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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회화-여유로운 삶의 향기

초겨울, 강가에서

선 산 곡

해가 저문다. 솔밭 따라 산그늘이 낮게 내려와 있는 강가 주변에 계절의 얼굴도 어느새 바뀌기 시작했다.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보이는 것마다 스산한 초겨울의 한기를 지니고 있다. 울퉁불퉁 포장되지 않는 산모퉁이 길을 차가 흔들리며 달린다. 차창 밖 산마루가 덩달아 올라갔다 내려왔다 춤을 추는 것 같다.

강을 건너 다리 끝 길가에 차를 세운다. 강줄기를 따라 부는 바람이 제법 차갑다. 강 둔덕에는 억새며 갈대들이 바람 따라 허리춤을 추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산마루를 바라본다. 푸른 소나무와 바위로 이루어진 산, 저 산과 이 강 주변에 곧 눈이 내릴 것이다. 눈 덮인 산과 들의 아름다움을 상상해보며 옷깃을 세운다. 날이 쌀쌀하다.

가방 끈을 한쪽 어깨에 둘러메고 조심스레 다리 아래로 내려간다. 수심은 깊지 않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바윗돌들이 강폭 전체에 깔려있다. 행여 넘어져 정강이 부딪칠라, 바라만 보아도 오금이 저린다. 크고 작은 바위틈으로는 모래톱 하나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 물길을 따라가면 이골저골 물들이 합수 져 섬진강(蟾津江)이란 이름으로 유장히 흐르고 흐를 것이다.

물살이 제법 거세다. 물빛도 서늘해 보인다. 가방 풀어 버너를 꺼내 불을 붙이고 코펠에 물을 올려놓는다. 바람막이로 버너의 불꽃을 달래면서 물 끓기를 기다린다. 커피 한 잔 만들어 들고 서서 바라본 하늘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다.

(청승이다.)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지만 이렇게 커피 잔을 들고 있는 것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제 떠나. 아주 갈거야."

낮에 받은 전화였다. 아주 이민을 떠난다는 그의 전화에 처음엔 담담했다. 한 때 화려했던 우리들의 만남은 이제 기약 없는 이별로 이어져야 한다. 수화기를 놓은 뒤 잘 가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뒤늦게 찾아온 현실감이 마른 오열을 삼키는 기분이 되었다. 내가 남아있는데 내 자리가 빈 느낌이었다.

이제 목도리를 챙겨야 할 때인 것 같다. 시린 내 마음을 감싸 안 듯, 내 의식을 따듯하게 파묻을 준비를 해야 한다. 스스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도록 어서 눈이나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산천이 하얗게 변하는 모습이 보고 싶다. 나 자신은 그대로 침잠할 테니 세상이 꽁꽁 얼어붙는다 해도 그 무엇도 탓하지 않겠다. 그래, 이로서 내게 다가오는 겨울을 맞을 준비는 끝났다.

흐르는 물로 커피 잔을 씻는다. 차가운 물에 손끝이 아려온다. 잊고 있었던 가슴 속 아픔이 되살아난 느낌이다. 강을 싸안고 내려다보던 산이 어둠에 묻히기 시작한다. 산은 어둠과 함께 물 흐르는 소리도 정적으로 끌어안는 모양이다. 어둠이 내리는 초겨울 강가에서 가슴을 깎다 천천히 나는 일어선다.

약력

선산곡(宣山谷)

  • 한국문인협회 회원
  • 전북수필문학회장 역임
  • 수필집:LA쑥대머리, 끽주만필
  • 현 전북문인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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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1지면 2

원 게재: 전북회화-여유로운 삶의 향기 / 회화지 16호(2008) 68–69쪽 · 원본 PDF 6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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