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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은 무엇을 실천하는가

김광희

지역 미술관은 무엇이어야 할까. 제도 비판의 시선 혹은 문화 비평의 틀로 서구가 미술관의 신화를 처음 이야기한 것은 60년대 말이었다. 우리 또한 연착하여, '화이트 큐브'는 환영일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으며 그렇게 90년대 후반을 지나 미술관이라는 제도(A)와 대안공간이라 불리는, 이제는 제도(a)가 된 장소를 숙고하고 있다. 문화 향유계급, 권력으로서 지식, 시장과 자본주의는 미술관의 또 다른 중요한 문제다(미술관은 계층적이어서, 모순되게도 문화적 소속감과 소외감을 차별적으로 부여한다는 점을 프랑스의 사회학자 브루디외는 지적한 바 있다). 무엇보다도 미술관이 대면하는 동시대라 불리는 것이 언제나 골칫거리이다. 동시대는 보들레르의 말에 따르면 영원과 찰나의 속성을 모두 지녀야 한다. 역사를 견제하며 당대의 유행을 감지해야 하는 미술관이 시대의 입구로서 어떤 것을 통과하도록 하고 어떤 것을 문밖에 남겨둬야 할지는 본질적인 논쟁거리였다. 미술관은, 다소 뻔한 투로 이야기하자면, "무엇보다도 강박에 의한 반복의 문제이며 경계를 넘나드는 문제이자 결과보다는 과정의 문제, 도착보다는 여정의 문제"¹⁾ 임을 어쩌면 모두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지역 미술관에서 동시대라는 시차는 난해한 좌표이다. 그러나 정작 내가 무엇보다도 이 질문에 답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역 미술관을 떠올릴 때 지역이라는 일부로서 구획 짓고 한정하는 단어가 미술관에 드리우는 그림자 때문이다. 나는 처음에는 지역이라는 단어를 "매우 치명적인 독성이 있는 폐기물처럼 취급할 생각"이었다²⁾(지방이란 말은 한 나라 수도 이외의 지역, 즉 중앙 밖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때 가치의 문제가 내재적으로 구조화된 것이 지역이란 말이라고 나는 의심하고 있다). '지역'은, 여전히 근대화의 지연된 잔재가 떠돌거나 고착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측, 부정이 함의된 가치어이자 진술어여서 이데올로기적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지역은, 무의식적으로, 스스로가 언제나 배제 전략의 주체이자 대상 이어 왔다. 이는 혹시, 동시대 미술의 현재주의(le presentisme)가 초래하는 집중화의 변형일지도 모를 일이다. 처음 나는 '고장'이란 단어를 쓸 작정이었다. 배치들의 공존 가능성으로서, 장소를 떠올리게 하는 말을 나는 떠올리려 했다. 어떤 기원을 품은 구획을 의미하는 고장은 무엇보다도 기원이 품은 잠재성의 구조로 대안의 형식을 지시한다('고장의 미술관'은 너무 자기 과시적이긴 하다). 그 같은 장소는 형태 발현의 가능성 그 자체로 존재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방이든, 지역이든, 고장이든 그 말에는 그 구획을 조망하는 차별적 시선이 존재하고, 자기만족적으로 중앙에 수렴된 거대 서사는 언제나 지역을 억누르는 무게였다(지방의 작가들은 '아버지의 불안'과 더불어 '중앙의 편견'과 싸워야 하는 이중의 난제에 허덕인다). 중앙이라는 단 하나의 시점으로, 장소를 바라보며 중앙과 지방의 조화를 이야기하고 전체적인 구성을 제시할 때 그 밑에 감춰진 분류 체계를 나는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그 시선과 체계를 거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려면 지역이란 말을 대체할 단어를 떠올려야만 했다. 이때, 요청되는 단어가 무엇이든, 그 말은 미술관의 로컬리티를 지시해야 할 것이다.

지역의 경우 뮤지엄이라 통칭하는 공간은 지정학적 논리에 따라 기능성을 더 시급하게 요청받는 곳이 되었다. 지방의 미술관은 기록보관소이자 지역 공동체를 위한 문화적 플랫폼 내지는 문화의 공적 유통망 역할을, 그 지방의 문화를 둘러싼 제반 환경을 뛰어넘어 수행하도록 요구받는다.³⁾ 지역미술관은 특수한 미술 매체 그 자체가 되었고 정치경제성의 색조는 짙었다. 그런데 공동체니 플랫폼이니 문화유통이니 하는 추상적 말들의 범람 속에서도, 로컬리티는 어쩌면 더욱 물질적인 그러니까 장소에 유래하고 깃들어 있거나 부유하는 경험 이미지일 것이다. 이것은 삶의 이미지이다. 따라서 지방의 미술관은 로컬리티란 말을 보다 존재론적으로 고심해야 한다. 존재의 근거 혹은 당위가 아닌, 지역미술관이 로컬리티로 존재함으로써 가능한 잠재력을 요청하는 과정과 여정은 어쩌면 앞선 물음을 궁리하면서 언제나 상수로 남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수 있을 몇 가지 실천이 있다.

