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화선지를 마주하고 있으면 시간까지도 멈춘 듯한 고요, 어느덧 차분해진 내가 심연 속에 서 있다. 물과 먹이 만나서 시원스레 뻗다, 곱게 번지고 또 자연스럽게 엉기며 누적되는 내 기억의 편린들. 마음 한 켠에는 설레임이 일고 지나온 시간 속에서 감동이었던 순간들이 연이어 반짝인다.
꽃도 나무도 나의 화면에 등장한 순간, 더 이상은 꽃이, 나무가 아니다. 선과 면과 농담으로 발현된 형상은, 그저 내가 기억한 순간들의 감정이 펼쳐지고 집적된 것이다. 내 작업은 마치 오랜 동안에 얽혀있던 어떤 그리움의 실타래를 하나씩 하나씩 푸는 듯하다. 붓을 잡은 손의 떨림처럼 서툴고, 빛에 투영된 그림자처럼 본체를 명확히 알 수도 없지만 또 다른 나를 찾아가는 이 모색의 여정에 오늘도 마음을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