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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논단

산수화의 새로운 면모를 위하여

이 승 훈(회원, 대성중학교 교사)

산수화의 발전은 전통 산수화의 정신을 바르게 교육하고 창작을 하며 공모전 심사를 해야 할 것이다. 이미 있는 양식에 연연하다가 새로운 기법과 새로운 발상과 우리시대의 정신과 내용을 저버리고 만다. 동양 미술의 궁극적 지향점은 달관에 의한 진선미 추구로 볼 수 있다. 특히 산수화는 그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다지고 있다. 산수화의 정신사적 역사와 그 소재와 내용을 찾아보고 그 대안을 찾도록 하였다.

산수화는 서정과 아취를 담고 유람하는 선비의 정신과 꿈 속 이상향까지 내포하고 있다. 고연희의 '조선시대 산수화, 아름다운 필묵의 정신사' 책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약술해 볼 수 있다.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는 공자의 말이다. 유학자인 유향(劉向)은 산수란 인(仁)의 덕을 갖춘 인격체이다. 산은 높고 높아 많은 사람이 우러러 보는 것이요. 초목이 살고, 뭇 생명이 자리 잡고, 새와 짐승이 무리지어 살고, 달리는 짐승이 쉬며, 보배로운 것들이 번성한다. 또한 물은 군자의 덕에 비유된다. 두루 흐르고 사사롭게 치우치지 않으니 덕을 닮았고, 이르면 생명을 살려내니 어짊을 닮았고, 낮은 곳으로 흐르며 순리대로 하니 의로움을 닮았다. 지혜로움과 용기와 성찰과 포용과 교화를 닮았다는 것이다. 안빈낙도로도 산수가 읽히고 있다. 노자는 최상의 선(善)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으며, 뭇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러므로 도(道)에 가깝다.

장자도 한 말씀 하셨다. 숲과 못으로 들어가 너른 들에 살며 고요한 곳에서 낚시하고 무슨 일도 일삼지 않을 뿐이다. 이는 강해(江海)의 사람이며 세속을 피한 사람이니 여유로운 자가 좋아하는 바이다.

이는 다분히 산수관(山水觀)이 관념적이긴 하지만 동양의 큰 덕목을 지녔다. 산수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산수화의 발생에 따른 배경을 알아보면, 중국에서 산수 감상이 주제로 표현되는 문학과 예술 등장은 위진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위진 남북조 직전 한나라말기는 변란이 잦고 살육이 도처에 있으며 무법천지가 횡행하던 시기에 산으로 들어가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그 삶은 참담했다. 위진시대 후반 동진의 도연명이 지은 도화원기(桃花源記)는 당시 산속 은둔자들의 성공담을 상상한 글이라 할 수 있다. 자유롭고 싶은 욕망의 긴장 속에서 산수문학은 출범했다. 이때 문인 들은 은둔자를 가리켜 '산수를 좋아하는 처사'라 묘사하고 '속세를 초월한 유유자적함 속에 국화와 난초의 향기가 스미는 삶' 이라고 추앙하였다. 이때부터 정원에 가산(假山)이 조성 되었다. 동진의 화가 고개지는 높은 인격을 나타내기 위하여 인물의 배경으로 산수로 처리하였다. 산수는 신선사상으로까지 진전되었다. 산수는 신선이 머무는 장소로 인정되었다. 유선(遊仙)이라는 제목의 시문학도 많았다.

남북조시대 종병과 왕미는 산수화론을 남겼다. 비로소 산수화와 산수화론이 대두하게 된다. 종병은 와유(臥遊)하면서 산수를 즐기고 싶어 했고 명·청 때와 조선시대에도 와유록이란 제목으로 산수 기행문집을 꾸며져 여러 권 전한다.

우리에게 전하는 최초의 산수화는 위진남북조를 통일한 수나라의 전자건이 그렸다고하는 전해지는 북경 고궁박물관의 유춘도(遊春圖)이다. 우리나라는 백제의 벽돌에 새겨진 산수문전(山水紋塼)에서 엿볼 수 있다. 여말선초(麗末鮮初)까지 이렇다 할 작품이 보이지 않는다.

중국 당대(唐代)에는 청록산수화가 발달하여 이사훈 이소도 부자가 대표적이다. 수묵산수화도 당대 출현하여 송대에 크게 유행하였다. 왕유가 대표적이다.