첫 번째 실천은, 동질화에 대한 저항으로서 보편화의 연대이다. ⁴⁾ 미술관의 로컬리티는 중앙 고유의 표현과 지방의 품행 사이에서 갈등하는 양상이다. 갈라파고스화를 피하는 맵핑과 함께, 과학자(또는 민족지학자)의 성실함과 엄정함이, 배제의 전술보다는 포섭의 전략이, 그 같은 특수 언어에서 추구되어야 한다. 그 특수 언어가 미술관 로컬리티의 윤리일 것이다. 따라서 지방 미술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수장고의 자리는 단지 지역 내 미술가들에게만 한정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가령, 한국 실험 미술의 거장 이건용의 작품은, 활동 연고지였던 전북의 도립미술관뿐만 아니라 국립현대미술관에도 있어야 하며, 6~70년대 한국의 실험 미술의 실천은 전북도립 미술관에서도 수집과 연구가 병행되어야 한다. 이는 지방에서 활동하는 '아무개' 작가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총체성의 실천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두 번째 실천은, 중앙의 자기만족성을 해체하여 수렴화 내지는 변증법적 기운을 제거하기위한 미술관 로컬리티의 분기이다**. 소실점을 거부하고, 수렴 불가능한 수평선의 평면적 실천을 각인하는 것은 또 다른 미술관 로컬리티의 윤리이다. 이를 위해 지방의 미술관은 스며듦의 전략을 고심해야 한다. 기억의 소환이라 부를 수 있는 이 전략은, 중앙에 스며든 사투리가 자아내는 소통 가능하면서 차별화된 혀의 근육에서 떠올릴 수 있겠다. 그렇게 지형학적으로 분기하는 다원적 역사를 미술관의 로컬리티는 추구해야 한다. 중앙이라는 단선적인 흐름에 탈락하였던 로컬리티의 서사를 수평적으로 추가하는 실천을 미술관의 로컬리티는 지향해야 한다. 지난 10월 재개관하면서 모더니즘의 역사를 재배치한 뉴욕현대미술관(MoMA)처럼,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한국의 미술관 또한 중앙과 지방의 다원성과 다중성을 인식하여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보편성의 언어를 담보하면서 특수성이 돋아나는 미술관의 배치술은 중요하다.

미술의 로컬리티는, 미술관이 자발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역동적인 발전소"가 되기 위한 작용점이자, "전 세대를 위한 만남의 근거지"가 되기 위한 소통의 프로토콜이다.⁵⁾ 텅 빈 빈집의 무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방의 미술관은 (서구뿐만 아니라 중앙에 대한) 탈식민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더불어, 지방의 로컬리티는 단지 지역 미술관이 아니라 한국의 국공립 미술관(들)이 무엇이어야 할까 고민할 때 제시되는 방법론 중 하나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지역의 로컬리티가 인정 투쟁이 아닌 '거기' 있음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미술관의 실천이야 말로 미적 생명력을 연장한 무언가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 실천의 내용은 중앙 수렴의 서사에서 분기하는 비균질적 서사를 중심에 두어야 할 것이다. 거기에서 진보이든 발전이든 사회는 경영될 것이다. ■


1) 이 수사는 줄리언 반스가 드가의 반복 경향을 옹호하면서 쓴 표현이다. 나는 이 말이 미술관의 순환 반복적 속성을 인식하는데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 줄리언 반스,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공진호 역 (다산책방, 2019) 2) 로잘린드 크라우스, 『북해로의 항해』, 김지훈 역 (현실문화연구, 2017) 3) 지역과, '아카이브 열병', 비균질적 공동체, 자본주의 혹은 시장 사이의 함수는 별도로 논해야 할 문제다. 4) 문제는 이 연대가 내재적으로 작동하는 일반화의 기능일 것이다. 가령,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지역미술정체성 탐구'의 일환으로 제시한 《고향》 (2019. 11. 27 ~ 2020. 3. 8,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에서 말하는 지역은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로컬리티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물론이지만, 자본주의의 양태로서 전지구화라는 총체화의 대항 개념 같은 것이다. 로컬리티의 전략은 일반화가 아닌 보편성으로 특수하게 접근되어야 한다. 5)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큐레이팅의 역사』, (미진사, 2013), p.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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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게재: 특별기고 / 회화지 26호(2019) 15–17쪽 · 원본 PDF 1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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