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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여행기(기행문)

서안 · 낙양 기.행.문

이승훈(연구회 회원)

문화 인류애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기회

글 이승훈 (연구회 회원)

용문석굴
용문석굴

본문

비행기를 탔다. 드디어 모든 것이 비워지는 듯 했다. 그리고 2시간 반 지나서, 서안의 신도시 주변 공항에 도착 한 것은 점심이 되어서이다. 이미 공항에는 서안미술관측에서 현수막을 들고 나와 있었다.

환영식을 조촐하게 하고 산시 성 역사박물관으로 향 하였다. 가다가 점심시간이 되어서 식당에 갔는데, 중국음식이 벌써 입에 맞지 않았다. 특유의 향료에다가 먹는 식습관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했다.

산시 성 역사박물관은 고전의 맛을 살린 기와집이었다. 건축물은 거대 했으며 들어가는 입구도 굉장하였다. 그러나 시끄럽고 사람들 어깨가 부딪치고 유물은 많아서 무엇을 볼 것인지 엄두가 안 났다. 조용히 앉은 자리도 벌써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비워 줄 생각은 없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곳에 유물을 보러 온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 근방 사는 사람들이 피서 겸해서 놀러 온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동물상이 많고 토우들도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 고대 사람들은 마(馬), 우(牛), 양(羊), 용(龍) 등과 같이 숭배하던 동물을 명칭으로 성씨를 삼고 있다. 모계 씨족사회에서 온 성씨도 많다. 부수가 '여(女)' 가 들어간 성씨가 많다. 강(姜), 요(姚), 희(姬) 등이 있다.

박물관에서 만난 각종 동물 형상과 무늬들은 토템과 관련이 깊으며 시대별 역사의 변천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차로 조금 이동하여 주차장에 내리니 갈색 벽돌의 7층탑이 멀리서 은은하게 보인다. 당고종 영징3년(652년)에 세워져 고아한 멋이 서안 하늘을 보여주고 있다. 대자은사의 대안탑이 보인 것이다. 누각식 방형전탑이며 주변 건물에서는 이 탑의 역사에 대하여 설명을 하여 주고 있다. 자은사(慈恩寺)는 수나라 때 처음 축조되다가 당나라 때 대자은사로 확대되어 지어졌다. 현장은 불경을 가지고 귀국하여 장안의 홍복사(弘福寺)에 머물다가 자은사로 옮겨온 뒤 불경을 보관하기 위하여 대안탑을 지었다. 현장은 당 정관 원년(627년)에 인도로 출발하고 사막을 지나 어려움을 극복하고 1년을 걸어 천축에 도착하였다. 천축에서 15년 동안 유학하고 70여개국가를 돌아다녔다. 42세 때 650여 부의 불경을 가지고 장안에 돌아와 환영을 받았다. 탑 마당을 비켜서 돌아드니 작은 탑들이 모인 곳이 나왔다. 이곳에서 휴식을 좀 취하였다. 8월은 어디나 덥고 습했다. 끈적거리고 몸은 지쳐가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스스로 아테네, 로마, 카이로와 함께 '세계 4대 고도(古都)'에 꼽힌다고 생각한다. 기원전 11세기부터 서기 10세기까지 13개의 왕조나 정권이 서안에 도읍을 정하거나 정권이 들어섰다. 규모면에서 당시 로마의 세배 크기였다. 중국지형에서 한가운데 위치하며 세계문명이 교차하였다. 희랍계통의 기독교문명과 인도계통의 불교문명, 중동지역의 이슬람 문명, 중국의 유교와 도교 문명이 모두 공존했던 곳이다. 서안 1,100여년의 역사 속에서 서주(西周), 진(秦), 서한(西漢), 당(唐)이 가장 흥성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시안을 중심으로 '세계 8대 기적' 중 하나인 진시황 병마용, 고성 벽과 돌로 된 숲 비림, 서유기의 이야기가 있는 현장법사의 대안탑, 앙소(仰韶)와 용산(龍山)문화의 유적지, 진시황릉, 여산릉, 무릉, 소릉, 건릉 등 "오천년의 중국역사를 서안에서 볼 수 있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 옛날 강태공이 세월을 낚았던 이수하가 도심을 가로지르고, 고전과 현대가 어우러진 도시, 중국 산시성(陝西省)의 성도 서안(시안,西安)이다. 가장 번창했던 당대(618~907)에는 장안(長安)이라 불렸던 곳이다. 3,000년 역사의 고도(古都)의 유물은 현재 시민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다음날 서안미술관에서 미술관측 관계자와 전통미술연구회 사이에 워크숍을 가졌고 전시회를 보게 되었다. 서안의 작가들이 모여 현대 미술을 보여주는 뜻 깊은 자리였다. 우리의 현대미술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전통의 색채는 살아 있었다.