우리나라는 고려 후반 이색 문집에 산수화 감상하고 제화를 쓴 것으로 보아 산수화가 있었을 것이다. 고려말과 조선초에 그려진 그림은 청산백운(靑山白雲)이라는 그림을 왕실에서 내어 보고 시문을 짓게 하였다고 한다. 안견이 그린 그림에 제화시문을 지었다. 서거정이 쓴 '푸른 산은 그윽하고 그윽함이여/흰 구름 아득하고 아득함이여' 라는 시구에서처럼 흰 구름은 언제나 존재하는 무변영원의 순간을 노래했다. 극심한 변혁이 노도처럼 일어나는데 지극히 고요한 산수경이 나왔다. 이상사회를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수묵산수화가 발전하면서 날씨의 변화를 그려내려는 시도가 보인다. 춘하추동 사계절이 보이는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가 그려졌다. 제목도 춘경(春景), 춘산(春山), 하경(夏景), 풍우(風雨), 추경(秋景), 설산(雪山), 풍설(風雪) 등이다. 안견의 사시팔경으로 전하는 늦가을은 어두워진 하늘의 거뭇한 색과 쌓인 눈이 흰빛의 색채대비를 볼 수 있다. 산은 흰 여백으로 하고 하늘을 먹빛으로 선염하여 설경을 나타낸 것이다.

소상팔경(瀟湘八景圖)은 중국의 소강과 상강이 흘러들어 호수를 이루는 동정호 일대의 경관을 그린 덕이다. 이곳은 경치가 빼어나 시인들이 시로 읊었다. 그림은 북송대 시작하여 남송 및 원대 유행하였다. 우리나라는 고려 명종때 진화와 이제현 등에 시를 읊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가장 기록이 많은 것은 조선초이다. 대략 24수가 전한다. 이 문집이 '비해당소상팔경시권' 이며 이승소와 서거정, 강희안 등의 문집과 김시습의 문집에서도 보인다.

꿈 속 이상향을 그린 산수화로 문학에서 몽유록(夢遊錄), 기몽시(記夢詩) 등에서처럼 꿈이라 의탁하면서 마음 속 심경을 곡절하게 토로해내기도 했다. 그 기록으로 남긴 꿈 이야기가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 그림인 몽유도원도(안견그림)이다.

16세기 조선은 유교의 기반이 닦이고 있었다. 조선 중기인 이때 성리학자들은 선대의 산수관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이 때 중국은 절파양식의 미치광이 같은 구도와 붓질이 혹평을 당하고 있었는데 조선중기는 이 화풍을 더욱더 좋아했다. 이점은 조선 후기 산수화풍으로 연결되었다. 17세기 화원화가인 김명국은 '설중기려도'를 보는 것처럼 대표적이다. 시인인 김창흡은 김명국의 그림을 보고 '산 아래가 끊어진 데 나귀탄 선비가 자나가고, 솔바람에 옷자락이 날린다.'고 읊었다. 예조참판을 지낸 강백년은 김명국의산수화는 '태초의 세상을 상상하게' 한다고 했으며 활달한 필치가 오히려 초월적 정신세계로 이어졌다.

산수인물도가 산수화와 함께 발달하게 되었다. 산수 속 인물의 비중이 부각되고 있었다. 그 제목은 탁족도(濯足圖), 기려도(騎驢圖), 어부도(漁父圖), 문답도(問答圖), 관폭도(觀瀑圖), 수면도(睡眠圖)로 인물의 정신세계를 더욱 중시했다. 이백이 여산(廬山)을 지나가다가 향로봉의 폭포를 바라보면서 지은시가 유명한데 우리나라도 사랑한 소재이다.

무이구곡을 그린 산수화는 주자가 살며 노닌 곳을 찾아 그린 그림이다. 요즘 영화가 촬영된 곳을 찾아가 즐기는 것과 같다. 주자(朱子)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남송대의 학자 주희(朱熹, 1130~1200)를 높여 부르는 호칭이다. 무이산(武夷山)의 아홉 골짜기를 그린 무이구곡도는 15세기 서거정의 글에서 처음 나온다. 이황은 무이구곡도를 펼쳐놓고 애정을 토로하였다. (조선시대 산수화, 아름다운 필묵의 정신사. 고연희 지음. 돌베개. 2007.10.2)

무이구곡과 주변의 강호를 노래한 주자의 시들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사림파의 형성과 이들의 정계 등장과 관련이 깊다. 퇴계 이황과 하서 김인후 등이 본격적으로 심혈을 기울였다. 사림파가 강호에 뿌리박고 있고, 중국 무이산의 구곡은 사림들이 숭모하는 바가 크고, 구곡이 경영 되었다.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등이 대표적이다. 주자의 무이도가 10수와 무이구곡도가 사림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중국까지 여행을 할 수 없는 사림들은 그림을 그려 주자를 숭모하는 마음을 내보였다. 단순한 자연경치의 서경만 보인 것이 아니고 자연에 대한 성정을 음영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제 이곡의 시조는 봄의 꽃을 통하여 이상향을 그려 보이며, 제 삼곡은 잎과 산새에서 자연의 이치를 보인다. (표 참조)

