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하는 예술가 세.잔.
탐구하는 예술가 세. 잔.
김영숙 (예원예술대학교)
본문
세잔의 그림은 근대 인상주의 미술에서 현대 미술로 나아가는 분기점을 이룬다. 인상주의 의 성과를 잃어버리지 않으면서도 인상주의의 한계를 돌파해내려는 의지와 열정을 평생 간직했던 세잔. 이렇듯 서양 미술사에서 현대 미술의 시작을 이루어낸 세잔의 공적은 일견 화려하기 그지없으나 그의 삶은 지긋 지긋하리 만큼 오랜 기간의 번민과 방황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세잔은 인문주의 전통으로 정평이 나 있는 부르봉 고등학교 시절 에밀 졸라와 함께 호메로스와 빅토르 위고에 열광하며 친하게 지냈지만 그의 격정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은 에밀 졸라로 하여금 그의 위대한 화가로서의 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은행가로 자수성가한, 강하고 권위적인 아버지의 권유에 못 이겨 세잔은 엑상프로방스 대학 법학과에 입학하는 등 청년시절 심한 방황과 우유부단함을 보여 준다. 에밀 졸라의 권유에 못 이겨 파리에 갔지만 파리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고향에 돌아와 아버지의 은행에서 일하고는 또 다시 파리로 돌아가고 싶어 한 세잔. 세잔이 자기 뒤를 이어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 아버지가 세잔을 떠나보내지만, 세잔은 에콜 데 보자르에 또 다시 낙방하고, 1866년, 1869년, 1870년, 1875년, 1879년에 계속해서 살롱전에서 낙선한다. 드디어 1885년에도 살롱전에서 낙선한 세잔은 이제 더 이상 자기 작품을 출품하지 않으리라 결심하게 된다. 미술 평론가들의 온갖 악평에 시달리던 세잔에게 마지막 충격을 가한 자는 아마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졸라이리라. 졸라는 1886년 소설『작품』에서 세잔을 모델로 하여 야망을 실현하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예술가를 그렸는데, 이를 계기로 세잔은 졸라와 오랜 기간 관계를 끊는다. (그의 작품이 세간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50이 넘어서였다.)
이러한 외형적 좌절 속에서도 세잔의 그림에 대한 집요한 노력은 결코 중단되지 않았다. 세잔은 인상주의 그림이 지나치게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에 불과함을 느끼고, 무언가 자연 내부에 있는 변하지 않고 영속적인 것을 묘사하고 싶어 한다. 즉 빛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대상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대상 그 자체를 그리고 싶어 하는 세잔. 얼핏 보면 양립할 수 없는 이 두 가지 요구에 충실하기 위해 세잔은 테이블 위에 놓여진 사과를 몇 시간이고 관찰하고, 모델에게 몇 시간이고 똑같은 동작으로 서 있기를 요구했던 세잔. 이제 세잔은 피사로에게서 배운, 대상을 색조의 농담으로 구축하는 방법 위에서 점차 오로지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것은 어찌 보면 세잔 속에 있는 이중성, 즉 (젊은 시절의 그를 지배한) 매우 충동적이며 여린 감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나중에 더 분명하게 드러난) 그의 높고 강인한 정신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그의 인성의 반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오로지 예술 작업에 집중하기 위해 그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무덤과도 같은 단조로운 생활에서 탄생한 그의 느림의 미학의 정신은 1890년대 초반에 그의 유년 시절의 친구였던 뉘마 코스트가 에밀 졸라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에 웅변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 좋은 녀석이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유지하고, 고통스러운 좌절을 잊은 채, 고집스럽게 만들어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작품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감동적이네."
인용 (35쪽 상단)
"역사상 유명한 사과가 셋 있는데, 첫째가 이브의 사과이고, 둘째가 뉴턴의 사과이며, 셋째가 세잔의 사과이다. 평범한 화가의 사과는 먹고 싶지만 세잔의 사과는 마음에 말을 건넨다."
–모리스 드니–
수록 도판






- 판독 참고: 37쪽 하단 판권 표기가 '2011년 통권 제18호'로 인쇄되어 있어 지면 오식으로 보입니다(34·35쪽은 '2012년 통권 제19호').
원 게재: 회화이론 / 회화지 19호(2012) 34–37쪽 · 원본 PDF 34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