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노래, 생명의 노래
자연의 노래, 생명의 노래
-엄기석의『꿈의 정원』展에 부쳐-
· 기간 : 2005. 4. 27~5. 3『세종문화회관 미술관』/ 5. 11~5. 20『전주민촌아트센터』
엄기석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신비로움에 천착하여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온 작가이다. 의연한 소나무와 수수한 들꽃, 유유자적한 물고기와 청초한 연잎, 도도한 강물과 고즈넉한 산…. 그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자연의 물상들이다. 그러나 그가 이처럼 평범한 소재들을 작품의 세계로 형상화하는 방법은 예사롭지 않다. 그는 사물의 구도에 변형을 가함으로써 물상들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한다. 때로는 원심형으로, 때로는 화면의 중앙에 크로즈업 되는 형태로 순간순간 다양하게 배치함으로써 물상들에 감추어져 있던 새로운 면모들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 중략 -
사실 엄기석은 1993년의 첫 번째 개인전에서도 이미 새로운 표현방식을 선보인 바 있다. 그는 한국화의 전통적인 화법에서 과감하게 탈피하여 묵의 새로운 조형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한편, 관례적인 화면의 포치법(布置法)을 포기한 대담한 작업들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금번 개인전에서 그는 한층 과감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작가 엄기석이 천착하고 있는 생명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동서를 막론하고 많은 사상가들의 주된 관심사였는데, 그는 전통적인 동양의 생명사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예술적 사유의 토대를 구축해 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한국을 포함한 동양문화권에서는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안의 인간과 자연은 상호 원만하고 조화로운 관계에 있다는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도판] (제목 미표기) / 크기 미표기 / 재료·연도 미표기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동양철학의 근간을 이루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생명은 우주의 거대 생명에 융입(融入)하여 양자가 일체가 되면 결코 적대나 모순이 없고 언제 어디에서나 혼연히 같은 몸이 되어 함께 흘러간다. 즉 인간과 만물의 생명은 우주로부터 정신(心)을 얻어 그것을 각각 각자의 정신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의 모든 물상들은 거대한 우주의 생명과 더불어 조화롭게 화해(和諧)할 때 가장 아름다운 경지(美的 境界)에 다다르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은 유가(儒家)에서도 발견된다. 유가는 하늘은 위대한 생명의 원천으로서 만물이 그로부터 비롯되며, 땅은 생명을 퍼뜨리어 만물을 그 덕택으로 형통하여 자라게 한다고 언급한다. 즉 땅은 하늘의 생명을 받들어 그 생명을 넓혀주며 모든 것을 감싸고 빛나게 한다. 마치 인자한 어머니가 자녀를 돌보는 것처럼 생명을 보살펴 주는 것이다.
작가 엄기석이 흙이라는 대지의 바탕 위에 생동하는 만물들을 가득 채웠을 때 그가 염두에 둔 것은 바로 이처럼 영원히 반복하며 순환하는 생명의 유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들에 구현된 세계는 창조적 생명이 가득 찬 작은 우주라 할 수 있다. 그 가운데에는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게 차 있어서 옆으로도 통하고 위아래로도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조금도 막히거나 걸림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나는 내 이야기가 생수(生水)를 주는 복음이었으면 좋겠다. 사해(死海)를 소생시키는 생수이면 좋겠다. 아마도 지나친 욕심일 게다. 그러나 하얀 화선지 속에서 생명산(生命山)을 만나고, 흐르는 시내에 타락한 욕망을 씻어 내고, 고요를 깨트리는 새소리를 만날 수 있다면, 나는 그런 꿈을 그리고 싶다. 다만 생명과의 교감을 통해서 그리는 내가 즐겁고, 욕심을 부려 감상자도 수면 속에 잠긴 생명의 이야기들 속에서 평강과 안식을 가질 수 있다면 나는 족하다.
-1999. 10. 작업노트 중에서-
결국 엄기석은『꿈의 정원』을 통해 관람자에게 창조적이고 이상적인 생명의 세계를 드러내 제시함으로써 "생수(生水)를 주는 복음"의 역할을 하려 하는 것이며, 그 정원의 향연에 참석하고 있는 감상자는 "생명과의 교감을 통해서" 천지와 넓게 조화를 이루는 한편, 모든 사람과도 공통의 정감을 공유하고 감응을 하며 만물과도 고루 깊이 교감할 수 있게 된다. 요컨대 엄기석의 작품세계는 우주의 보편생명과 일체가 되어 언제 어디서든지 그것과 하나가 되어 흐르는 화해(和諧)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다.
자연은 작가에게 생명의 고귀함을 일깨워주고, 작가는 자연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며, 감상자는 작품을 통하여 자연 및 작가와 다시금 하나가 되는, 바로 그 조화롭고 도도한 화해의 정신을 말이다.
[도판] (제목 미표기) / 크기 미표기 / 재료·연도 미표기
원 게재: 전북회화-전시리뷰 / 회화지 13호(2005) 24–25쪽 · 원본 PDF 25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