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에 서린 안개
[도판] 교동풍경
우리나라의 도시 중에서 전주 만큼 따뜻하고 정감 넘치는 도시의 인상을 갖고 있는 곳은 아마 없을 것이다. 마치 우리 모두의 (전주를 다녀가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 마저도) 오랜 고향처럼 가슴속에서 향수가 우러나는 곳 이라고 느끼고 있는게 사실이다. 그것은 아마도 한반도 혹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숨결이 깊숙히 베어 있는 때문일 것이다.
실상 전주의 오랜 역사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한민족의 식량의 대부분을 공급했던 드넓은 곡창 만경평야를 뜰앞에 두고 자리잡은 전주는 옛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반도를 삼분했던 백제의 부활은 꿈꾸었던 견훤이 후백제의 기치를 올렸던 곳이 전주이다. 그것은 그만큼 당시 대규모의 도시로써 문물과 인구가 밀집해 있었던 정신이 살아있는 도시였음을 증명한다. 그 넘치는 팔팔한 기상 때문에 고려시대 이후 배척의 땅으로 따돌려 지기도 했으나 조선 오백년 왕조의 발원지로 다시 역사의 땅으로 떠올라 오늘에 이른다. 언제 다시 그 기운은 솟아 오를 것인가. 현대사의 뒷켠에서 쓸쓸히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전주는 그래도 포근하고 따뜻함 만은 잃지 않고 있다.
조선왕조의 큰 자취를 지금은 많이 잃어 버렸지만 그래도 그 체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 교동이다. 교동은 아직도 고즈넉한 한옥들이 머리를 맞대고 모여 앉아 있어서 우리의 옛마음을 더듬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동은 그 한옥만으로만 말해질 수 없는 전주의 명소이다.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오르내리다 톨게이트를 들어서면 호남 제일문이 전주의 고풍스런 전통의 도시임을 일깨워 준다. 동•서를 가로지르는 은행나무길을 줄곧 내달리면 안내판에 경기전이 그리고 그 오른쪽 방향으로 풍남문이 있음을 알린다. 이곳이 교동에 들어 섰음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노오란 은행나무잎들이 바람에 날리기 시작하는 가을의 중턱에서 그리고 아침의 깊은 가을안개가 채 걷히기 전에 발길을 당긴다. 경기전과 풍남문은 동•서로 마주 보고 서있다. 풍남문은 전주의 동•서•남•북문 등 4개문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며 전주시의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풍남문을 한바퀴 돌면서 시장거리의 정취에서 옛날 성문밖 민가의 저자거리를 느껴 봄직도 하다. 이렇게하여 동쪽으로 나아가면 고풍스러운 근대초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성당이 교동으로 들어서는 정취를 풍겨내고 있다. 경기전은 이렇게 들어서는 교동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데 새로 단장한 분칠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아 낯설어 보이지만 그득한 안개와 세월의 냄새가 얽혀 시간을 거슬러 역사속으로 들어 서기에는 충분한 자태를 첫걸음에 느낄 수 있다. 큼직큼직한 느티나무 숲이 바깥뜰에 가득차고 발아래 밟혀지는 낙엽의 깊숙한 발길은 도심속의 아름다운 낭만이며 세월의 깊은 정을 풍겨준다. 정문을 들어서서 이렇게 느티나무 숲에 안기면 제일 먼저 반기는 홍살문은 다소 엉뚱하다. 이자리에 서 있는 홍살문의 내력을 아는 이가 없다. 벌써 가을바람이 찬데도 평상에 몸을 맡기고 있는 노인들이 많다. 그들도 홍살문의 내력은 모르신다. 늙은이들의 쉼터이며 젊은이들의 사랑의 꿈을 엮어주는 뜰이기도 하다. 결혼식을 앞둔 사랑꾼들이 백옥같은 날개를 펼치고 사진 만들기에 마음이 바쁘다.
전주시민들의 마음의 고향이기에 충분하다.