순읊은 것의 미
第1曲관암(冠巖)잡초 뒤덮인 들에 안개가 걷히니 먼 산이 그림 같은데 솔밭에 술통을 놓고 벗이 오는 모습을 보고 있다고 노래
第2曲화암(花巖)푸른 물에 꽃을 띄워 야외로 보낸다면서 사람들이 이와 같은 명승지를 모르니 알게 하고 싶다는 것
第3曲취병(翠屛)푸른 나무에 산새가 위아래로 우짖는 데 반송이 바람을 맞으니 여름 경치가 그지 없다. 취병은 푸른 병풍같이 나무나 풀로 덮인 절벽을 뜻함.
第4曲송애(松崖)못 가운데 바위 그림자가 온갖 빛으로 잠겼으니 수풀 속 샘이 깊도록 좋아 흥겹다.
第5曲은병(隱屛)냇가의 은병정사(隱屛精舍)는 무척 깨끗한데 여기서 제자를 가르치면서 음풍영월하며 소일하고 싶다. 은병은 굽이진 곳이 있어 눈에 띄지 않는 절벽을 말한다. 율곡이 은거하면서 사는 해주의 고산을 지칭할 수도 있다.
第6曲조협(釣峽)나와 물고기 중 누가 더 자연을 즐기는 가하고 물은 뒤, 황혼에 낚싯대를 메고 달빛을 받으며 돌아온다는 것이다. 조협은 낚시질하기 좋은 골짜기를 말한다. 자연 합일을 뜻한다.
第7曲풍암(楓巖)가을 색깔이 좋은데 맑은 서리가 엷게 치니 절벽이 흡사 수놓은 비단 같다. 찬 바위에 홀로 앉아 집으로 돌아갈 집을 잊고 있는 자신을 읊은 것.
第8曲금탄(琴灘)달이 밝은데 좋은 거문고로 서너 곡을 노래하니 옛 가락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홀로 즐긴다. 옥진금휘란 아주 좋은 거문고를 뜻하며, 금탄은 거문고를 타듯이 물소리가 흥겹게 들리는 여울목을 말한다.
第9曲문산(文山)'돌산에는 해가 다 저물고 기암괴석이 눈 속에 묻혔는데 노는 이는 이곳에 와보지 않은 채 이 겨울 경치가 별로 볼 것이 없다는 말만하고 있다.' 라고 하였다. 문산이야 말로 풍류를 즐길만 한 곳임을 자랑하는 것이다.

제 일곡은 관암(冠巖)을 읊은 것이요, 제 이곡은 화암(花巖)을 읊은 것, 제 삼곡은 취병(翠屛)을 노래했다. 제 사곡은 송애(松崖)를 노래했다. 제 오곡은 은병(隱屛)을 노래했다. 제 육곡은 조협(釣峽)을 읊은 것, 제 칠곡은 풍암(楓巖)을 읊은 것, 제 팔곡은 금탄(琴灘), 제 구곡은 문산(文山)의 경치를 읊은 것, 문산이야 말로 풍류를 즐길만 한 곳임을 자랑하는 것이다.(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정병헌 이지영 지음, 돌베개, 2002)

16세기 무이구곡도 가운데 이성길(1562~?)의 작품이 우수하다. 이성길은 의병을 일으켰고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두루마리에 그려졌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그려진 것이다. 4m에 이르는 긴 그림이다. 제1곡엔 충우관(?右觀)건물이 단정하게 표현되고 다왕암 봉우리가 우람하게 그려졌다. 봉우리마다 학, 은자, 서적 등이 자리 잡고 선학암, 장선암, 서선암, 대장봉 있다. 중국에서는 충우관이 무이궁를 뜻하는 것으로, 무이산의 가장 오래된 궁전이며 또 천보전, 무이관, 만년궁이라고도 하는데 당조의 천보연간(742~775년)에 건설되었다. 이 그림은 중국 해내기관의 판화집의 그림에서 온듯하다.

관료 문인들이 모습을 그린 계회도, 아취 있는 모임을 기념한 산수화, 유람을 하면서 그린 산수화, 서정성을 겸비한 산수화 등이 전통적 내용의 산수화이다.

