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의 미

한국의 조형미 성격은 느림의 미학에서 찾으면 어떨까 생각한다. 느림과 한가로움은 상통하기도 한다. 조촐하기도 하고 고요하기도 하다. 물질과 욕망의 굴레를 버리고 은근함에 도취 해버리면 어떨까. 佛家의 말을 빌리자면 욕계삼욕(欲界三欲)을 씻어 청정함에 이른 마음을 찾는 시간이라고 할까. 연꽃 같은 처염상정(處染常淨)의 덕성을 찾는 것이리라.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그림을 보면 물도 잔잔하고 사람도 한가롭게 누워 있다. 바람은 불어도 조용하고 정중동 그 자체이다. 강희안이 우리나라 처음으로 원예서를 썼다는 것은 풀 한포기 작은 것이라도 느긋하게 살피고 그 생물이 본성을 찾아 살아감을 살폈으며 그림에도 잘 반영하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원예서인 "양화소록"을 쓴 것은 그가 화초 기르기가 취미 이상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고사관수도의 간결한 필치 속에 녹아 있는 식물은 자신 있는 필치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없는 것처럼 한 붓에 나타나 있다. 의암관수도를 그린 박제가는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자이다. 청나라 신문물을 수용하여 富國과 윤택한 생활을 꾀하자는 이용후생론을 주장했다. 그는 문인으로서 전인적 교양을 갖추었고 당대 학자로, 정치인이며, 외교관이었다. 바위에 의지한 채 물을 보고 있는 작품이다. 화제로 칠언시가 적혀있다. 귀는 물에 몸은 돌에 의지 했는데, 세 사람이 있지만 마음은 하나다.(耳爲水而身爲石 形則三而心則一)(유홍준, 이태호, 유희삼매, 학고재) 세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물만 바라보고 한 마음이 되었을까.
산수화나 화조화 등에서 보이는 형체는 없음과 있음의 어울림 묘미가 있다. 무형과 유형이 다 있는 것이다. '有無란 空白을 말하며 공백이란 陰陽을 말하고 음양은 凹凸의 형태를 말한다. 동양화에 요철이 없으면 회화로서의 성립이 불가능하고 음양의 철학이 없으면 동양화의 眞意가 없어진다.'(김종태; 동양의 회화사상) 따라서 그 眞意는 화가의 흉중에서 자연의 도를 깨쳐 나오게 된다.
화선지에 붓으로 그리되 마음의 도를 그리는가 보다. 知者樂水요, 仁者樂山이라고 논어에 나오는가 보다. 자연의 도가 무형이지만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 아닌가. 여백 속에는 즐거움의 미학이 있다. 시는 무형의 그림이요, 그림은 유형의 시였다.(詩是無形畵, 畵是有形詩)라는 말이 있다. 한여름에 설경을 보고 시원함을 느끼고, 폭포수 산수화를 즐기며 여름을 나는 기분은 완상하는 법 중 하나일 것이다. 논어에 이해하고 있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 하고 있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라고 했다. 시라는 무형이 유형으로 나타나고 그 깨달음의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여백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고 유형이라는 眞意를 간직한 곳간과 같은 것이다. 천천히 그림 속에 다가가는 느낌은 실로 흥분 경지에 오를 것이다.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화폭 속에 무한한 虛와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靜과 한가하게 여유를 가질 수 있는 忘과 모든 속세를 초월한 無己(佛家에서 解脫 상태의 無我)가 있어야 한다.'(김종태 ; 동양의 회화사상) 한국 회화가 회화성을 바탕으로 하기 전에 천지 만물과 소통하는 길로 여겼던 것이다. 여백에서 이만한 철학과 예술의 境地를 느끼기에 충분할 것은 없다. 寫實美보다는 理想美를 추구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아직도 실경의 寫景만 있고 理想美는 없는 그림이 횡행하는지 모른다. 운필과 포치 등 기능 적인면도 중요하지만 그 여백에서 오는 眞意는 없고 서양화 같은 재료성에 기능적 선수를 양산 하려고 하고 있다.



