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감상의 지름길
고정관념의 탈피와 평소 최소한의 관심과 실천 요구
흔히 그림을 감상할 때 우리는 그 화폭에 그려진 사물이 원래의 사물과 얼마만큼 유사하게 그려졌는가를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실제 사과와 꼭 같이 그려진 정물화는 한 알의 사과에서 느끼게 되는 미감이나 식욕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차별화 된다. 사실상은 먹을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그림의 사과를 훨씬 더 선호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그림속의 사과가 화학적인 반응을 일으키지 않아 썩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나 액자 속에 넣어진 고급스러운 치장 때문에 실제 사과보다 훌륭하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그림 속의 사과는 이미 실용가치를 상실한 환영(Illusion)적인 차원의 사물이다. 먹을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사과는 무엇인가를 감성적으로 발생시키는 주파수를 끊임없이 세례한다. 이를테면 결실, 수확의 풍요로움이라든가 상큼한 미감적인 어떤 상태, 그 상태로부터 직결되는 매력과 인간미 또는 자연미 모두가 가능하다. 그렇게 보면 그림의 사과는 이미 상징언어로서의 훌륭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감정적 매체로서 외적인 부호를 발산하고 있는 셈이다.
만일 그 대상이 단순한 사물이 아닌 칼이나 권총, 시계나 건물, 인물의 표정 등이 동시에 한 화면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면 상황은 크게 진전된다. 즉 그 상징성이 훨씬 강화되고 뚜렷해진다는 말이다. 여기에다 색채가 칠해진다. 붉은 색과 초록색, 노란색과 검정색, 색채는 어떤 의미에서는 형체를 앞지르는 강한 상징을 유발한다. 이를테면 흰색은 순결 공허 신비, 연두는 소생 꿈 청춘 평화, 보라는 고귀 우아 고독 신비 숭고 권위, 갈색은 우아 안정 지성 고귀를 연상시킨다. 형태와 색채를 통해 유발된 상징은 다시금 그 형태의 배치에 의한 구도와 왜곡, 묘사된 상태, 강조와 생략 등에 의해서 변형되고 색채의 농담, 혼합, 재료나 기법 등에 의해 각기 완연히 다른 차원의 상징으로 분리된다.
이를테면 사과 한 알을 만일 보라색으로 칠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도 반쪽밖에 없는 사과의 형태에 배경은 회색이라 하자. 실제의 사과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상징이 유발된다. 극도의 고독일 수도 있고 배반적 비극을 연상시키는 무엇이 될 수도 있다.
미학적으로 상징(Symbol)은 본디 그리스어의 '접합한다'는 뜻에서 연유되지만 일정한 표정으로서 어떤 의미를 가리킨다. 그 종류도 다양해서 자연 상징과 상투적 상징, 관념, 기분상징, 유형화된 상징, 간접상징, 직접상징, 부호적 상징 등이 있다. 가령 비둘기가 평화를 상징한다면 상투적 상징이다. '13'이 불운을 상징한다면 부호적 상징이며, 구름 위에 꽃밭이 유토피아적인 것을 상징한다면 관념 상징에 속한다.
모든 미술품은 위와 같은 상징체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령 시가 상징적이지 못하다면 언어의 단순한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화가는 무엇을 그리더라도 상징을 내포하지 못하면 사진의 찬란한 리얼리즘에 무릎을 꿇고 말 것이다. 파바로티나 휘트니 휴스턴의 음악이 무슨 뜻의 가사인지는 모르지만 그 곡조만으로, 음성만으로도 강렬한 감성의 소리 상징을 발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쪽의 이해만으로도 감동적인 감흥을 세게 받게 된다.