오후에는 성벽 주변의 고성벽순성거리를 구경하고 비림에 도착하였다. 안진경의 안근례비, 안가묘비, 왕희지의 대당삼장성교서비, 유공권의 현비탑비, 장욱의 단천자문, 회소의 천자문, 조맹부의 유천관산시와 달마의 모습 등 비문과 탁본들이 있고 경교(초기 기독교)의 초기 모습이 비의 내용에 있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는 781년 세운 비석으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관련 유물이다. 로마 네스트리우스파가 기독교를 전도하러 중국에 와 겪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다.

북송 철종(哲宗)년간(1090년)에 처음 지어져 현재까지 9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비림은 현재 7개의 대형 진열실과 8개의 회랑 그리고 8개의 비정(碑亭)에 한대부터 청대까지 2,300여 개의 비석을 수장하고 있으며, 그 중 1,000여 개를 전시하고 있다.

저녁때는 고성벽(古城壁)과 장안문을 살펴보았다. 세계에서 지금까지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가장 큰 고성벽이다. 성벽의 주변 길이는 약 13.7km이다. 성벽은 129m 거리를 두고 적대 1개를 쌓았는데 총 98개 적대가 있다고 한다. 서안의 동서남북 4개 성문은 각각 정루, 전루, 자루 등 3중 성문이 있고 성벽 외측 벽이 있으며, 고성벽 주변으로 강이 있고 성문 맞은편에는 수시로 내릴 수 있는 조교가 있다.

다음날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챙겨서 버스에 올랐다. 먼저 찾아 간 곳은 진시황병마용전시관이다. 빗길로 3개의 문을 지나니 병마용 전시관이 나왔다.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여 보고 싶었던 곳이다. 병마용이란 흙으로 빚어 구운 병사와 말을 가리키는데, 불멸의 생을 꿈꿨던 진시황이 사후에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하려는 목적으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힐 만큼 거대한 규모와 정교함을 갖추고 있다. 서안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30km, 진시황릉에서 북동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1974년 중국의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했고, 세상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현재에도 발굴이 진행 중이다.

현재까지 3개의 갱이 발견되었으며, 700여개의 실물 크기의 도용(陶俑)과 100개가 넘는 전차, 40여필의 도자기로 된 말, 10만 여개의 병기가 발굴되었다. 병기들 대부분이 실제무기이며 현재는 창고에 보관 중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도용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 복장, 머리모양을 갖고 있어 그 섬세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더 이상 발굴을 멈춘 곳도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발굴된 병마용의 색채가 변하여 없어지는데 아직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다음 찾은 곳은 진시왕릉이다. 일본인이 옛 기록을 통해서 복원을 한 것인데 사실 시신은 없는 곳이며 산으로 보인다. 멀리서 바라다 볼 수밖에 없었다. 비는 내리고 시간은 쫓기어 기념사진만 찍었다. 중식 후에 낙양 가는 기차를 타야 하기 때문에 현종과 양귀비의 일화가 남은 화청지 등은 귀로만 보았다.