붉고 넓다란 대문이 굳게 닫혀있는 중문 안쪽에는 바람결에 정신을 놓고 있는 대나무 숲이 무성하고 늘 푸른 소나무가 넉넉한 품으로 서있다. 담장너머 고요한 숨결을 바라보며 경기전의 내력을 읽어낸다. 전북 무형문화재 제 2 호로 지정되어 있는 경기전은 역사의 자랑스러운 자리이다. 1410년 그러니까 태종 10년에 조선조를 창건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창건되었다. 이태조의 영정은 우리나라에 다섯군데에 봉안 되어져 있었다. 개성과 영흥, 경주, 평양과 함께 전주 경기전이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경기전이라 불려지기는 세종 24년인 1442년이었다. 이렇게하여 조선조때 성스러운 민족의 성전으로 자리잡았던 경기전은 민족의 수난의 역사를 따라 고초를 겪었다. 전주 경기전은 선조 30년인 1597에 발발했던 정유재란때 불에 타 소실되었다. 그러나 전주를 제외한 다른 4곳은 훨씬 이전인 1592년 선조25년에 일어났던 임진왜란에 의해 소실되고 말았다. 일제는 이미 이때 부터 우리 민족의 혼을 말살하기 시작했었다. 그들은 우리의 정신, 우리의 마음, 우리의 혼이 베어있는 곳은 어김없이 훼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임진란때도 살아남았던 경기전은 정유재란때 결국 훼손 당했지만 1614년 광해군은 전주 경기전을 복원했다. 그것은 5곳의 어용전중에 유일하게 전주만 복원했다. 그것은 전주를 조선조의 출발지로 삼았던 때문이었으며 그 정기를 계속 이어가기 위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태조의 영정을 바라볼 수가 없다. 경기전은 지금 한창 복원 중이기 때문이다. 일제는 한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또다시 경기전을 훼손했다. 한일합방 이후 이곳에 학교를 세우고 일제는 일본어를 가르쳤다. 지금 우리는 해방 50년을 맞았지만 아직도 본래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경기전의 본래의 모습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오래지않아 경기전 드락에서 이성계가 쉬어 갔다는 오목대와 더 멀리는 남고산을 바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은 커다란 건물들이 가로막아 건너편에서 흐르는 전주천의 물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가슴속에는 그 옛 모습을 그리며 전주천을 바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마도 일제시대에 세워졌을 앞문 건너편 낡은 집들이 아픈 역사가 아닐 수 없었다. 무심하게 원고지와 볼펜을 팔고 있었던 문방구 아주머니는 경기전의 아픈 내력을 그리고 그곳에 서려 있었던 역사의 혼을 알고 있는지 모를 일이였다. 더욱이 뜰 한쪽에는 마치 사찰입구에 세워져 있을 것 같은 부도 모양의 탑과 비가 세워져 있는데 다름아닌 예종대왕의 태실과 비이었다.
구이면 태실부락 뒷산에서 옮겨져 왔다는 이 태실은 8각형의 석난간을 만들고 그안에 안치했다. 그리고 음각으로 쓰여진 6자의 해서체 글씨가 정갈하고 소담하게 "예종대왕태실"이라 읽혀진다. 경기전의 바람이 숨을 죽이고 고요하게 가라앉는 사연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경기전의 동쪽 담장길을 넘어서면 곧바로 교동의 한옥들이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른 아침 젖은 안개를 몰아 대고 있는 아침 햇살이 골목골목에 비쳐들고 부지런한 어른들은 바쁜 걸음을 몰아댄다. 맑은 햇살에 비쳐지는 토담의 황토빛은 전주의 빛깔이다. 농토의 빛깔이며 저항의 빛깔이다. 이 황토빛에 영혼을 담았던 전라도 사람의 가슴이었다. 작은 골목들을 돌면서 햇살을 받아 보았다. 이 햇빛에 희망을 불태웠던 옛사람들이 아직도 이 골목길을 걷고 있는 듯 했다. 나즈막한 담장 너머로 들여다 보이는 처마끝이 땟국물에 젖어 있는 모습에서 그들의 가난을 보았다. 그들은 그동안 가난해졌다. 그러나 겹겹이 그리고 닥지닥지 붙어있는 칙칙한 가난의 때는 우리 역사의 흔적일 것이였다. 현대화에 쫓겨난 역사의 가난이 아니며 우리가 숨쉬고 살았던 숨결의 흔적임에 다름 아니었다. 이제 전주에 들어서면 그 어디에서 유구한 삶의 자국을 얻어 낼수 있을까, 우리는 문명의 가슴앓이를 어디에서 풀어낼 수 있을까, 풍남문에서 경기전으로 그리고 교동의 황토빛 담장을 매만지며 문명의 피로를 털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향교도 교동에 있다. 그리고 강암 송성룡의 기념 서예관이 있다. 그리고 아직도 교동의 숨소리는 전주천의 물소리를 타고 들려온다. 그러나 그 소리는 이제 힘이 없다. 전주사람들은 그동안 몇가지의 잘못을 하고 말았다. 전주천의 맑은 물소리가 전주 남원간 고속화 도로를 만들어 자동차 소리에 막혀버리고 말았다. 그 길은 남고산에서 내려오는 다람쥐도 막아 버렸다. 동편에서 떠오르는 아침햇살의 정기를 높다란 호텔건물이 막아버리게 되었다. 경기전 길 건너편에 높직한 학교를 신축하여 한옥들의 정갈한 풍광을 막아 버리고 말았다. 바람과 새들은 점점 교동을 피해가게 되었다. 사람들도 점점 교동을 떠나가게 되어 버렸다. 사람들의 마음이 떠나 가면서 우리의 역사도 사라져 가고 있다. 그리고 조상의 숨결도 영혼도 정신도 떠나가고 말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경기전 돌담을 걷게 하면 좋겠다. 많은 노인들에게 느티나무 숲의 그늘을 주고 교동의 흙담장의 황토빛을 쬐여 주자. 그렇게 하여 건강한 전주를 교동에서 찾아 보았으면 좋겠다.
원 게재: 전북문화 유적을 찾아서 / 회화지 4호(1996) 7–8쪽 · 원본 PDF 7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