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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회화-문인화의 사상

조선말기 문인화에 대한 고찰 -사상적 배경을 중심으로-

이철규

[도판] 山水圖(8曲병풍中 1폭) 『許維』

文人畵는 동양화에 있어서 양식개념 보다는 정신이념을 담은 이지적인 사상을 구성하면서 성립된 예술이다. 글자 그대로 학식과 인격이 높은 문인 사대부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예술이기 때문에 그 내면에 내재된 정신적 세계란 매우 심오한 것이다. 문인화는 그 발생시기부터 현실인생의 온갖 부자유의 속박에서 탈피하려는 신선합일적(神仙合一的) 사상의 노장(老莊)사상과 선(禪)사상이라는 일종의 자연미관을 강조하며 '묘오(妙悟)'의 경지에서 대자연에 귀의하려는 속세초월사상을 형성하면서 인간과 자연의 합일된 경지, 즉 자연의 미를 인격화하려는 고차원적인 정신성을 추구하였다. 문인화의 발생이 고차원적인 정신성의 추구로 인한 사의(寫意)적인 상징주의에서 비롯된다고 볼 때 문인화는 현실적인 문제보다는 화면에 내재된 작가의 정신을 제일주의로 삼았던 것이다. 이는 운둔적인 老莊思想에 근거를 둔 탈속(脫俗), 자오(自娛)의 수단으로 이용되어 詩, 書와 함께 작가의 정신을 나타내는 문인화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었던 바, 이로부터 詩, 書, 畵, 一致思想이 문인화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조선말기 문인화의 사상적 배경이 된 세 가지 요소를 간략하게 언급해 보자면, 먼저 "道"에서 시작점을 찾아야 될 것 같다. 자신과 우주의 근원은 바로 "道"이며, 도는 天地自然의 造化의 이법(理法)이다. 그 天地自然에 순응하여 그에 合一하고자 하는 동양문화권 (특히 중국문화권) 에서는 회화의 출발이 寫意的인 象徵主義로부터 비롯한다. 이로 말미암아 동양화는 애초에 그 事實性의 문제보다 화면에 깃든 작가의 情神이 항상 제일주의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작가의 정신이 제일주의인 의미를 가지게 된 배경에는 특히 중국에 있어서 삼국시대 (AD : 3세기 초) 와 육조시대의 사상적 전환기를 산 지식인들과 당대 수묵산수화가들에 의해서 회화가 은둔적 老莊思想과 고차적 정신일치의 禪思想에 입각한 탈속(脫俗), 자오(自吳)의 수단으로 이용되어 時, 書와 함께 이들의 심회를 표출하는 예술분야로 등장함으로써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로부터 송대에는 소동파(蘇東坡)에 의한 詩, 書, 畵 一致思想이 중국 문인화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동양예술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첫째, 선사상(禪思想)은 중국에 선교사상이 최초로 전해 진 것은 520~526년간에 보시달마(菩是達磨)에 의해서이다. 이때의 禪思想은 자가 자신만을 위한 독선적 숙정의 경지를 구하는 것이 아닌 널리 중생을 위한 전미개오(轉迷開悟)에 힘을 쓰는 이타적이고 능동적인 것이었다. 선사상이 중국 회화에 본격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 한 것은 당대 수묵산수화의 등장부터이다. 당대 수묵산수화의 배경에는 선종(禪宗)의 정신과 긴밀한 정신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데, 선종과 회화와의 본질적 일치는 "묘오(妙悟)"라 할 수 있다. "묘오"의 경지란 禪이나 詩와 같이 화가의 수양적 소양을 말한다. 이러한 "묘오"의 경계란 결코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 각고의 정신으로 참선하여 일체의 망상과 잡념을 떨쳐버리고 초월적인 무아(無我)의 세계에 직입해야 되는 것이며, "묘오"의 고차적 체험은 특별히 禪과 畵의 일치된 경계라 할 수 있다. 선가사상에 바탕을 둔 "묘오"의 경지에서 대자연에 귀의 하려는 속세초월사상(俗世超越思想)은 한말에서 唐, 兩宋에 이르러 최고로 발달되어 유교학자들이 이 선종의 초월사상을 받아 들였다. 선종의 초월사상이란 첫째로 惡을 만들지 않기 위하여 속세를 초월하고, 둘째는 대자연의 세계를 깨닫기 위하여 초월하는 것인데, 이것이 선종사상의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선종사상에 바탕을 둔 초월사상은 송대 문인화가들의 유교적 초월과 결합하여, 형식미가 가미된 詩, 書, 畵 一致思想이 나왔으며 원말사대가, 명말청초의 석계(石溪), 팔대산인(八大山人), 석도(石濤)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선사상이 중국문인화의 사상에 근저가 되었다고 볼 때 중국 문인화를 모범으로 삼았던 조선말기의 문인화에도 그 영향이 있었음을 역급해 볼 수 있다.