서안은 생각보다 고전적이지도 않고 세련된 도시로도 안보였다. 그것은 구도시의 흉물을 철거하고 새 건물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당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거대한 조각상을 세우거나 건축물 지붕에는 고대 건축의 장식을 살린 모습으로 짓고 있었다. 거리는 차량과 오토바이, 인력거, 삼륜차, 사람들이 마구 엉키어서 다니고 황사 같은 안개가 항상 괴롭히고 있었다. 거대한 나라가 움직이는 것을 보면 사회주의 국가라서 그런가 하면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 자본주의 국가이다. 그래서 이 나라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점입가경이다. 이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는 말도 중국인의 말에서 나왔다. 중국 동진의 화가인 고개지는 감자(甘蔗,사탕수수)를 즐겨 먹었는데 가느다란 가지부터 먼저 씹고 뿌리 부분을 나중에 먹었는데, 이상하게 생각한 친구들이 물어 보았다고 한다. 그것은 처음보다 갈수록 단맛이 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사실 사탕수수는 뿌리 부분이 더 달다. 그래서 경치나 문장 또는 어떤 일이 갈수록 상황이 재밌거나 진하게 전개됨을 뜻하게 되었다고 한다.

기차로 밤에 낙양에 도착했고 다음날 이른 아침 백마사로 갔다. 백마사는 낙양 시에서 차량으로 약 30분 거리(12Km)에 있다. 백마사가 중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절' 이다. 백마사가 창건된 때가 후한(동한)시대인 68년이다. 지금으로 부터 2,000년 전이다. 스님이 경전과 불상을 백마에 태우고 낙양에 도착하였는데, 이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관청에서 숙소를 제공한 것이 백마사의 시초라고 한다. 연꽃은 피어 절 앞을 장식하고 사람들은 사진 찍는데 정신이 없었다. 향불을 진하게 피워대고 있으며 아담한 멋은 없어 보여 아쉬웠다.

다음은 용문석굴로 향하였다. 낙양의 용문석굴은 둔황의 막고 굴, 대동의 원강 석굴과 함께 중국 3대 석굴 중에 하나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도 등록되었다.

시인 조지훈은 그의 수필 '돌의 미학' 에서 "돌에도 피가 돈다. 나는 그것을 토함산 석굴암에서 분명히 보았다. 양공의 솜씨로 다듬어낸 그 우람한 석상의 위용은 살아 있는 법열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라고 했다. 나도 동감하여 감상했었다. 여기 석굴의 불상은 피가 도는 것은커녕 외롭고 고행의 모습만 보이는 것은 왜 일까? 작은 것은 손가락만한 것부터 큰 것은 아파트 크기만 하다.

인체중 머리 부분이 다량 파괴 되었는데 종교적 신념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손괴되고 근래에는 모택동 시절, 홍위병들이 불상의 머리를 집중적으로 파손하여 온전히 남아 있는 얼마 안 된다. 그 중에서 가장 규모도 크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불상은 당나라의 여자 황제 측천무후가 조성한 불상이다. 내가 이 많은 불상을 만난 것은 처음 인 것 같다.