문제는 얼마만큼 심오하고도 아름다운 차원의 상징을 가능케 할 수 있느냐는 것이 곧 미술과 예술전체의 숙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현대의 전위미술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요건으로도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플라톤이 예술을 모방설로 규정한 차원과는 달리 얼마나 닮게 그렸느냐는 논제보다는 어떤 차원의 상징을 가능케 하고 있느냐는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때로는 직접 사과나 꽃 등 물질 자체가 화랑에 등장하거나 완전 누드로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는 전위적 행위가 등장하고,
TV나 오디오를 통한 메시지의 전달을 시도하는 등은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 다만 그것은 작가가 전달하려는 언어의 자유로운 방법론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그 다양한 방법의 의도와 표현 현장에서 무엇을 느껴야 할 것이냐는 상징언어 문제가 우선할 뿐이다.
아름다움의 참뜻
다양한 미의 해석과 방법론 대두
'고귀하다' 형식적 미는 옛말…개성표출은 자유롭게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우리나라의 화가를 꼽으라면 이중섭, 박수근을 빼놓지 않는다. 이들은 분명 한국 근, 현대미술사의 고호나 고갱과 같은 존재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술시장에서도 상상조차 하기 힘든 그림값을 부르고 있으며 그나마도 작품을 직접 대해보기가 쉽지 않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작품세계를 보자, 옷을 입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복숭아나무 같은 가지를 타고 오르고 있다든가, 게를 잡는 모습, 머리 위에 항아리를 이고 가는 우리 여인네, 노인 몇 분이 큰 나무 밑에 둘러앉아 있는 모습, 성난 황소, 까마귀와 전기줄 등이 다소 알아볼 수 없도록 그려져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어디에서도 이들 작품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해왔던 아름다운 부분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어떤 작품은 성난 황소의 모습 같아 힘차고 생동감이 있기는 하지만 보다 안정된 정서에는 걸맞지 않다. 무엇인가 일어날 것만 같고 그림의 상황이 불안한 느낌으로 휩싸여 있는 듯한 예도 있다.
이들 작품뿐만이 아니다. 올림픽 조각공원에 있는 세계 각국 작가들의 조각 작품들, 그 어느 곳에서도 한 송이 장미꽃과 같은 아름다움을 느끼기에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 대신 심하게 왜곡된 대상의 형체나 파괴된 모습들, 알지 못할 추상적 조각품들이 많으며 다빈치의 모나리자 같은 우아한 미감과 비너스의 균형 잡힌 미감은 없다. 게다가 가끔씩 대하게 되는 행위 미술의 난해함과 인사동, 관훈동 일대를 비롯한 청담동 등의 화랑가에서는 어디에서도 미술의 전형적 아름다움이랄 수 있는 작품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들의 작품세계를 보자, 옷을 입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복숭아나무 같은 가지를 타고 오르고 있다든가, 게를 잡는 모습, 머리 위에 항아리를 이고 가는 우리 여인네, 노인 몇 분이 큰 나무 밑에 둘러앉아 있는 모습, 성난 황소, 까마귀와 전기줄 등이 다소 알아볼 수 없도록 그려져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어디에서도 이들 작품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해왔던 아름다운 부분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어떤 작품은 성난 황소의 모습 같아 힘차고 생동감이 있기는 하지만 보다 안정된 정서에는 걸맞지 않다. 무엇인가 일어날 것만 같고 그림의 상황이 불안한 느낌으로 휩싸여 있는 듯한 예도 있다.
이들 작품뿐만이 아니다. 올림픽 조각공원에 있는 세계 각국 작가들의 조각 작품들, 그 어느 곳에서도 한 송이 장미꽃과 같은 아름다움을 느끼기에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 대신 심하게 왜곡된 대상의 형체나 파괴된 모습들, 알지 못할 추상적 조각품들이 많으며 다빈치의 모나리자 같은 우아한 미감과 비너스의 균형 잡힌 미감은 없다. 게다가 가끔씩 대하게 되는 행위 미술의 난해함과 인사동, 관훈동 일대를 비롯한 청담동 등의 화랑가에서는 어디에서도 미술의 전형적 아름다움이랄 수 있는 작품을 발견하기 어렵다.
