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의 네거티브에 녹아 있는 인간문제 — 고 재 명 전
1997.1.24~2.2 기린갤러리
[도판] 무제 / 600×210 / 한지에 수묵, 1997
작가 고재명은 회화라는 그릇에 무엇을 담아내고자 했을까? 이 점이 우선 궁금해진다. 물론 그 해답을 작가의 답변에서 쉽게 유추해 낼 수도 있으나, 작품속에 내재된 암시적인 징후를 발견해 보기로 하자. 그는 나름의 독자성으로 〈인간문제〉라는 일관된 주제를 진지하게 파들어가는 작가로 인식된다. 그가 다루는 인간문제는 인간을 단순한 소재로 놓기보다는 형태의 해체와 변형 따위를 한층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히 폭력적, 파괴적이라 할 만큼 보이는 이로 하여금 비정상적이거나 소름끼치는 감정을 느끼게끔 구체적인 형태를 알 수 없이 양파 껍질을 한 꺼풀씩 탈골된 인물, 이목구비가 마모된 끔찍한 몰골로 마치 무덤에서 막 걸어 나온 듯한 미이라 또는 죽음의 마스크를 가진 유령들과도 같다. 이처럼 괴기하면서도 앙상한 뼈대만 남은 인체의 표현 방식은 초현실주의, 혹은 신즉물주의에 속하는 벡신스키(Beksinski)작품과 유사한 독특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특히 여러명이 뒤엉켜 있는 인물군상은 일본의 마루키 부부가 공동제작한(원폭도)를 연상시킨다.
이처럼 그가 표현하고 있는 〈인간문제〉는 죽음과 고통, 두려움, 절망, 운명이라는 한계상황 앞에 내던져진 실존철학적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아마도 절망도 없고 고통도 없으며, 기본적인 권리도 빼앗긴 현실의 비가시적인 측면을 우리에게 펼쳐보이면서 우리의 잠재된 의식세계를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는듯이 보인다. 작가는 퇴화하고 뒤틀린 인간 몰골의 형상화 작업을 통하여 창조적 해체형식으로 총체주의적 현실을 마음껏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상상세계는 인간의 극한 상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생의 끈덕진 의지와 절규하는 음성을 통해서 들려오는 인간의 한과 아픔은 삶과의 싸움을 배제할 수 없는 운명지워진 인간의 실체인 것이다. 〈인간문제〉그림의 강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부러 내세우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드러내보이는 아픔, 강조하지 않으나 심각하게 인식되고 있는 파괴된 인간의 실체가 범상하게 함축되어 있음을 본다.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 배면에 깔린 기본적인 방식은 현실과 몽환의 중간지점에서 무엇인가 항상 꼬여있는 매듭을 풀기 위해 몸부림치는 듯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번 작품은 크기나 내용면에서 보는 이가 중압감이 들 정도로 거의 100호 크기가 넘는 대작들을 서로 연결지어 펼쳐보이고 있다. 기법적인 면에서는 줄곧 해왔던 작업과 마찬가지로 수묵의 번짐과 마블링 효과를 적절하게 구사해 긴장감과 생성의 이미지가 담겨있다. 마블링에서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면과 마치, 인간의 실 핏줄을 해부하여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선들의 섬세한 움직임의 서로 면들이 겹겹이 누벼지면서 힘의 불균형을 창출한다. 이 불균형의 형태들이 긴장감을 조성하고 이 긴장감이 이번 작업의 주요 원동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전의 작품들은 대개가 인간의 절규와 몸부림 속에서 실존의식을 반영해 보고자 했다면, 이번 작품의 특징은 자연이 갖는 또는 땅속에 용트림하고 있는 뿌리나 고목에서 생명력을 끄집어 내면서 독특한 대응력으로의 변화를 보여준다. 마치 태초에 우주가 생성되는 빅뱅의 순간을 흑백의 네거티브 필름을 통해 보듯 이번 작업들은 매체의 물적 체험을 정신적 체험이나 생성의 원초적 체험으로 환기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생명의 존엄과 초월적인 상태에 대한 동경으로 세상을 새롭게 보려는 체험과 깨달음이 스며있는 대작으로 구성된 연작 시리즈는 우주의 이치를 체득해내고자 하며 근본에 순응해 초월에의 의지를 세우고자 하는 정신적 승화의 결정체들이다.
단순한 원근법이나 전통적인 재현기법에 의존하여 형상의 외양을 담아내려는 의도가 아닌, 기하학적 구조에 의한 공간분할은 시각적 주목성을 높이고 화면속에 보다 은밀한 개인적 사색의 영역을 확보하고자 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은 세계와 자연에 대한 그의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의 모든 물상이 결국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하고자 함이다.
이와 동시에, 그가 시각적 형태의 해체를 통해 심리적 자극을 유발시키고 마침내 얻고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고도의 산업사회의 삶속에서 부품화되고 지쳐가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현대문명의 이면에 감추어진 부조리한 인간에 대한 자기 성찰을 인식과 체험에 호소하려는 강렬한 외침을 담고자 함이다.
오늘날 고도의 산업사회 삶속에서 박제화되고 지쳐가는 부조리한 인간의 모습을 조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명과 자연 생성의 원초적 체험을 환기시키기 위한 그의 노력은 소중하고, 시의적절하게 받아들여 진다. 그러나 어떻게 사회 역사적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그가 추구하는 인간문제와 생성의 원초적 체험 및 문명비판 의식이 움틀지고 계속 따라다니는 숙제로 남아 있을 것이다.
1997.1 김선태: 미술평론가
원 게재: 전시리뷰 / 회화지 5호(1997) 7쪽 · 원본 PDF 9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