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으로부터
지역으로부터 1)
글 채 영 (공간시은 운영자)
관객의 시선이 그림에 닿는 것은 작가의 조형세계 안으로 관객이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 안에서 관객과 회화 사이에, 그리고 관객과 작가 사이에 '관계' 가 만들어진다. 이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회화에 대한 각자의 태도들이 평면 위에서 만나 서로 간에 조응이 이루어질 때 이 관계가 형성된다. 서로 입장들이 결정되고 유보되는 과정 속에서 비평의 지점 역시 생성되거나 소멸된다. 물론, 당연하게도, 작업에 대한 이해의 깊이는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이를 배려한다고 해서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미리 가늠하지도 못할 상대의 미적판단 수준에 맞춰 작업을 하지 않으며 관객 역시 작가의 조형 능력을 미리 판단하고 전시장에 들어서지 않는다.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태도의 문제다.
지역의 전시는 종종 '감상과 해석은 관객의 몫' 이라는 '열린 해석' 의 늪에서 허우적대다가 아무런 관계를 맺지 못한 채 끝이 난다. 그렇다고 지역의 전시가 랑시에르의 말처럼 '해방된 관객' 으로 지역의 관객을 대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미술과 이해하지 못하는 관객으로 나누고 그 태도의 차이와 그에 따른 한계를 체감할 뿐이다. 물론 이러한 차이가 지방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국내외 미술관 풍경에는 '예술의 대중화' 가 순수예술을 휘젓고 다니는 가운데 셀카봉으로 무장한 인스타그래머들이 몰리는 전시와 평일 한 자릿수의 관객이 찾는 개념미술 혹은 설치미술 같은 전시들이 공존한다. 관객과 작가 사이의 벌어진 차이는 중앙과 지방 모두의 문제이지만 지방의 경우 상대적으로 더 열악한 환경에 있을 뿐이다.
다만 지방의 미술인들이 이 차이를 지역 내에서 미술인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미리 치부함과 동시에, 전문인력 부족과 미술시장의 협소함이나 상대적/절대적으로 적은 관객층을 이유로 이를 영원히 풀 수 없다는 태도로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이 어쩔 수 없는 현실' 에 대한 비판적 태도의 작업들은 지역에서 볼 수 없는 걸까. 오늘날 한국현대회화는 현실을 외면하고 형식만을 탐구했던 과거의 흐름들을 비판하고 전유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작품의 안과 밖에서 이데올로기적 시스템들과 관습적인 제도들에 도전하는 예술의 형식들은 외면 받고 오로지 외형 묘사 기술과 내면 탐구의 감각들로만 채운 평면들이 전시장에 있다면, 지역미술의 위기 혹은 부재는 미술 내부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지난 30여 년간 미술잡지의 대담이나 강연, 라운드 테이블 등에서 지적된 지방 미술의 위기와 부재에 대한 문제점들은 지나치게 반복적이다. 이 반복은 전문인력의 부재, 인프라 부족, 미술시장의 협소함이나 중앙과의 차이라는 명확하게 지적되어온 문제들을 스스로가 해결한 능력이 없음을 반증하는 일이 된다. 그런 상태에서 갑자기 행정가나 정치인 혹은 문화 관련 기획자의 입장이 되어 복지와 공공 지원을 해답처럼 요구하는 일은 또한 자본과 관력에 지나치게 밀접한 '공모자' 에 대한 의심을 미술계 스스로가 만드는 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노력 또한 필요한 것이겠으나 중요한 것은 오히려 앞서 지적한 이 한계 그리고 차이를 넘어서는 노력이 내부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점이다. 일시적일 뿐인 외부의 도움 없이 지역의 미술은 이 차이를 좁힐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지역 미술이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지역미술이란 있는가. 이제는 지겹고 따분한 이 질문의 답은 그럼에도 언제나 유보된다. 물론 전북지역 작가들에게서 공통인 특정 특정한 화풍을 찾을 수 있고 형식이 뚜렷하게 존재하거나, 혹은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지역 정체성을 각자의 작업에서 찾을 수 있다면 미술의 지역적 특성을 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지역의 미술에 있어 고유한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다 하더라도 지역의 미술가들이 추구하는 공통적인 지향점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다수가 동의할만한 시각예술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면 유의미한 논의들로 발전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논의들이 지속성을 갖는 일은 어려워 보인다. 지역에 대한 리서치와 아카이빙, 혹은 커뮤니티 아트를 기반으로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다수의 작가가 공통적으로 지역적 특성을 작업의 중심에 놓거나 지역의 특성들을 고집하여 작업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지역을 대표한다고 하기는 어려우나 지역 내외에서 인정받고 활발하게 활동하는 몇몇 지역-작가들을 떠올려 본다고 한들, 이들의 작품들을 공통의 지역적 특성으로 설명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지역성' 에 대한 논의는 우리를 불분명한 실체 어디쯤에서 헤매게 만들곤 한다. 