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수업
[세로 방향 부제] 지금 바로 나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다가서고 싶다. 처음 무대에 서는 초급 배우처럼. 이제 시작이다. 화장 수업은 본의아니게 자신을 새롭게 조명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부터 내게 주어지는 인생의 역할을 화장하듯 즐겁게 수행하고 싶다는 뜻이다. 또 하나, 예쁘게 만들어 내놓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다.
수록 도판


본문
화장(化粧)은 화장품 따위로 용모를 꾸미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신체나 얼굴을 화장품을 이용해 보호하거나 단점을 보완하여 아름답게 꾸미는 행위를 말하는데, 배우가 극중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가발과 의상 · 신발 따위를 갖추는 일도 화장으로 간주한다.
호텔 하우스키핑 부서에서 고객의 투숙 기간 동안 침대의 린넨을 교환하거나 객실을 정비 · 정돈하는 것도 화장이라고 표현한다.
의미야 어쨌거나, 어느 날부턴가 화장을 좀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피부에 스킨과 로션을 바르는 정도의 기초화장이야 해왔지만, 이제 화운데이션 등을 발라 정작 메이크업을 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뀐 것이다. 화운데이션이나 색조 화장품이 없던 나로서는 큰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화장품을 바르는 것이 능사가 아니었다. 가급적이면 단장하는데 효율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할 터였다.
여자가 화장을 시작하는 시기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일찍 화장을 시작한 여자는 그보다 몇 년 앞설 수도 있겠다. 화장이 늦은 여자는 대학교를 졸업하는 즈음이 아닐까. 하지만 나는 대학교를 졸업할 때도 아니었고,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스킨과 로션을 바르는 기초화장 외엔 메이크업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것을 가장 존중했던 내게 인공적인 아름다움도 배제할 것만은 아니라는 자각이 생긴 것은 왜였을까? 인공적인 것을 가미하더라도 돋보이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일까.
장식과 미에 대한 관심은 여성에게 거의 본능적인 충동의 발로라고 무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늦은 나이에 여자로서 철이 들었다는 얘기인가. 아니다. 감추고 싶은 결점들이 생겼다는 게 더 적확한 표현인 듯싶다.
화장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후 간혹 뷰티클래스에 참석하고 미용실에 자문을 구하기도 한다. 화장에 관한 유용한 정보들을 모아 메이크업에 활용하기도 한다.
화장에는 생긴 것보다 입술을 예쁘게 그리는 방법도 있었고, 자연스러운 것보다 더 자연스럽게 눈의 모양을 돋보이게 하는 방법도 있었다. 뷰티클래스의 강사는 특히 내 입술을 칭찬했는데, 입술이 도드라져 그게 섹시해 보인단다. 사실 그 동안 난 두툼한 입술이 오히려 콤플렉스였다. 예쁜 여자의 상징인 가늘고 날렵한 윗입술을 만들고 싶은 내게 강사는 오히려 두툼한 입술을 도드라지게 해놓고는 만족해했다. 눈 화장은 마스카라를 여러 번 덧발라 속눈썹이 풍성해 보이도록 연출한다는데, 이건 아무래도 어렵고 시간이 많이 들어 포기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은 무대에 서는 배우들이나 할 짓이었다. 자기 전에 화장해보고 지우고 화장해보고 지우고.. 그렇게 하기 며칠.
고대사회에서 화장은 미적 · 성적 본능을 만족시키는 본능적인 것 외에 성별, 사회적 지위, 계급, 부족 등을 나타내는 표시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화장의 기술은 도시 문명의 발달에 비례해 높아졌지만, 화장의 본질은 여전히 사회 속에서의 개인적 취향이나 미적 감각의 충족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어쨌거나 화장은 문명의 발달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어느 것이나 자신의 내적 충족의 발로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장식적 의미의 화장, '메이크업make up'이 일반화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전신에 걸쳐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화장과는 약간 다른 미용의 뜻으로 쓰이는 '코스메틱cosmetic'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17세기 초였지만, 보편적으로 쓰인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화장품의 발달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장이 대중화된 것도 그 이후라고 봐야 한다.
유명 배우의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라는 직업은 최근에 등장한 직업이다. 예전에는 없었다. 그만큼 화장이 우리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뜻일 게다. 더욱이 이들은 초급 무대에 오를 때에는 메이크업이 그 인생의 성패를 좌우할 만큼 대단히 중요하다고 한다.
어느 때는, 너무 정성을 들이는 바람에 어색할 정도의 짙은 화장이 되기도 하지만, 좀 어색해 보이는 얼굴을 굳이 가리려 하지 않고 길에 서 보기도 한다. 메이크업을 하고 사람을 만나는 데는 때로 담대함도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메이크업을 하고 싶었던 마음은 단지 외양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커버해야 하는 결점이 얼굴에 나타나는 현실, 좀 젊게 보이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를 넘어 마음 깊은 곳에 잠재했던 어떤 의식– 나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 마음 밑바닥에 또아리를 틀고 있던 인생의 상처와 아픔 등을 또한 가리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어떤 이유로 정체돼왔던 나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의 발로였다.
그래, 지금 바로 나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다가서고 싶다. 처음 무대에 서는 초급 배우처럼. 이제 시작이다. 화장 수업은 본의아니게 자신을 새롭게 조명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부터 내게 주어지는 인생의 역할을 화장하듯 즐겁게 수행하고 싶다는 뜻이다. 또 하나, 예쁘게 만들어 내놓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다. ▣
필자 약력
전 우 연
-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 수필집 〈자연으로의 유랑〉, 〈내일 이맘때에〉
- 칼럼집 〈립스틱 짙게 바르고〉
- 전북관광지(익산 · 고창 · 부안 · 정읍 · 진안편) 스토리텔링 집필
- 現) 도서출판 이랑과이삭 편집인
- 지면 배경: 24쪽은 화장붓 흑백 사진, 25쪽 하단은 여성 옆모습 일러스트
원 게재: 수필 / 회화지 19호(2012) 24–25쪽 · 원본 PDF 24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