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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이론

문인화의 즉흥성연구

박성수 (전북대학교 미술학과 일반 대학원)

매화 그림 (문인화)
매화 그림 (문인화)
화제가 쓰인 족자 도판
화제가 쓰인 족자 도판

즉흥과 물아일체

즉흥성은 문인화에서 뿐 아니라 동양예술 전반에 걸쳐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즉흥성은 바로 흥(興)과 관련하여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송 곽약허(郭若虛)의 『도화견문지(圖畵見聞誌)』에는

"인종황제는 하늘에서 받는 자질이 뛰어나고 총명하여 그의 성스러운 예술은 신묘하고 기이하였으니, 흥이 일어 붓을 잡으면, 일반 작품을 뛰어넘었다."1)

라고 말하며 '흥(興)' 이 일어 대상을 화면에 구성하고 붓으로 그렸을 때 그 그림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예로부터 동양의 예술가들은 즐겁고 좋아서 절로 일어나는 흥취는 예술창작의 주체나 놀이에 참여하는 성원을 현실이라는 공리적 가치를 떠나 미적상상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즉 초월의 수단으로 여겨지거나, 이로부터 한발 더 앞으로 나아가 예술적 심미효과로 여겨졌다. 이 때 '흥' 은 즉흥(卽興) 적인 것으로 미리 준비함이 없이 우연히 다가오는 특성을 지닌다. '흥' 은 반성이나 잠재의식을 통해 도달하는 것이 아니며, 오직 주체와 대상이 마주하는 순간 일어나는 찰나의 느낌만을 의미한다.

고문자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흥' 의 최초의 의미는 고대 종교적 제사의식 속에서 행해지는 일종의 모방행위를 의미한다. '흥' 의 자형(字形)은 갑골문(甲骨文)에서 보이는 것처럼 하나의 큰 쟁반, 혹은 시루를 여러 사람이 손으로 함께 높이 들어 올리고 있는 형상을 본뜬 것이다. '흥' 자의 출현은 실제로 들어 올리는 쟁반의 무게를 떠나 여러 사람이 꼭 함께 들어야하는 의식이 필요했고, 그 의식을 마치 실제 무거운 쟁반을 드는 것처럼 치를 수 있도록 하는 정신적 몰입의 과정을 표현하는 개념이 필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2)

종교 활동 중의 '흥' 은 샤먼이 신과의 교감하는 순간의 정신상태를 설명한 것이다. '흥' 에 대한 이러한 샤머니즘적인 속성은 고대 서양의 디오니소스 축제처럼 사실 거의 모든 원시종교에서 나타난다. 이 과정 속에서 샤먼의 정신상태는 신비체험을 통하여 흥분과 심취 혹은 절대적인 힘과 합일하며, 현실을 초월하여 나타나므로 구체적이고 분석적인 언어로 말할 수 없고, 사물에 대한 구별능력을 상실하거나, 이러한 신비체험 속에서 주체는 극도의 흥분과 기쁨, 심지어 숭고함까지도 느끼게 되는 몇가지 특징을 지닌다.3)

또 이러한 '흥' 은 중국의 문예이론과 관련하여 언급되고 있는데 최초의 문헌은 『논어(論語)』이며, 『논어』에서의 '흥' 에 대한 논술은 대부분『시(詩)』와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시(詩)』는 육예(六藝)4)를 이루는 요소 중의 하나로 중요한 교육수단이었다. 『시(詩)』는 노래로 부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춤도 출수 있었다.

'시' 의 이러한 형태는 고대 종교제례의 기우제 같은 모방의식에서 직접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고대 제례의식이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종교적의식에서 분화되어 나와 종교적 색채가 탈색되어 감에 따라, 예술적 형식을 갖춘 '시' 의 형식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시' 의 이러한 암송과 연주, 노래하고 춤추는 기능은 '흥' 의 기원인 고대 종교적 제사의식 속에서 행해지는 일종의 모방행위의 형상화에서 유추되어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흥' 의 원시적 함의는 '악' 의 활동과정 속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특수한 체험의 일부라고 이해할 수 있다.5)