어쩌면 우리는 이 '지역' 의 철지난 이데올로기의 뜬구름 속에서 눈먼 채 허우적대다 휘두른 팔로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미술의 지역성' 은 '지역의 한계' 와 다른 것이지만 이 둘은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 얽혀 있는 곳에는 부서지지 않는 '견고한 울타리' 가 있다. 이 울타리는 지역적 특성의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지역의 미술가들과 지역의 정치와 행정, 복지와 지원, 각종 공모 사업 사이에 벌어지는 이해관계가 있다. 과거에 이 울타리는 높을 뿐 아니라 이 좁은 지역 내에서 작동하는 학연과 지연의 끈끈함 때문에 넘을/넘어올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지역성은 언제든 우리가 떨쳐낼 수 있으며 넘을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지역성을 전유하거나 탐구하며, 비틀어대거나 비판하는 작업도 가능하다. 이를 낡은 것으로 치부할 수 있고 이후의 새로운 논의들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중앙과 구분되는 지방의 이분법적 한계를 재맥락화하여 작업의 주제로 삼을 수 있다. 이 견고한 울타리는 종종 미술의 내부보다 외부에서 작동한다. 그곳에서 관객과 회화 사이의 관계를 막는다. 지역의 관객은 미술의 지역적 특성을 보기 위해 전시장에 찾지 않는다. 이미 관객은 전지구화 시대, 멀티미디어 시대에 익숙해져 있다.2) 물론 동시대 회화작품이 항상 새로운 것이어야 하거나 중앙의 흐름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 의 감각들이 각자의 조형언어로 재현되어야 한다. 시각이미지는 현실세계를 반영한다. 새로운 매체와 방법론이 전통적인 회화를 대체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변화에 대하여 오늘의 회화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가 지역의 미술에서도 보여야한다.
반복되어온 지역 미술의 문제점에 대한 임시적인 처방들로 전시공간을 만들고 아트페어를 개최하고 전문인력을 초대하고 국제 미술전을 개최하고 각종 지원 사업들이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관객과 작품이 관계들을 맺어갈 때 가능하다. 그래야 관객이 늘고 미술시장과 인프라가 생겨날 것이다. 관객이 순수미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전시장에 있는 작품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관객은 사실적인 재현과 서사의 기능은 사진과 영상을 통해서, 인상과 내면의 표현은 과학 기술을 활용하여 오감을 자극시키는 새로운 미디어들을 통해 이미 더 효과적으로 접해 오고 있다. 멀티미디어 시대를 지나가는 동안에도 지역의 회화가 여전히 사실적/환영적 재현의 기술적 측면이나 풍경의 인상과 내면의 표현에만 치우쳐 전시장에서 일차원적으로 반복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당연히 재현과 표현은 문제가 아니다. 이 재현과 표현을 동시대회화에서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지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으면서 자꾸 지역의 한계와 지역성의 울타리로 들어가는 것이 문제다.
회화의 위기와 종말 그리고 부활까지, 평면을 둘러싼 통찰력 있는 논의들이 한 세기를 훌쩍 넘어 진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미술의 왕좌를 회화가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것의 굳건한 위상 때문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며 그 지평을 넓힌 덕분이다. 지역의 회화가 포스트-매체를 의식하여 변화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 동시대 회화는 포스트-매체를 만든 시대에 반응하고 있고 또한 반응해야 한다. 지역의 회화가 지역의 한계와 지역적 특성 사이에서 여전히 방황하고, 동시대적 가치와 의미들로부터 멀어진다면 견고한 울타리는 또다시 높아질 뿐이다. 누가 그 울타리를 두려워하는가. 울타리를 넘으려하는 자인가 아니면 울타리 안에 머무르는 자인가.
1) 지역으로부터라는 제목의 첫 번째 글을 2017년 이봉미 기획으로 지역청년 예술가 교류프로젝트의 결과 보고전 성격의 〈발화지점〉 전시에 썼다. 지난 글은 서울을 중심으로 중앙과 주변의 미술이 나누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지역의 울타리를 '이미' 넘나들 수 있게 된 지금의 환경을 이용하자는 내용이었다. 이번 글은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전시공간 운영자로서 중앙과 지방을 오가며 느낀 내용을 바탕으로, 혹시 전북의 미술이 지역의 한계나 '지역성' 의 견고한 울타리와 무관하게 단순히 뒤처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하여 함께 의심해 보고자 한다. 2) 종종 지역 관객의 수준이 낮음을 논하지만, 전시관람을 목적으로 방문하는 지역 관객들의 미술에 대한 이해도는 높은 편이다. 다만 그 수가 중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을 뿐이다. 이미 관객들은 해외 관광을 통해서, 블록버스터 기획전을 통해서 명화나 새로운 매체의 전시에 노출되어 왔다.
원 게재: 특별기고 / 회화지 24호(2017) 46–48쪽 · 원본 PDF 44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