많은 조각상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만난 적이 있고 깨어진 불상은 경주 박물관 정원에서 일 것이다. 그래도 머리만 없고 다른 부위는 있으니 천만 다행한 일인가. 바티칸 피오 클레멘티노 박물관에서 만나는 벨베데레의 토르소는 몸통만 남아서 고고학자나 감상자 들은 저마다 영감을 불어 넣어 한 마디씩 댓글을 달았다. 미술용어인 토르소는 이탈리아어에서 잔가지를 꺾어 내고 남은 통나무 혹은 과일의 씨앗 정도의 말이라 한다. 온전한 상을 기대하려면 이탈리아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으로 가야 할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다윗과 반디넬리의 헤라클레스 등 남쪽 회랑에 조각상이 즐비하고 빼어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용문 석굴의 불상들은 토르소가 아닌 몸을 보여주며 이 험한 길목을 지나는 실크로드의 입성자들에게 염원과 안심의 위로를 보내주었으니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낙양은 북망산이 있는 곳이다. 사람이 죽으면 북망산에 간다는 것이 여기서 나온 말이다. 낙양 북쪽 산으로, 후한(後漢) 이후 왕공(王公)귀족(貴族)의 묘가 많은 곳이기에 우리나라 김세레나의 노래인 성주풀이에도 나온다. "낙양성 십리 하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에서 나오는 저 무덤은 이곳 북망산을 말하는 것이고 온갖 영화를 누리던 왕과 왕족이 한 줌 흙으로 돌아간 곳이다. 당나라 때 안녹산과 사사명이 저지른 반란으로 서로 죽이고 죽이는 참사가 만 8년간 이어져 혼란스러운 곳이었다. 안녹산이 당나라 용병제도로 군대에 들어 온 것은 그의 특유한 재치와 큼직한 몸매로 익살스러워 뭇 대신이 반대를 불구하고 현종의 총애를 받았고 양귀비의 양자가 되기도 했다. 그는 돌궐과 페르시아인의 혼혈족이었으나 상서좌복야라는 신호 후에 봉해지기도 했다. 그는 현종주변 부패를 척결하고 양귀비의 육촌 오빠인 양국충의 난을 제압하는 명분으로 범양에서 반란을 일으켜 33일 만에 낙양을 함락하였다. 다급해진 현종은 양귀비와 그의 자매, 황족 등 신하를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서남쪽 촉나라를 향하다가 장안에서 백 여리 떨어진 마외역에서 굶주린 이들 호위병이 불만을 터뜨렸다. 사태가 양국충 때문에 생긴 것으로 알고 양국충 목을 베고 현종의 앞길을 막았다. 그리고 양귀비도 죽어야 한다고 하여 현종은 눈물을 머금고 양귀비의 목을 매라고 명하였다. 양귀비는 이렇게 우리의 기억에 남게 되었다. 안녹산은 다음해 정월 스스로 황제로 칭하며 국호를 대연, 연호를 건무로 하였다. 그는 현종의 뒤를 이은 숙종 지덕2년에 둘째 아들 안경서에게 피살 되었고, 안경서는 759년 사사명에게 살해되었다. 사사명 또한 절도 사이며 돌궐사람이다. 그 또한 대연황제가 되었으나, 그 또한 아들에게 살해되었다. 이 난을 안사의 난이라고 한다. 부질없는 정권욕이었다.

백거이가 양귀비와 현종의 비극적인 사랑을 장한가로 만들었다. 장편 서사시 장한가의 마지막 구절에는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했네.' 가 나온다. 이 연리지를 상징이라도 하는 듯 소림사 상주원 내에 연 리지 나무가 서 있다. 서로 다른 나무가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무술도 중요하고 면벽수행도 중요 하겠지만 서로 다른 것끼리 사랑으로 화합하고 화평을 누리라는 뜻일 것이다.

백거이는 당나라 시인이다. 유교적 이상주의를 내세워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는 풍자시를 짓고, 백성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 했으며 죽음 문제로 유교에서 도교와 불교 교리에 관심의 방향을 전환하기도 했다. 장안을 벗어나 58세에 낙양으로 가서 시와 술과 거문고를 벗 삼아 유유자적하게 지냈다. 향산사에 자주 찾았으며 스스로 향산거사라고 하고 75세에 향산사 옆에 묻혔다. 향산사는 용문 석굴 앞 강 너머의 산에 있는 절이다. 백거이 무덤은 백원(白園)이라는 정원에 있고 예전에 장개석 별장으로도 사용된 곳이라 한다.

삼국지가 바로 이 낙양을 주 무대로 펼쳐진 것이다. 후한 말, 각지에서 일어난 황건적의 난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천하의 호걸들이 들고 일어났는데 조조와 유비, 관우, 장비 등이 이곳에 인생을 걸었던 것이다.

