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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문화 유적을 찾아서

왕궁리 오층 석탑 (王宮里 五層石塔)을다녀와서

이철규

[도판] 옛날에는

늦 가을 치고는 화창한 일요일이다. 오후에 집사람과 두 딸을 데리고 왕궁리 오층석탑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전주에서 삼례를 거쳐 익산쪽으로 10여Km 가다보면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유적지가 나온다. 가는 길 간간이 요업 공장들이 들어 서 있다. 도로 옆 잡초 사이로 보이는 흙들은 참으로 붉은 황토이다.

이 길을 2년 동안 매주 한번씩 지나오면서 수 없이 "왕궁리 오층석탑"이란 표시판을 보아 왔건만, 한번 들려야 할텐데... 하면서 미룬 것이 오늘에서야 그 뜻을 이루게 되었다. 왕궁리 오층석탑의 소재지는 익산 왕궁리인데 익산은 우리나라 역사상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근래에 이르러 이지역은 백제 말기의 선도, 즉 別都가 경영된 곳이며, 그 사료가치가 높은 곳으로 미륵사지탑 등 백제시대의 유적들이 많은 곳이다. "왕궁"(王宮)은 말 그대로옛 백제의 왕궁이 있던 "터" 였던 곳으로 지금까지 왕궁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옛 백제의 영화의 터, 이름 그대로 백제의 옛 고도, 왕궁이 있던 곳.... 옛 왕궁의 자취는 없어졌지만 그 혼만은 살아 있는 것 같은 고장이다.

주차장에서 내려 조그마한 소나무 숲을 지나면 앞 쪽에 석탑이 아스라이 눈 앞에 들어온다. 어느 곳에서 날아오는지 수 많은 무당벌레들이 날아와 온 몸에 내려 앉는다. 왼편에는 조그마한 소나무 숲이 자리하고 있는데 화창한 일요일이라 그런지 몇몇 가족단위로 야외식사를 하고 있다. 또한 많은 연인들도 쌍쌍이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데 여유 있는 모습들이다. 오른편에는 대조적으로 철조망으로 굳게 둘러쳐져 있는 유적 발굴단 조립식 건물들이 서너 동 들어서 있는데 인적이 없어 적막한 느낌을 준다. 지금은 발굴이 중단되었는지 인적 하나 없이 굳게 자물쇠로 채워져있었다. 자문좀 구할 요량으로 발굴단 사무실을 찾아가 보았으나 역시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처음 본 왕궁리 오층석탑은 백제 예술의 특징이라 볼 수 있는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으며 단아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는 석탑이었으며, 미륵사지 오층석탑과 그 건조양식이 비슷한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익산의 眞山인 乾子山에서 남으로 뻗은 낮은 언덕끝에 자리잡고 있으며 일찌기 내외학자로부터 주목의 대상이 되었으며, 많은 논의가 되었던 석탑이다. 1967년에 해체 수리되어 내부에서 금판 금강경(金剛經)과 금제 사리탑(舍利搭)등 많은 귀중품이 출토되었고 동시에 그 이전까지 토탑을 이루었던 기탑부가 밝혀져 단층기단으로 복원되었다. 이 탑은 고려초 10세기 경 작품으로 추정되며 높이 8.5M이다. 이탑의 양식은 주로 충청, 전라등 백제의 고토에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나, 익산의 미륵사지 오층석탑등 백제 작품을 본뜬 백제식 석탑의 대표작이라 볼 수 있다. 이 탑 주위로 발굴작업의 현장을 볼 수 있었는데 십여채의 집 터들이 발굴되어 있었다.

이곳 왕궁리에서는 수 많은 문화 유적들이 묻혀있는데 밭을 갈거나 개간할 때 지금도 수시로 많은 유물들이 출토된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 - 다음에 다시 올 기회가 있다면 하루빨리 완벽하게 유물들이 발굴되고, 복원되어 옛 백제의 영화를 다시금 피부로 느껴 보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한적한 작은 솔밭 언덕위에 외로이 서있는 왕궁리 오층석탑 ! 옛 백제의 화려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백제왕궁의 위엄을 지키려는 듯이 소나무 잡목사이에 서있다.

왜 이리 오늘따라 유난이도 탑 주위로 무당벌레들이 수없이 날라드는지.......

96. 11. 11 왕궁리 오층석탑 유적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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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1

원 게재: 전북문화 유적을 찾아서 / 회화지 4호(1996) 11쪽 · 원본 PDF 1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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