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화의 정신적 배경으로서의 선(禪)사상




중국에서 선사상이 최초로 전해진 것은 520~526년간에 보시달마(菩提達磨)에 의해서이다. 이때의 선사상은 자기 자신만을 독선적 깨달음의 경지를 구하는 것이 아닌 널리 중생을 위한 전미개오(轉迷開悟)에 힘을 쓰는 이타적이고 능동적인 것이었다. 명상을 하는 수행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이 타이의 법리에 따른 행위가 또한 수반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달마이후 혜능에 이르는 6대에 걸쳐 이와 같은 선사상의 특수성은 중국인에게 강한 실증주의와 직접적으로 결합하여 인도사상으로서의 선사상과는 달리 극히 현실성을 띤 중국적 선사상을 이룩하였으니 깊은 산속 사찰에서 은거하며 사찰에서 도를 깨닫기 위하여 정진하는 것이 아닌 이른바 일상생활에서도 도를 깨달을 수 있다는 일상적 선이 제창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선종의 정신은 깊은 산사의 자기수양으로부터 완전히 현실 인생의 일상생활 속으로 파고들었으니 물을 긷고 나뭇짐을 지는 동안에 아니 기뻐 웃고 성나 욕하는 일상생활 중에서도 다 선을 통할 수 있고 묘도(妙道)를 터득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자유자재한 생명력이야 말로 종교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다시 현실의 인생으로 돌아온 최초의 부르짖음이었으니, 중국역사상으로 본다면 일대종교혁명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선사상이 중국 회화에 본격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 한 것은 당대 수묵산수화의 등장부터이다. 당대 수묵산수화의 배경에는 선종의 정신과 긴밀한 정신적 관계를 맺고 있다. 당·오대이후의 중국 회화에는 회화와 선과의 관계를 비교한 것이 많고 특별히 화가가 많은 것이 하나의 반증이다.
선과 그림과의 본질적인 일치는 '묘오(妙悟)'라 할 수 있다. 妙悟의 경지란 선이나 시와 같이 선가의 수양적 소양을 말한다. 이러한 '묘오(妙悟)'의 경계란 결코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 각고의 정신으로 참수하여 일체의 망상과 잡념을 떨어버리고 초월적인 무아의 세계에 직입해야 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회화와 문인화에 있어서의 선이란 인간의 정신상에 있어서 심상 혹은 명상(Meditation)을 집약하여 표현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묘오(妙悟)'의 고차적인 체험은 특별히 선과 화의 일치된 경계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선가와 화가의 '묘오(妙悟)'의 경계는 다 같이 산수 아름다운 절경을 택하여 그 중에 정거(靜居)하여 참오(參悟)하게 된다. 그들은 산수에 의탁하여 禪을 수련하고, 대자연의 진실 되고 순수한 미감에 젖어 현실적 것으로 부터 초월하는 것이다. 선가가 아름다운 산수자연 속에서 현기(玄機)를 얻고 대자연의 미감으로부터 정신상으로 형태와 정신이 합치되는 경계에 도달하게 되는 사실은 산수화가나 문인화가의 詩·書·畵 일치의 경우와 다를 것이 없다. 산수화가와 자연애의 관계는 곽희(郭熙)의 '임천고치(林泉高致)'에 여실히 나타나 있거니와 남종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왕유(王維)의 생활과 풍경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런 연유로 동기창(董其昌)은 왕유를 남종의 시조로 보았으며, 왕유의 시가 거의 대부분 자연을 노래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대자연의 산수로부터 선가사상(禪家思想)에 바탕을 둔 '묘오(妙悟)'의 경지에서 대자연에 귀의하려는 속세초월사상(俗世超越思想)은 한말에서 唐, 兩宋에 이르러 최고로 발달되어 유교학자들이 이 선종의 초월사상을 받아들였다. 선종의 초월사상이란 첫째로 악(惡)을 만들지 않기 위하여 속세를 초월하고, 둘째는 대자연과 합일(合一)하기 위하여 속세를 초월하고, 셋째로 새로운 대자연의 세계를 깨닫기 위하여 초월하는 것인데, 이것이 선종사상의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선종사상에 바탕을 둔 초월사상은 송대 문인화가들의 유교적 초월과 결합하여 형식미가 가미된 시·서·화일치사상(詩·書·畵一致思想)이 나왔으며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석계(石溪), 팔대산인(八大山人), 석도(石濤)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선사상이 중국 문인화의 사상에 근저가 되었다고 볼 때 중국 문인화를 모범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의 문인화에도 그 영향이 있었음을 역급해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문인화 특히 말기의 문인화가 중국 문인화에 많은 감화를 받았음이 반증되는 근거로는, 첫째 청대의 문인화가들이 송, 원대의 문인화를 임모(臨摹)하고 있었던 것과 같이 조선말기 문인화가들이 송, 원대 특히 원말사대가의 그림을 임모하면서 내재된 사상까지 이해하고 있었고 둘째 원당(阮堂) 김정희(金正喜)가 선(禪)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중국 문인화에 이해가 깊은 점, 셋째 원당 김정희가 허유(許維)의 호를 대치(大癡) 황공망(黃公望)에 비유하여 소치(小癡)라 할 정도로 중국 문인화를 모범으로 삼았던 점, 넷째 조선 말기에 청대문화와의 왕성한 교류로 인한 중국화보의 유입과 김정희가 淸의 시인묵객들과 교분이 두터웠던 점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송, 원대의 문인화가 선가사상에 깊은 교섭을 가지고 있었고, 조선말기의 문인화가 宋, 元代의 문인화를 모범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자연과 합일하는 정신성을 강조하는 선사상(禪思想)이 조선말기 더 나아가 한국문인화의 정신적 배경이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2008. 9. )
참고사진1 : 김정희(金正喜), 부작란(不作蘭), 55×30.6 참고사진2 : 조희룡(趙熙龍), 홍매도(紅梅圖), 27.5x30.2 참고사진3 : 허련(許鍊), 설옹관(雪擁關), 70x36 참고사진4 : 전기(田琦), 계산포무도(溪山苞茂圖), 24.5x41.5
원 게재: 특별논단 / 회화지 16호(2008) 38–39쪽 · 원본 PDF 38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