낙수(洛水)의 양지(陽)에 자리 잡고 있다하여 이름 붙여진 낙양은 화하문명(華夏文明)의 주요 발상지 중 하나로 허난 성(河南省) 서부의 황하 중류에 위치해 있으며 중 · 서부지역으로 진입하기 위한 관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 13개의 왕조가 이곳에서 수도를 삼았었다. 애달픈 역사도 전한다. 측천무후 때에 백제가 망하고 의자왕이 낙양으로 끌려와 측천무후 앞에서 항복 식을 하고 낙양에서 죽어 유명한 북망산에 묻혔다. 신라의 김춘추가 군사 원조를 청하러 측천무후에게 매달린 곳도 낙양이다.

낙양은 모란(牡丹)의 도시이다. 모란의 꽃말은 부귀이며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다. 오늘날 중국화이기도하다. 간쑤 성, 산시 성, 쓰촨 성, 산시 성 등 중국 북서지역이 원산지로 알고 있다. 신농본초경에도 단피라는 약재로 쓰이며 관상용으로 재배되어 헌상 품이 되기도 하였다. 측천무후가 즉위 시 아직 겨울이라서 모란이 피지 않아서 그 꽃을 볼 수 없게 되자 연회를 그치게 하였다. 측천무후의 딸 태평공주가 비위를 맞추는 말을 했다. "꽃들이 폐하의 명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에 마음에 드는 듯 했다. 중신은 "초목이 피고 지는 것은 하늘의 섭리"라고 간언 했다. 그러나 측천무후는 공주의 말에 따라 꽃을 피우게 하라는 시를 짓게 하고 황궁 화원에서 불살라 꽃신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게 했다. 이튿날 이른 아침 꼴들이 피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금세 축하연을 다시 열게 되고 겨울 빛 속에서 매화, 복숭아, 자두, 살구, 해당화, 작약, 장미 등 온갖 꽃이 펴서 자신의 위대함을 즐겼다. 그런데 모란만은 피지 않아서 노하였다. 그래서 화원 내 모란을 모두 뽑아서 낙양으로 추방했다. 그 뒤에 모란은 낙양화라 불렸다. 불에 타서 가지가 검게 그을린 모란의 자손을 초골 모란(焦骨牡丹)이라 부른다.

모란은 수나라에 이어 당에서 지위를 인정받고 현종과 양귀비의 총애를 받아 모란이 아니면 꽃이 아닐 정도이다. 대사원과 왕후 귀족의 정원에 진귀한 꽃으로 피어났다. 한 송이에 수천 수만금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모란 꽃말에는 하늘 아래 둘도 없는 미녀, 왕자 내지는 가장 뛰어난 자, 부와 영애의 의미가 있다.

이곳에서는 천년제도 목단화성 (千年帝都 牧丹花城), 즉 천년간 제국의 수도였고 모란화 만발하는 꽃의 도시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꽃은 없고 실사 출력한 꽃 사진은 벽에 붙어있고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 조화들이 상점에 있을 뿐이다.

다음으로 간 곳은 소림사이다. 중국 제 1의 선종 사찰이자 소림파 무술의 발원지인 소림사는 정주와 개봉 사이에 있는 등봉시(登封市) 중악숭산(中岳嵩山)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소실산(少室山) 아래의 무성한 숲속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소림사'라고 불리게 되었다.

북위 태화 19년(495년)에 효문제가 인도 승려 발타대사를 위해 지어졌으며, 중국 선종의 조정이 되었다. 소림사하면 달마대사가 떠오를 정도로 달마대사의 면벽(面壁) 수련은 널리 알려져 있다.