또 전한 무제시대의 학자이자 공자의 11대손인 공안국은『논어』의 "시가이흥"의 '흥' 을 "인비연류(引譬連類)", 즉 "비유를 끌어와서 비슷한 것과 연결한다."로 해석하였다. 공안국의 이해에 따르면 시의 효용에서 '흥' 은 비유와 연상에 의한 완곡한 의사 전달이라는 말이 된다. 송대의 주자는 '흥' 을 "먼저 다른 사물을 말함으로써, 노래하고자 하는 감흥을 이끄는 말"로 해석한다. 그는 또 '흥' 에 대하여 "흥이란 일으키는 것이다. 시는 성정에 근본을 두고 있어 사악한 것도 있고, 바른 것도 있다. (우리는) 쉽게 이 말을 알 수 있다. 읊조리는 사이에 음조에 따라 반복하면, 쉽게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배움을 시작하는 자는 그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의 흥기로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을 반드시 여기서 얻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실제 심미적인 체험과 정감의 발흥이라는 시학적 의미에서의 '흥' 에 대한 이해는 위진(魏晉)시대에 이르러서야 출현하게 된다. 위진은 은둔의 시대이다.6) 위진시대의 지식인들은 혼란한 현실정치에 참여하기보다 의식을 내면의 세계로 돌림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자각하게 되며, 이는 곧 예술가치의 발견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흥' 은 전통적 시학의 미의 의미에서 벗어나, 시가창작과 감상의 특수한 심리상태나 미감의 특질, 시가의 본질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위진 지식인들이 발견한 새로운 '흥' 의 세계는 '정(情)' 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다. "대상과 접촉함으로써 정감이 일어나는 것을 '흥' 이라고 하며, 이때 대상은 정감을 움직인다.(物觸以起情謂之興, 物動情者也)"7) 는 언급처럼 '흥' 을 '정' 과 관련하여 직접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위진시대의 문헌에서야 비로소 나타난다. 위진인에 있어서 '정' 은 논리적 사고와는 반대로 숨길 수 없으며, 가장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직관적인 느낌, 즉 '정' 이 통하면 사물의 진실이 드러나거나, 사람의 진정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진의 사대부들은 '정' 의 새로운 발견을 통하여 '예술' 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위진시기에 이르러 시 역시 "시는 뜻을 말한다.(詩言志)"의 의미미에서 "시는 정(詩言情)라는 순수한 심비적인 의미로 전화되는 것이다.8) 정감 혹은 느낌을 통하여 숨길 수 없는 진실 혹은 진정을 파악하는 것이다. 논리는 언제든지 진실을 은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얼마든지 치장을 할 수 있고, 치장을 통해 본 모습을 감출 수 있다. 위진의 지식인들은 따라서 논리는 언제든지 진실을 은폐할 수 있다 생각하였다.

당대(唐代)의 가도(賈島)는 "'흥' 이란 곧 '정(情)' 이다. 밖으로 대상에 감응하며, 안으로는 '정' 을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정' 은 조금도 막힘(지체됨)이 없으니, '흥' 이라고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으며 사물을 접하여 생겨나는 막을 수 없는 정이 곧 '흥' 인 것이다. 물론 이 때 '정' 은 단지 느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흥' 을 단지 정감이라는 단순한 의미로 한정하여 이해할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는 '흥' 이란 어떠한 감정의 격발이 일어나고, 그 감정이 끝없이 새롭게 이어지는 상태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흥' 은 언제나 생동함과 선명함을 유지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또 '흥' 은 잠재의식에 의한 것도 아니고, 깊은 내면의 반성을 통해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 주체가 대상과 마주하는 순간의 접촉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오직 주체와 대상이 마주하는 순간 일어나는 찰나의 느낌만이 '자연' 의 '진정' 을 보장한다. 논리적 여유가 끼어드는 순가, 의식은 가상(假像)을 만들어낸다고 여긴다.

시창작과 마찬가지로 고대 동양의 그림 창작 역시 '흥' 의 일어남을 기초로 창작의 자유와 예술적 진실이 보장될 수 있다고 여겼다. 만약 '흥' 이 없다면, 그림은 단지 변화가 없는 물체의 외형만 보여줄 수 있을 뿐, 그림을 통하여 전달하려는 궁극의 세계는 드러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송대의 시인이자 화가였던 소식(蘇軾)은 외사촌이었던 문동(文同)이 대나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시로 표현하고 있다.

"문여가(文與可)가 대나무를 그릴 때는 대나무만 보일뿐,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 몸은 이미 대나무와 함께 물화(物化)를 이루어 맑고 신선한 느낌이 끊임없이 솟아난다. 장자는 이미 세상에 없으니, 누가 이러한 신(神)이 빚은 듯한 솜씨를 알겠는가?"

이러한 묘사는 바로 '흥' 이 인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흥' 이 인다는 것은 이미 고도의 정신집중에 의하여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는 의식이 사라진 상태, 즉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에서 말하는 '물화' 의 상태와 비슷하다. 곧 '물화' 의 상태에서 화가는 예술적 상상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흥' 이 잠재의식에 의한 것도 아니고, 깊은 내면의 반성을 통해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심미적 주체가 대상과 마주하는 순간의 접촉 곧 즉흥적인 행위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때, '흥' 이 만들어내는 진정성은 우연성에 기댄다. 즉 우연을 의도하는 과정은 객체에 의한 내적인 감흥이 일어난 상태에서 즉흥적 행위로 표현될 수 있다는 말이다.


1) 곽약허(郭若虛), 『도화견문지(圖畵見聞誌)』, "仁宗皇帝, 天資穎悟, 聖藝神奇, 遇興援毫, 超逾庶品

2) 김백균, '흥(興)' , 그 우연성과 진정성에 대한 고찰- 예술창작의 조건과 심미적 효과로서의 '흥' - , 2007

3) 김백균, '흥(興)' , 그 우연성과 진정성에 대한 고찰- 예술창작의 조건과 심미적 효과로서의 '흥' - , 2007

4) 육예(六藝)란 중국 주대(周代)에 국자감에서 행해지던 교육과목으로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말한다.

5) 김백균, '흥(興)' , 그 우연성과 진정성에 대한 고찰- 예술창작의 조건과 심미적 효과로서의 '흥' - , 2007 p. 77

6) 나종강(羅 宗 强)『玄學與魏晉士人心態』, 南開大學出版社, 2003, pp. 265~270

7) 호인(胡 寅), 『斐 然 集』, "物觸以起情謂之興, 物動情者也 ."

8) 김백균, 「매체의 관점으로 본 "시서화일률론"-동양 '예술' 과 '예술작품' 관계에 대한 시론」, 미학48집, 한국미학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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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게재: 회화이론 / 회화지 17호(2010) 26–29쪽 · 원본 PDF 2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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