.
엄마 "이 그림이 뭐라고 했지?"
"피카소와 게르니카".
그래, 이제 다섯 살 짜리 꼬마 아이도 피카소를 알게 되는 거지.
원 게재: 전시장을 찾아서 / 회화지 8호(2000) 30–31쪽 · 원본 PDF 31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