이와 같다면 적어도 미술, 예술적 시각에서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어떻게 규명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쾌감인가, 감각적 인식의 무엇인가, 사색을 통한 어떤 이성적 행복감인가.
본디 독일어의 'Schön'이란 미(美)의 뜻은 행위, 사상, 언어, 사물, 실험, 창작 등 여러 뜻으로 쓰였으며 근대엔 어원이 변천해서 고귀한, 좋은, 어울리는 등의 뜻으로 쓰이게 된다. 이는 곧 정신적 쾌감과 직결되는 동양의 진, 선, 미적인 뜻을 포괄하는 뜻을 지니게 되며 동서간의 다소 차이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이와같은 해석이 '미학'이라는 학문 영역에 진입되면 정신적 쾌감이나 진, 선, 미에 대한 해석이 다소 견해를 달리한다. 즉 채플린의 연극은 희극적, 골계적인 미감을 자아내고 유명한 피카소의 대표작 '게르니카'는 전쟁의 참상을 그린 그림으로 비장·비극미를 나타내며 '모나리자'는 우아미의 전형이다. 그런가하면 순수미가 있고 숭고미가 있으며 심지어는 추(醜)의 미가 있어서 크게 여섯 가지로 나뉘는 미의 원환적 관계를 형성한다.
딜타이(Wilhelm Dilthey)와 데스와(Max Dessoir)라는 학자에 의해 주창된 이 방법은 우리가 예술품뿐 아니라 다른 어떤 상황에서도 야기되는 미적 상황에 대해 보다 다양하고도 폭넓은 해석을 가하는 이론이며 설득력이 절대적이다.
우리가 어떤 비극적인 작품에서 심하게 구부러지고 파괴된 장면을 목격하면서 전율을 느낀다 할지라도 그것이 종국에 가서는 미를 표현하기 위한 방법적 수단, 즉 메커니즘적인 것이라면 그 자체가 미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고 보면 미(美)란 엄숙하고 정돈되고 침묵적인 것이거나 희극적인 것, 비극적인 것 어느 것과도 직결되며 따라서 미술품·예술을 창조하고 감상하는 자세 역시 한 송이 국화나 장미꽃과 같은 일원적인 생각으로 그 아름다움을 요구하고 표출하려 한다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
오감(五感)의 감성을 갖는 인간 구조의 감성 범주는 이처럼 그 절정인 미감(美感)에 이르는 과정에 있어서도 오감적 일 수 밖에 없다는 뜻이 된다.
서두에서 이중섭과 박수근의 예를 들었지만 비단 그들 뿐 아니라 근, 현대의 미술사는 고전에서 규범화되고 형식화되었던 아름다움의 가치나 형식을 보다 자유롭게 개성적으로 표출하려는 의지를 표방해왔다. 그러므로 그 접근 또한 보다 가시적이고 포괄적인 시각에서만이 참뜻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미술의 이해 – 화랑, 미술관 자주 찾아야
반복 관찰하면 나름대로 안목 생겨
현대 미술은 더욱 그러하겠지만 일상적으로 미술은 어느 누구에게나 쉽게 접근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닐 것이라는 추상적인 생각이 지배적으로 작용, 더욱 그 감상의 기회를 갖기 어렵다. 그래서 '예술의 예외주의(Art Exceptionalism)'라는 학술적 용어까지 생겨났다. 즉 예술과 사회는 이중구조에 있다는 뜻이다. 이른바 모더니즘시대에는 극단적으로 치닫는 난해한 사조가 유행함으로써 그 간격을 더욱 멀게 벌려 놓았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예술이 사회 대중, 현실을 딛고 서 있는 부분이 많다. 그러므로 미술감상의 첫 번째 조건은 취미 유발이며 취미에 의해 가깝게 접근해보려는 욕구를 자주 가져야 한다. 즉 화랑, 미술관을 자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인지, 무슨 내용인지 몇 번에는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몇 년을 두고 반복해서 작가들의 변화를 유심히 관찰하다 보면 자연히 나름대로의 안목이 생긴다는 것이다.
