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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문화 유적을 찾아서

벽 골 제 (碧 骨 堤)

방정엽

[도판] 벽 골 제 (碧骨堤)

일요일 오후 동진강을 돌아 벽골제에 갔다.

이제는 잊혀진 작은 무덤처럼 고요한 옛 도작문화(稻作文化)의 중심지인 벽골제. 金堤에서 화호, 부안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가 보면 부량면 포교리(일명갯다리)에 이른다. 이 포교리에서 남쪽 명금산의 북단까지 엇비슷하게 남쪽으로 곧게 뻗어 있는 뚝(堤防)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벽골제 제방이다.

이곳의 지형(地形)을 살펴보면 모악산의 동쪽에서 갈리어 나온 산자락은 낮은 언덕을 이루며 이서, 금구, 용지, 김제시내, 월촌동을 지나 표교리의 초혜산 (신털미산)에 이르러 멈췄고 상두산 뫼뿌리에서 뻗어나온 또하나의 뫼줄기는 금산면과 정읍 옹동, 감곡면을 거쳐 부량면 영금산에 이르러 멈춘다. 그리하여 이 두 뫼줄기 사이에 펼쳐진 넓다란 平原이 이 두 지점에 이르러 마치 병목처럼 가장 좁은 地形을 형성하는데, 바로 이곳에 저수지의 뚝을 쌓았으니 先人들의 슬기에 오직 감탄할 뿐이다.

내고장 金堤는 도작문화(稻作文化) 의 발상지요, 호남평야의 중심지다. 三韓時代에는 벽비리국, 백제때는 벽골군(碧骨郡)인데, 이는 벼의 고장 즉, 볏골이란 뜻으로 벼농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국내 최고 최대 (最古最大)를 자랑하는 저수지 벽골제가 이 고장에 있기 때문이었다.

김제평야를 흔히 '징게 맹경 외배미들' 이라고 말한다.

'징게 맹경' 은 김제, 만경을 일컫는 말이고 '외배미들'은 '너른들' 곧 평야를 일컫는 말로 일망무제 (一望無際) 끝없이 펼쳐진 들이 마치 '외배미(한필지) 같다 하여 이런 이름이 지어졌다. 이 평야에 축조된 벽골제는 백제시대에 축조되었다고 하며 우리 古語로 벽골의 둑이 한자로 碧骨堤라 표기된 것은 이두 표기에 기인한 듯 하다.

벽골제는 오랜세월을 두고 몇번의 보수공사를 했는데 특히, 신라 원성왕 시절 보수공사에 얽힌 단야 설화는 지금도 해마다 행사를 할 만큼 유명하다. 내용인 즉, 서라벌의 원덕랑이라는 유명한 토목 기술자를 초빙하여 벽골제 보수공사를 할 때에 심술궂은 청룡이 나타나서 자꾸만 둑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이는 처녀를 제물로 바치지 않아 그러는데, 마침 원덕랑의 연인 월내 낭자가 찾아오자 김제 태수가 낭자를 제물로 쓰고자 하였다. 이를 안 태수의 딸 단야는 월내 낭자 대신 변장을 하고 있다가 청룡에게 제물로 바쳐서 그 둑이 완공되었다는 설화이다.

이에 후세 사람들이 단야의 넋을 기려 제사를 지냈고 현재에도 벽골제와 단야를 기념하기 위한 여러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이렇듯 유명한 벽골제는 몇번의 보수공사를 반복하다가 조선 세종때 큰 폭우로 인해 둑이 무너졌으나 그대로 방치해 완전히 결궤(決潰)되고 말아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는 수문지주 만이 남아 그 흔적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세월의 무상함 속에 옛 영화는 찾기 어렵고 나날이 몰락해 가는 농촌과 더불어 찬란했던 도작문화도 쇠퇴되고 말았으니 언제 다시 옛 영화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둑위에 바람이 분다.
돌아서는 발걸음은 착잡하다.
단야 아가씨의 희생이 헛되지 않고
다시 살아 오르는 시절을 볼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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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1

원 게재: 전북문화 유적을 찾아서 / 회화지 4호(1996) 12쪽 · 원본 PDF 1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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