면벽 수련은 9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면벽은 움직임이 없는 벽과 같이 정신의 동요가 없게 하는 수련 과정이다. 면벽을 마친 후 신체가 많이 약해진 달마대사는 건강회복을 위한 신체수련에 들어갔는데, 이것이 점차 발전되어 소림파 무술의 일부가 되었다. 달마대사의 면벽 수련과 함께 또 유명한 것이 그의 제자 혜가의 이야기이다. 혜가는 달마대사의 제자가 되기 위해 찾아가 받아줄 것을 청하였다. 하지만 달마대사는 하늘에서 붉은색의 눈이 내리면 받아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주저 없이 혜가는 자신의 왼쪽 팔을 잘라서 쌓여 있던 하얀 눈 위를 붉게 만들어서 달마대사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한다.

이번 여행은 동서교류 출발점 의 실크로드의 도시이며 인류의 다양한 문명을 발견하고 공부할 수 있는 학습자료 제작의 기회가 되고 각 지역별 건축과 조각, 각종 공에 미술품들을 보면서 동양과 서양의 혼합된 독특한 양식을 감상하고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그들의 삶과 문화에 대해 깊이 있게 성찰할 수 있었으며, 대안탑, 용문 석굴 등 오늘 날까지 잘 보존해 있어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며 오늘날까지 후대에 남겨져 자손들을 살리고 있음을 통해 문화에 중요함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척박한 대지에서 삶을 영위 하는 모습을 통해 기다림과 여유 등을 생각할 수 있었으며, 전통미술 연구회를 통해 선생님들이 직접 프로그램을 만들고 미술교류를 통하여 보다 많은 문화를 이해하고 경험을 축적하고 지혜를 스스로 터득하여 보다 성숙된 생각과 태도로 교육 현장에 임할 수 있는 능력이 신장 되었으며 앞으로 서안 청소년 학생들과 우리 전북의 청소년 학생 작품으로 교류를 하면서 우의를 다지고 세계적인 보편성을 찾아가면서 문화 인류애를 함께 공유하고 사고를 발전 시켜 평화와 새 문화 창달에 앞장 설 것으로 본다. ▣

서 . 안 . 낙 . 양 . 을 . 다 . 녀 . 와 . 서

수록 도판

용문석굴
용문석굴
고성벽
고성벽
석굴 파노라마
석굴 파노라마
용문 파노라마
용문 파노라마
소림사 경내
소림사 경내
서안미술관 환영·기념촬영
서안미술관 환영·기념촬영
대안탑·자은사
대안탑·자은사
서안 성문 앞
서안 성문 앞
비·비림
비·비림
백마사·장안문·고성벽·병마용
백마사·장안문·고성벽·병마용
병마용갱·백마사 입구·용문석굴
병마용갱·백마사 입구·용문석굴
소림사
소림사
비림 앞 기념촬영
비림 앞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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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게재: 나의여행기(기행문) / 회화지 19호(2012) 62–71쪽 · 원본 PDF 62쪽 ↗

이 지면의 도판

용문석굴(서안 · 낙양 기행문 표제면)-용문석굴(서안 · 낙양 기행문 표제면)
고성벽(서안 성벽 위에서)-고성벽(서안 성벽 위에서)
4)대안탑 5)대안탑 6)자은사-4)대안탑 5)대안탑 6)자은사
1)서안미술관측 환영 2)서안미술관 3)미술관에서 기념촬영-1)서안미술관측 환영 2)서안미술관 3)미술관에서 기념촬영
12)서안미술관 · 서안 성문 앞-12)서안미술관 · 서안 성문 앞
석굴 파노라마-석굴 파노라마
용문 파노라마-용문 파노라마
15)백마사 16)장안문 17)고성벽 18)병마용-15)백마사 16)장안문 17)고성벽 18)병마용
13)비 14)비림-13)비 14)비림
19)병마용갱 20)병마용마차 21)백마사 입구 22)용문석굴 입구 23)용문석굴-19)병마용갱 20)병마용마차 21)백마사 입구 22)용문석굴 입구 23)용문석굴
24)소림사-24)소림사
소림사 경내 기념촬영-소림사 경내 기념촬영
비림(碑林) 앞 기념촬영-비림(碑林) 앞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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