조선시대 산수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장승업이 닦아 놓은 새로운 감각은 김수철과 홍세섭이라는 걸출한 선구자가 나왔다. 산수화의 매너리즘에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서 대담한 구도와 과감한 생략과 수채화에 방물한 색채들의 새로운 시도와 감각으로 신감각파나 이색화풍으로 지칭되는 작품을 남겼다. (홀로 나귀타고 미술 숲을 거닐다. 이원복, 이가서, 2008, 전주국립박물관장)

양화와 다른 뜻을 두고 산수화가 그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법정스님께서 말씀하신 '닥터스'와 '소설 동의보감' 이야기로 다시 반추해보면, 의료행위를 주제로 한 소설이면서 서로 대조적이다. '닥터스'는 의대 출신의 의사들 사이에 일어난 예기인데 비정하다. 출세를 위하여 서로가 밟고 올라서려 하고 상호간 인격적으로 교류나 신뢰 없이 냉혹하고 비정한 시기와 암투를 그물망처럼 얽혀 있다.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은 의료기능 못지않게 의사로서의 사명감과 인격과 인품을 중요시한다.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는 데에도 의사로서의 사명감과 자질을 첫째로 꼽았다. 서양의학은 기(技)와 술(術)같은 기능을 중요시했고, 동양은 의사의 기능뿐 아니라 전인적이 인격 즉 도의 경지를 문제 삼고 있다. (한벽문집 제2호, 동방예술연구회, 월전미술관, 1993) 법정 스님의 말씀이 아니어도 전통 산수화의 정신에 힘입어 새로운 다짐과 창작에 노력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할 것이다.

이성길, 무이구곡도 (부분 1)
이성길, 무이구곡도 (부분 1)
이성길, 무이구곡도 (부분 2)
이성길, 무이구곡도 (부분 2)
이성길, 무이구곡도 (부분 3)
이성길, 무이구곡도 (부분 3)
이성길, 무이구곡도 (부분 4)
이성길, 무이구곡도 (부분 4)

오늘날 산수화를 그린다고 볼 때, 어떤 정신사로 규정해 볼 수 있을까? 한 때 조선 후기 때 진경산수화의 정신을 이어 받기위해 실경이라는 풍경화를 즐겨 그렸고, 많은 전시회가 열렸다. 우리 산천을 그리는 것은 최고로 여겼다. 사대주의 적인 발상을 떨치고 필선의 자유로움과 구도의 자유분방한 가운데 양화의 구도법을 차용하면서 서서히 양화와 같은 형체로 발전해갔다. 이러한 양식의 그림들은 일본제국주의 때 발생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부터이다. 지금도 그 정신적 이념은 고쳐지지 않고 굳어진 것이다.

유행하고 있는 공모전의 작품을 보면 자못 한탄이 안 나올 수 있을까. 소재의 편협성과 정신의 한계성, 기법의 단조로움이 창의성을 해치고 있다. 숲과 나무, 농촌, 골짜기, 들판 구석, 호수, 후미진 농촌, 허물어지는 담장이나 건축물....등의 소재에서 뛰쳐나와야 하고, 내용도 다양해야하며, 기법도 새로워야한다. 작품 형태는 액자틀에서 벗어나 권축으로 이어진 그림이나 두루마리 그림 등을 그려보고, 자주 감상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산수화의 진로를 위해서라면 공모전의 한계와, 심사의 한계성을 넘고, 산수화의 정신성을 잘 반영하여 교육하고 심사하며 전시하고 이 점을 잘 알고 감상해야 한다. ICT 시대, 디지털시대 하면서 그림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산수화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오히려 서정적이고 인간답게 하는 교양은 그림에 있다. 특히 산수화는 특히 오늘날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육체적 기능을 위해서만 산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참고문헌 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정병헌 이지영, 돌베개, 2002 그림 속에 노닐다, 오주석, 솔출판사, 2008 조선시대 산수화, 아름다운 필묵의 정신사. 고연희, 돌베개, 2007 한벽문집 제2호, 동방예술연구회, 월전미술관, 1993 홀로 나귀타고 미술 숲을 거닐다. 이원복, 이가서,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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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게재: 특별논단 / 회화지 16호(2008) 40–45쪽 · 원본 PDF 40쪽 ↗

이 지면의 도판

이성길, 무이구곡도 (부분 1)산수화의 새로운 면모를 위하여이성길, 무이구곡도 (부분 1)
이성길, 무이구곡도 (부분 2)산수화의 새로운 면모를 위하여이성길, 무이구곡도 (부분 2)
이성길, 무이구곡도 (부분 3)산수화의 새로운 면모를 위하여이성길, 무이구곡도 (부분 3)
이성길, 무이구곡도 (부분 4)산수화의 새로운 면모를 위하여이성길, 무이구곡도 (부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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