여유로운 마음을 갖는 즐거움이 또 하나 있다. 기운생동감이 문학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내용의 고급화라고 할 수도 있다. 송 휘종이 궁정 화사를 뽑는 시험에서 출제한 문제를 보고 그림을 적절히 그려 내는 것이다. 그 문제의 제목은 '깊은 산에 오래된 절이 숨어 있다.(深山藏古寺)'라는 것이다. 대부분 시험 응시자들은 낡고 오래된 절을 그리거나 그 앞에 천년 된 고목, 그 뒤의 높은 산, 주변의 무성한 숲을 그리는데 힘을 쏟은 것이다. 그 가운데 재치 있는 몇 명만 깊은 산의 고목 사이로 보일 듯 말 듯한 절의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고 단지 산기슭의 작은 시내와 거기서 물을 긷고 있는 늙은 화상, 그 뒤로 구불구불 끝 없이 이어지는 산길만을 그린 것이 훌륭한 작품이었다. 그 자가 남송 화가로 원체화를 정립한 마원이라는 사람이다. 그의 매석계부도(梅石溪鳧圖) 그림은 비단에 채색한 것인데 베이징 고궁박물관에 있다. 이 그림은 많은 여백과 절벽의 한 모서리에 봄의 강물이 그려져 있다. 절벽에는 두 그루 나무가 뒤엉켜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파란 물결이 잔잔한 강물에 한 떼의 오리가 놀고 있다. 어미 오리와 새끼 다섯 마리가 물에서 뜨는 법을 배우는 듯하다. 어미 곁에서 응석을 부리는 놈도 있다. 어미 등에 올라탄 놈도 있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던 것이 재 빨리 물을 가르고 다가오고 있는 것도 있다. 행복한 한 가족을 보는 듯하다. 이 그림은 사람들에게 봄이 오는 것을 연상하게 하고, 화면을 통해 직접적으로 "봄 강물이 따뜻해지면 오리 들이 먼저 안다.(春江水暖鴨先知)"라는 시적 정취를 표현하였다.(황위평, 시는 붉고 그림은 푸르네, 학고재, 따옴) 이러한 '畵中有詩'를 더 알아보자. 궁정화사를 뽑는 문제에 '꽃을 밟고 달려온 말발굽의 향기'를 그리는 것이었다. 시험에서 꽃이나 말을 그린 사람은 죄다 떨어졌다. 입선작은 여백 속에 흙바람을 따라 날아오는 한 무리의 나비를 그린 작품이었다. 꽃향기가 날리는 곳에 어찌 나비가 없을까 하는 시적 발상이다. 부제 '한적한 산골에 강 건너는 사람 하나 없고 외로운 나룻배 종일토록 떠있네' 라는 것이었다. 그림 속에 물결이니 계곡이니 나무니 하는 따위를 집어넣은 응시자는 떨어지고 뱃머리에 다리 괴고 누워 피리 부는 노인을 그린 사람이 장원으로 뽑혔다.(손철주,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효형출판, 따옴) 여백에는 시적 감동까지 붙잡아 오는 한가로움이 있기에 감상자의 여유로운 마음을 흡족하게 하리라. 쉽고 빠르게 살다보니 1억만년의 석유자원을 200년에 다 쓰고 지구는 멸망하고 있지 않은가. 숨 가쁘게 살고 있는 우리는 무엇 때문에 빠르게만 살려고 하는가. 김홍도의 주상관매도는 천하 태평한 그림이다. 배를 타고 안개 너머 봄 나뭇가지를 보고 있는 사람과 배 아래에서 바라보는 화가의 위치도 한가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리 반성하자. 새로운 고전을 추구해보자. 우리그림의 정체성을 살려보자. 한 폭의 그림으로 생활에 여유를 갖고 미래의 한국 화단에 샘물을 솟구치게 하자. 여백이라는 것이 단순하고 그리지 않은 곳이란 말인가. 여백이야말로 화가와 감상자의 소통도구요, 시적 감정을 이끌어주는 무한한 공간이다.
원 게재: 한국화에 대하여 / 회화지 15호(2007) 32–33쪽 · 원본 PDF 32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