두번째로는 무엇을 닮았는가하는 구체적, 형상적 비교를 하려고 한다든가 자신의 감정을 지나치게 개입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특히 추상화의 경우는 형체가 무시되어 있기 때문에 더더욱 무엇과 닮을 수가 없다. 그보다는 그 색채, 선, 면, 터치로 인해 다른 관념적 상상이 유발될 수 있어야 한다. 그 유발된 상상의 깊이와 내용이 곧 미술품의 내용과 직결되며 감상자는 그 모든 것을 보다 가깝게 접근하도록 관조된 상태로 작품을 읽고 느끼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관조적 상태란 일체의 현상적 인식을 지워버린 상태이므로 철저히 작품 속에 빠져들면서 잠재의식 속에 내장되어 있는 자신의 기억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모종의 상징체를 연상해 보는 것이다.
컵 속에 물이 가득 차 있으면 다른 어떤 물질도 담을 수 없듯이 가능한 한 미술품 앞에 섰을 때는 우선 작가의 의도를 읽어 내리는 정신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성적 훈련은 단기간에 이루어지기보다는 특히 한 작가·유파의 시기별, 경향별 여러 작품을 꾸준히 감상해 봄으로써 보다 쉽게 파악해 낼 수 있다.
셋째로는 작품이나 작가에 관한 사전 이해가 필요하다. 예를 든다면 이중섭의 은박지 그림의 의미를 알려면 당연히 당시 6·25피난 시절의 작가가 처한 어려웠던 생활의 면면을 이해함으로써 더욱 쉬울 수밖에 없다.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역시 오랜 미국 생활에서 저며오는 고국을 향한 애절한 서정적 감성에서 비롯된 조형 언어였다. 운보의 바보그림의 배경이 있고, 피카소의 독특한 해부방식에도 그 상황의 특수성이 있다. 운보 김기창이 바보 그림을 그리게 된 큰 계기가 76년에 부인 우향 박래현 여사의 절명으로 인해 본격화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피카소는 아프리카 흑인 조각에서 많은 힌트를 얻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어느 작가든 그 작가를 형성하는 삶과 예술의 배경이 있고 화집, 카탈로그, 잡지, 서적 등을 통한 사전 이해는 극히 중요한 감상법의 지름길이다.
넷째는 미술의 전반적인 영역에 대한 기초적인 교양차원의 이해가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판화란 어떤 기법이 있고 에디션(Edition) 번호란 어떤 의미인지, 석, 동판화, 실크스크린이란 무엇인지 기법을 모르고서는 아무리 훌륭한 판화를 소장해도 의미가 감소된다. 왜 인쇄 매체와는 다른 특수성이 있는지를 모른다는 뜻이다. 유화에서도 크게 보이는 기름이나 주요 도구, 조각에서 브론즈가 왜 여러 작품의 복제가 가능한 지 그 이유 등을 모르고서는 그 분야의 이해가 불가능하다.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미술품은 큰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불필요하다는 생각까지 서슴치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미술은 크게 보아 분명히 고도의 정신적 미감을 창출하는 인간 가치의 구현을 근본으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 의학, 공학, 수리학적인 분야 등과는 달리 무조건 쉽게 접근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독선이며 아집이다.
컨스타블은 '참된 취미는 어중간한 취미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위의 네 가지 요건이 선행될 때 우리 주변의 미술관, 화랑에서의 미술감상은 보다 차원을 달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곧 나아가서는 한 국민의 문화 GNP와 직결되는 것이며 문화시민의 길로 나아가는 정도이기도 하다.
원 게재: 특별논단 / 회화지 16호(2008) 22–27쪽 · 원본 PDF 22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