둘째, 漢대 중국 압세주의(壓世主義)는 3~4세기 육조시대에 이르러서는 도가적 청염(淸炎)과 허무(虛無), 무위(無爲)사상의 영향으로 문인 사대부 간에는 자연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속세를 초월한 일기(逸氣)사상이 널리 일어나게 되었고, 유교사상과 더불어 그 근간사상으로서 문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도가의 대표적 사상가로는 노자(老子)와 장자(莊子)가 있다. 노자와 장자가 내세운 최고개념은 "도(道)"이다. 道의 목적을 노자는 "무위(無爲)"에, 장자는 "유(遊)"에 두고 있다.

노자의 無爲는 '활동이 없는 것' 혹은 '비 활동'으로 해석되지만 전혀 활동이 없는 상태 또는 아무것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人爲)성, 자의(恣意)성 없는 활동을 의미한다. 즉 인간전신의 방임상태, 또는 정신의 진정한 자유해방(自由解放)의 상태에서 지극히 즐거움을 보았고, 특히 예술에 있어서 인위로 부터의 초월을 요구하는 장자의 遊 사상과 같은 경지이다. 이런 면에서 莊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설은 문인화에 있어서도 가장 적합한 이론이라 볼 수 있다. 즉 인위성, 자의성이 없는 활동을 근본으로 하는 무위나, 어떤 간섭이나 주행자(主幸者)가 필요 없고 오직 작가의 독창성만을 중요시 하는 회화나 그 내면에 흐르는 정신적 사상은 모두 다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도판] 不作蘭 『金正喜』

莊子思想의 중심은 그 목적이 현실적 고통과 온갖 부자유로부터의 정신적 해방을 구하는 데 있다. 장자는 그 자유해방의 경계를 상징적으로 "遊"자를 써서 표현하고 있다. "유"자의 의미를 보면 속박과 구속으로부터의 자유 및 유희를 뜻한다. 장자는 첫째 장 "소요유(逍遙遊)"에서 현실생활의 온갖 부자유의 속박에서 해방된 인간 생명의 넘치는 자유해방에서 비익(飛翊)을 대붕(大鵬)의 逍遙에 비유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대붕도 바람을 의지하여야 만 비상을 하듯이 진정한 의미에선 逍遙遊라 할 수 없다 하였다. 즉 逍遙遊란 어떠한 집착과 얽힘도 풀어 없애고 어디에도 막힘이 없이 유유자적하게 노닐 수 있는 정신의 자율을 지칭하는 것이다. 장자의 정신은 자신을 초월하여 완전한 세계에서 인생의 예술화에 목표를 두고 있는 것이다.

셋째 송대의 詩, 書, 畵 一致思想이다. 북송 때에는 정신주의 발달로 작가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시 되었다. "唐詩宋畵"라 할 만 큼 복송회화는 文學化의 두드러진 경향이 특색이며 문학은 繪畵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해서 송 대 회화의 제시(題詩)와 제화(題畵)는 이미 화면의 일부를 차지하였고 화면의 미적 가치를 한층 더하는 것으로 인식이 되어 버렸다. 이에 대표적 인물로는 소동파(蘇東坡)가 있는데 그는 예술에 있어서 "상리(常理)"를 주장하였다. 상리라는 것은 형태가 없는 것이라고 멋대로 그려서는 않되며 강한 정신성에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리는 장자의 '천리(天理)'와 통하며, 사혁의 '기운생동(氣韻生動)'의 氣韻과 통한다. 다시 말해 자연 안에 내재된 정신의 본질을 그리는 것이며, 형사(形似)만 구하지 않고 그 形似를 뛰어넘어 그 내재된 정신의 본질을 그리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시화를 하나로 보는 데에는 "그림을 논함에 形似를 주장한다면 그 소견은 어린이와 다를 것 없고, 시를 짓는데 꼭 어떤 형식을 우긴다면 이 또한 시를 아는 사람이 아니다. 시는 그림과 본래 일치한 것이니 그 공교함은 천기(天機)를 얻어야 하고 그 기운은 청신(淸新)하리로다."하였다.

