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 그 기원과 발전
1. 종이의 기원
『동관한기(東觀漢記)』를 바탕으로 한 『후한서(後漢書)』에 보면, 기원후 105년 채륜(蔡倫)이 중국 섬서성에서 종이를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쓰여 있다. 그래서 채륜이 최초의 종이 발명자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1957년 서안(西安) 파교(灞橋)지방 서한묘(西漢墓, 西漢武帝, BC 141~87)에서 마섬유 종이 9매가 출토되면서, 채륜 이전에 이미 종이가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반길성(潘吉星)은 파교에서 출토된 종이가 채륜의 종이보다 최소한 200여년 앞선 것이라 하였다. 그 결과 채륜을 종이의 발명가로 보는 시각과, 이와 달리 기원전 2세기경에 이미 종이가 발명되었고 채륜은 이전의 종이를 쓰기 좋게 개량한 자라는 두 가지 시각이 병치하고 있다.
채륜 이전에 종이가 있었다 하더라도, 종이가 서사재료(書寫材料)로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채륜의 종이 이후이다. 채륜 이전의 종이는 너무 거칠어 글씨롤 쓰기에는 부적합하였다. 채륜 이전 종이라고 출토된 것들은 서사재료가 아니라 포장지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방마탄지에 지도가 그려져 있기는 하지만, 채륜 전에는 서사재료로 종이가 아니라 목죽편(木竹片)과 견(絹)이 주로 쓰였다. 즉 채륜이 종이를 발명했든, 개량했든 이 시대에 이르러 종이가 서사재료로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고 3세기에 이르러서서 다른 서사재료를 거의 대치하게 되었다.
2. 종이 제조업의 발전
우리나라에 제지술이 언제 전래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현재까지 찾아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일본서기(日本書記)』에 고구려 승 담징이 영양왕 21년(610)에 종이와 먹을 만드는 기술을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만이 전한다. 따라서 적어도 610년 이전에는 제지술이 우리나라에 전해졌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중국에 채후지(蔡侯紙)가 만들어져 종이가 널리 쓰이게 된 2세기 이후 우리나라에 제지술이·전래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닥나무'의 어원, 제지 방법 등을 같이 놓고 볼 때 우리나라에 제지술이 전래된 것은 늦어도 2세기초부터 4세기 사이 삼국시대일 것으로 추론된다.
종이원료는 우리나라에 제지술이 처음 전래되던 시기의 경우 마(麻)와 저(楮)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다가 7세기 전후에 이르러 닥나무(楮)가 우리 종이의 주 원료로 사용되었으며, 또 이때부터 기술면에서도 중국의 제지술에서 벗어나 우리만의 기술로 종이를 제조하게 되는 것 같다. 즉 7세기초에는 우리나라의 기후와 기호에 맞는 적당한 원료를 사용하였고 제조법도 정립되었으며, 품질도 제고되는 등 중국과 일본에 비교하여 그 특징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지배층들의 서사용(書寫用) 이외에 일반백성들의 생활용품으로 종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후기 이후 고려시대부터일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제지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에 이르러서이다. 고려시대에는 제지술에 관한 기록이 더러 있고, 제지업이 국가사업으로 이행되었다. 고려정부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종이를 농민들에게 공납을 받는 것과 함께 특수집단인 '소(所)'에서 양질의 종이롤 생산토록 하였다. 중국인들이 제일의 종이로 선호하는 고려지는 이 때 형성된 것이다.
조선건국후에는 한양에 조지서(造紙署)라는 기구를 설치해 종이생산을 담당케 하였다. 조선은 남원, 전주 등에서 수급되던, 중국과의 외교문서 등에 쓰이던 양질의 종이가 한계를 보이자 이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조지서라는 관서를 두어 종이를 생산했던 것이다. 한편 지방에는 지소(紙所)를 두고 종이를 생산 수급토록 하였다. 지방 장인의 경우 전체 3,511명 중 지장이 698명으로 가장 많았다. 조선은 건국 후 중앙의 조지서와 지방의 지소를 통해 종이을 공급하는 관영수공업형태로 자리하였으며, 조선후기 공물(貢物)의 수급방식이 공인(貢人)에 의한 공물대납제(貢物代納制)로 바뀌면서 지소 등이 쇠퇴하고 사찰 등 민간제지업이 성행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조선후기 종이의 질이 일정하게 떨어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3. 천하제일의 종이 고려지
우리 종이는 고려지(高麗紙), 혹은 계림지(鷄林紙)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알려졌다. 계림지란 명칭은 신라에서 만들어진 것에서 비롯된 이름이고, 고려지는 고려에서 제조된 종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이런 명칭과 함께 우리종이는 백지를 가다듬었다는 뜻으로 보이는 백추지(白硾紙), 거울같이 매끄럽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경면지(鏡面紙), 다듬이질을 하여 마치 비단결 같다는 의미의 견지(繭紙) 등으로도 불렸다.
우리 종이 한지는 고려시대 이래 그 뛰어난 품질로 인해 대표적인 중국 수출품이요 조공품이었다. 중국에서 우리 종이가 고려지란 이름으로 많이 쓰였고, 또 지금까지도 고려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그만큼 고려의 종이가 뛰어났음을 의미 하며, 이때 이후 제지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중국에 우리 종이의 위상을 굳건히 구축했음을 말해 준다.
명나라 심덕부는 당시 중국에 유통되고 있는 종이 중에서 고려지가 제일이라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진나라 왕희지가 그 유명한 난정서(蘭亭序)를 고려지에 썼다고 한다. 청나라 때 곡응태는 '고려종이는 솜과 누에고치로 만들었는데 비단과 같이 희고 질기다' 라고 하였으며, 명나라 때 고렴은 '고려지가 하얀 색이어서 비단과 같다' 라고 하였다. 서긍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고려지가 도침을 해서 모두 윤택이 난다"라고 하였다.
고려지가 유명했던 것은 질기고 단단하며 반들반들 윤택이 났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이희경은 "우리나라 종이는 성질이 본시 단단하고 질겨서 창문을 바르면 능히 오래 가며, 돈과 같은 두꺼운 종이는 기름칠을 하여 방 가운데 깔고 앉으면 물을 엎질러도 물이 묻지 않는다. 이렇기에 부귀한 집에서는 이것을 방석보다 많이 쓴다. 이런 것 때문에 우리나라 종이는 천하에서 최고"라고 하였다. 북송(北宋) 진유 또한 "고려지는 촉(蜀) 중의 냉금(冷金)과 같이 단단하고 아름답다"라고 하였다. 일본의 서지학자 팔목(八木)은 '신라의 백추지는 다른 어떤 종이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종이로 중국에서도 제일이다' 라고 하였다.
이처럼 우리 종이 한지는 비단처럼 반들반들하고 질기며 단단했다. 이런 특성은 순닥을 원료로 해서 장섬유를 쓴데 기인한 것이었다. 즉 닥을 원료로 해서 섬유를 자르지 않고 방망이로 두들겨 고해하여 종이를 제조함으로써 우리 종이는 마치 비단 같았고, 그 결과 천하제일의 명품으로 자리하였던 것이다.
원 게재: 전북회화-역사와미술 / 회화지 13호(2005) 32–33쪽 · 원본 PDF 33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