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으로 부터
작품

작업노트
새벽까지 벗들과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한 모금씩 마시던 소주가 어느새 내 몸깊숙히 스며든다.
몽롱한 만취상태에서 지난날의 추억들이 떠오른다.
20대 중반의 힘겨웠던 생활! 그리고, 행복했던 연인과의 추억들………
담배 한 모금의 기억들이 연기처럼 사라져 가버리면, 맘 한구석에는 11월의 싸늘한 새벽바람만이 남는다.
술을 먹지 않는 날은 예전과는 달리 자주 붓을 대하지는 못하지만, 가끔씩 작업을한다.
현실에 얽메이다 보니 쉽게 영감이 떠오르지 않고, 작업하는 것이 두려워 진다. 그러나, 일단 화폭에 마음을 담으면 평온함에 목마른 씨앗이 단비를 맞듯 활기가 넘쳐 흐른다. 그러면,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세상만사 걱정들이 모두 사라진다.
검정색이 싫어 좋아질때까지 칠해보고
하얀색이 싫어 좋아질때까지 칠해보고 평면적인 면이 싫어 오브제를 이용해 생명의 근원인 구름 사람들의 이상인 새, 그리고 이름모를 들꽃, 알아볼 수 없는 형상들이 모여 어느새 작품하나가 완성되어 가고 있는것이 느껴진다.
내가 자연을 주제로하여 작업을 하는데에는 이유가 있다.
-어린시절 시골에서 들과 물 그리고 산을 벗삼아 살아왔고 그 곳에서 정서가 형성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봄이되면 누나와 함께 나물 채취하러 들판에 나가면 이름모를 꽃들로 시계를 만들어 주던 기억, 나는 수줍음을 타면서도 내심 시계를 갖는다는 설레임에 손을 내민다. 창공에는 새들과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저멀리 지평선에는 아지랭이가 살아 꿈틀거린다.
여름에는 마을앞 냇가에서 고기를 잡고, 버드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어보고, 싫증이 나면 구멍을 뚫어 음율을 맞춰 보기도 했다. 가을에는 풍성한 과일들이 나의 식욕을 돋군다. 우리집에는 감나무 밖에 없어 밤, 대추, 단감, 사과, 포도등 모든 과일은 주변에서 구해야 한다. 한 밤중에 몰래 담을 넘어가 따먹 기도 하고, 친구들과 대낮에 서리를 하곤 했다. 그러다 들통이나면 호되게 혼나본 기억들이 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덜 익은 포도가 시면서도 그렇게 맛있었는지………
그렇게 겨울은 왔다. 내 어릴적 겨울은 사냥의 계절이었다. 시장에 가는 어머니께 쥐덫을 부탁해 사냥을 했다. 눈이 많이 내리면 꿩, 비둘기들은 먹이를 찾으러 야산 들녘으로 나온다. 그때 추수를 끝내고 남은 찌꺼기 위에 쥐덧을 위장해 두면 꿩과 비둘기가 먹이를 찾아 쥐덧에 걸리곤 하였다. 대부분 다리에 상처가 나는데 그렇지 않은 놈들은 토끼장에 가두어 기르기도 했다.
이렇듯 유년시절이 자연과 벗삼아 살아오다 보니 자연은 나의 친숙한 벗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은 물질적인 현실속에서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자연의 품속으로 되돌아가 전원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산, 들, 바람과 함께 벗삼아 작품을 채소 가꾸듯 일구어 나가고 싶다.
원 게재: 나의작업노트 / 회화지 5호(1997) 22쪽 · 원본 PDF 24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