그의 이러한 詩, 畵 一致사상은 송 대 이래 중국문인화의 기본정신이 되었고 동시에 동양화단의 특징이 되었는데, 우리나라에도 전래되어 조선전기의 文人士大夫들에 의해서 어느 정도 수용되었고, 조선 말기에 그 꽃을 피웠다 할 수 있다.

조선말기 문인화는 원당(院堂) 김정희(金正喜)로 대변 될 수 있는데, 그는 당시 문인 사대부의 대표격 인물로서 문자향(文字香), 書卷氣(서권기)같은 강한 정신성을 강조하면서 극도의 문인취미를 추구하였다. 단순한 문인화가 아닌 고도의 교양과 날카로운 식별력을 가진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이면미의 세계를 필묵으로 표출한다는 것이었다. 즉 예술에 대한 깊은 조예는 작가의 인격에 의해 결정 된다는 것이다. 문인적 교양이 높을수록 예술심경의 표현 또한 풍부해질 것이며, 결국 이로써 학문적 교양은 인격과 성격에 귀결되고 문인 예술론상 불가결한 요소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먼저 조선 말기에 문인화가 성행하게 된 그 시대적 배경과 정치적 상황, 소위 김정희 일파라 일컫는 조선말기 대표적 문인화가들 에 대해 살펴보자.

그 시대적 배경으로는 먼저 청조문화의 급속한 유입과 실학사상으로 인한 개화사상을 들 수 있다. 실학으로 인한 개화세력이 점차 성장하여 종래의 엄격한 유교적 신분계급의 격차가 완화 되면서 평민문학이 융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서 중인계급의 문화적, 학문적 활동이 활기를 띠어 서화를 즐기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19세기에는 이와 같이 중인출신들이 신분상승을 위해 몸부림치던 시기인데, 이들은 신분상승을 위하여 조직적으로 대응하면서 동시에 양반들의 사고나 생활방식을 추구하였다. 특히 중인출신 화가들은 사대주의사상과 남종문인화 지상주의자 이었던 원당 김정희 주위를 맴돌며, 그의 회화세계를 추종하였다. 19세기 회화를 주도 했던 세력이 바로 김정희를 중심으로 한 문인사대부와 중인출신이었고, 중인출신들이 지배적이었다.

정치적 상황으로는 조선후기의 문화발전에 얼마간 진보적 역할을 했던 노론집권층이 주변정세의 위협과 함께 국내적으로 봉건적 질서의 와해 위기 속에서 집권보장을 위한 보수화 추세에 의해 문인화 취향 일변도로 경직화 되었고, 신분에 의해 역할이 수직이분 된 봉건적 화단구조에서 기능을 담당했던 화원들이 역사변혁의 주체의식 없이 이념주도층의 취향변화에 순응함으로써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 도 있다.

조선말기 대표적 중인출신 문인화가로는 난을 잘 그렸던 수월헌(水月軒) 임희지(林熙之)와 오경윤의 아들로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편찬한 吳世昌(오세창)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김정희를 추종한 소치(小癡) 허유(許維)와 고람(古藍) 전기(田琦), 우봉 (又峰)조희룡(趙熙龍) 등이 남종 문인화의 대표격이라 볼 수 있다.

김정희 일파에 의해 寫意를 존중하고 形似를 경시하는 남종문인화는 크게 유행하고 발전하였지만, 조선후기의 진경산수와 풍속화의 터전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김정희일파가 추구하였던 예술이 선비의 고고한 마음, 즉 정신성의 표출에 근거하고 있는 만큼 형사(形似)를 중요시 않고 사의(寫意)를 존중하였던 조선말기의 문인화는 진정한 의미의 문인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도판] 墨蘭圖 『金正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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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1지면 2지면 3

원 게재: 전북회화-문인화의 사상 / 회화지 13호(2005) 29–31쪽 · 원본 PDF 3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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